익산춘포역사(益山春浦驛舍)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덕실리 508번지에는 춘포역이 있고, 건물면적 125.21㎡의 역사는 2005년 11월 11일 등록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1914년에 건립되어 대장역(大場驛)으로 출발한 역사(驛舍)로, 1996년 6월 1일 행정구역 명칭인 춘포역으로 개칭되었다.
춘포역사는 지붕을 아스팔트슁글 싯트로 얹었으나 초기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트러스는 박공지붕의 목조구조로서 소규모 철도역사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로 역사적, 철도사적, 건축적가치가 크다. 인근에 넓은 들판이 있는데, 일본인들이 여기에 대규모 농장을 개설하면서 넓은 들이라는 뜻으로 대장촌이라 불렸고 역 또한 대장역이 되었던 것이다.
1914년 11월 17일 처음 영업을 개시한 대장역은 건물이 언제 건축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다른 근거나 이론이 없어 영업과 동시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근의 임피역이 1912년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고는 하나, 현재의 임피역사(臨陂驛舍)는 1936년도에 건축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그 이전의 건물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임시역사 또는 임시건물을 활용하다가 새로운 건물을 지은 것이 늦어진 때문일 것이다. 이로인해 임피역사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라는 명예를 넘겨주고 말았다.
국가사적 제284호인 서울역사를 별개로 놓고, 역이나 역사 또는 시설물을 등록문화재로 가진 곳은 모두 37곳으로 알려진다. 자세한 내용을 보면 등록문화재 제21호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45호 연천역 급수탑, 46호 도계역 급수탑, 47호 추풍령역 급수탑, 48호 연산역 급수탑, 49호 안동역 급수탑, 50호 영천역 급수탑, 51호 삼랑진역 급수탑, 63호 함평 구학교역 급수탑, 77호 경의선 구장단역지, 105호 울산 남창역사, 122호 구곡성역, 128호 원창역사, 136호 경의선 신촌역사, 138호 중앙선 원주역 급수탑, 165호 원주 반곡역사, 168호 철도청 대전지역사무소 재무과보급3호창고, 192호 진해역사, 202호 진주역 차량정비고, 208호 군산 임피역사, 210호 익산 춘포역사, 269호 청량리역 검수차고, 270호 반야월역사, 294호 고양 일산역, 295호 남양주 팔당역, 296호 양평 구둔역, 297호 영동 심천역, 298호 삼척 도경리역, 299호 나주 남평역, 300호 화랑대역, 301호 여수 율촌역, 302호 부산 송정역, 303호 대구 동촌역, 304호 문경 가은역, 305호 보은 청소역, 326호 문경 구불정역, 336호 삼척 하고사리역 등이다.
어떤 건축전문가는 오래된 간이역을 조사한 결과 해안지대나 산간지대 그리고 춘포와 같은 평야지대의 간이역 건물이 가지는 특징이 사뭇 다르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춘포역사는 우리나라 간이역 건물의 대표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춘포역사는 목재를 함석으로 싸서 부패를 방지한 것이라든지, 처마를 받치는 까치발에 새겨진 조각(彫刻) 등 섬세한 부분을 간직하고 있다. 건물의 중앙에는 손님들이 드나들었던 두 짝 크기의 문이 있고, 그 문 옆에는 역무원의 출입구였던 외짝 문도 보인다. 개찰을 마친 승객이 비를 피하거나 더위를 식힐 정도의 공간도 두었으니, 처마가 길게 뻗어 나온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현재는 이 문들과 대합실로 들어오던 전면의 문이 모두 폐쇄되어 드나들 수가 없다.
현재 춘포역은 간단한 화물을 나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은 타고 내리는 사람이 없어 역무원조차 배치되어있지 않는 폐쇄된 역이다. 앞마당에는 둥그런 무덤모양의 화단을 만들어 그 위에 나무를 심었으며, 담장을 따라 설치된 꽃밭에는 오래된 사철나무가 있어 그간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인근에 옛 호소가와 농장의 사무실이 있어 익산의 비옥한 농지를 이용한 수탈의 현장이었고, 대장역을 통하여 군산항으로 실어 나르던 아픔의 현장이다. 당시 익산 춘포면과 익산 주현동, 익산 오산면, 김제 죽산면에 대규모의 일본인 농장이 있어 우리를 슬프게 했던 곳이다. 특히 춘포의 농장주는 개인 신사(神祠)를 만들어놓고 섬길 정도로 위세를 떨치던 인물이었으니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어진다. 그러기에 옛말에 나라가 우선이고 다음에 개인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런 곳이었기에 익산에 전국 최초의 관립 5년제 농림학교를 열어 농업에 대한 연구를 하던 흔적이 남아있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춘포역은 익산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였던 역이다. 익산 주변의 전라선은 전주, 동산촌, 삼례, 대장촌, 동이리역을 거쳐 이리(裡里)역으로 이어졌다. 또 호남선의 경우는 정읍, 초강, 신태인, 감곡, 김제, 와룡, 부용, 다음에 이리역으로 이어졌는데 우리들은 이곳 특정구간을 일러 정읍선이라고 하였다. 서쪽으로는 이리에서부터 오산, 임피, 대야, 개정, 군산으로 나가는 일명 군산선이 있었고, 또 북쪽으로는 호남선의 강경부터, 현재의 용동인 용안을 비롯하여 함열, 다산, 황등, 이리역까지의 구간은 대전선이라 불렀었다. 이것은 순전히 이리역을 중심으로 붙여준 우리들만의 편의상 이름이었다.
그렇다고 버스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이용하였었다. 인근지역의 학생들은 아침 일찍부터 걸어서 역으로 모인 후, 열차를 타고 다시 이리로 왔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열차가 자주 있었던 것도 아니니 가까운 역은 그냥 걸어서 가는 것이 더 빠를 법도 한 거리였다. 그러나 당대의 가장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즐기기 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적잖은 시간을 담보로 기다림의 장소가 되어주던 역이었다. 그러다가 또 다른 재미에 빠져 한눈을 파는 사이 차를 놓쳐버리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 예나지금이나 열심인 학생들은 역 귀퉁이에 혼자 숨어서 책을 보며 공부하는 성의도 보여주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대장역에서 내린 손님들이 인근의 삼례다리 근처에 있던 백사장으로 모래찜질을 하러가던 역이었다. 백중사리처럼 만수가 되면 만경강에 바닷물이 들어왔고, 그 물은 삼례천을 적셔 해수욕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넓고 깨끗한 모래사장이 이어진 이름난 해수욕장이라기보다는 그냥 마을 앞에 있는 작은 모래밭이었다. 나도 어머니 손에 이끌려 몇 차례 찾아갔던 곳이다. 당시는 영양이 부족하고 환경도 열악하여 피부병이 잦았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편리한 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으니 민방요법을 찾는 것이 대세였었다. 이는 열차를 탄 후 다시 배를 타고 건너야 했던 장항의 모래찜질장까지 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한 방법이었으니, 당시의 삼례천은 훌륭한 해수찜질장이었다. 그 초입에 춘포역과 삼례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도시 편중에 의해 열차를 통한 이용객이 줄면서 1997년 6월 1일 역무원이 배치된 간이역으로, 2004년 12월 10일에는 역무원이 없는 간이역으로 전락하였으며 2007년 6월 1일 더 이상 승객을 받지 않는 역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의 춘포역 주변은 전라선 전철복선화 공사가 한창이다. 다시 춘포역에서 승객을 태우는 일은 기약하기 어렵지만, 앞으로 다가올 고속전철화 사업에도 대비하여 미리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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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8 익산투데이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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