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래산성(御來山城)
어래산(御來山)은 함라산의 서쪽방향에 있는 산으로, 군산시 나포면과 익산시 웅포면의 경계선상 높이 170m의 비교적 낮은 산이다. 이 산은 금강(錦江) 연안에 맞닿아 있으며, 산의 정상에서는 금강이 한 눈에 보여 군사적 방어목적상 유리한 산성이다.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 산136-1번지의 어래산성은 산림청 소유로 2000년 12월 29일 문화재자료 제173호로 지정되었다.
어래산성은 산봉우리 9부 능선부와 남측의 계곡을 감싸는 테뫼식 성으로 남문지와 동문지가 남아 있으며 성의 외부에 5m 내외의 회랑도가 있다.
성의 남쪽 능선을 횡단하는 성벽은 내외 협축(夾築)을 하였다. 북쪽에서 동향하는 곳이거나 혹은 서쪽으로 돌아내리는 경사부는 성의 안쪽에도 폭 5m정도의 내환도가 있어 협축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성곽의 규모는 높이 3m, 성벽위의 회랑도 폭은 1.5~6m, 성벽 밑으로 돌아간 회랑도의 폭은 1.5m정도이며 전체적인 둘레는 485m로 조사된바 있다.
동향한 능선의 대지는 평탄하며 폭 13m로 길게 늘어져 있어 건물지로 여겨지며, 남쪽 경사면에도 너비 3m정도의 단을 형성한 것으로 보아 어떤 시설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중심부에서는 우물로 보이는 곳이 한 군데 확인되었으나 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어래산성은 ‘함열구지(咸悅舊誌)’에서 당나라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방어용으로 쌓은 보루(堡壘)라고 한다. 그러나 금강 주변에는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함라산성이나 도청산성, 관원산성 등이 있어, 어래산성도 금강을 통해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설치했던 성으로 보인다.
이 성곽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언제 폐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단지 수습되는 기와파편 등의 유물을 통해 볼 때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자료를 찾기 위해서는 추가로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성곽은 돌과 흙을 혼합해 만든 토석혼합축성으로 전반적으로 성벽의 외부만을 쌓고 내부는 경사면에 맞추어 흙을 채우는 내탁(內托)을 하였다.
어래산성지비(御來山城址碑)가 새터마을의 쌈지공원에 있는데, 이는 새로 도로를 내면서 남는 자투리땅에 세워놓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입점리고분전시관쪽에서 올라가는 어래산성길은 그 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위치로는 전시관 마당에서 길 건너에 마주 보이는 산봉우리가 바로 어래산이며,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길은 현재 임도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잎은 우거지고 나무들은 새로운 가지를 냈으니 잘 닦여진 임도를 따라 가더라도 산성쪽으로 접어드는 샛길을 가늠할 수가 없다.
출발지로 볼 수 있는 고분전시관에서 어래산성과 어래산성비에 대하여 물었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나 하여 휴가 중인 사람까지 학인해보니 다행이 그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도 산성에까지 올라가본 적은 없다고 하였다.
이번에는 마을로 내려와서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께 어래산성비를 물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모든 사람을 일일이 찾아 나설 수도 없었지만, 빈집을 기웃거리는 것도 해서는 안 될 일중의 하나였다. 한참 만에 발견한 어래산성 기념비는 산성의 입구에 있든지 산성에 붙어있든지 하여야 맞을 것이지만,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새터마을 입구에 서있었다. 산성비는 산성을 지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마을을 지키고 있다고 해야 맞을 듯했다. 어쩌면 나처럼 어래산에 오르지 못하거나, 어래산성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처럼 잘 보이는 곳에 세워놓고 감상하라는 배려로 다가왔다. 하지만 기념비는 기념물 옆에 있어야 제몫을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짐작하는 바이다.
겨울에 다시 가보기로 마음먹었었지만, 가을이 채 가기도 전에 다시 길을 나섰다. 겨울이 오면 여기저기 가봐야 할 곳이 너무 많기에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위한 방편이었다. 어래산성이 자세히 적힌 등산로 안내판을 따라 나섰다. 지도상에서는 25분이면 충분하다고 하였으니 마음의 부담도 없는 거리였다. 그러나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어래산성을 알리는 표지판은 나오지 않았다. 가던 길을 되돌아 처음 위치로 돌아와서 안내판을 다시보고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안내판이 서있는 산이 바로 어래산으로 서쪽봉우리가 정상이며, 그림은 서쪽을 바라보면서 그렸는데 안내판은 북쪽을 바라보면서 세워놓았던 것이다.
함라의 칠목재는 내가 자주 넘던 길이다. 익산에서 웅포로 가는 중요한 요새이기에 잘 알고 있었던 곳이다. 최근에는 칠목재휴게소가 생기고 음식점도 생겨났다. 함라산의 줄기로 숭림사와 반대쪽에 있는 또 다른 등산로의 시작점이어서 공영주차장도 마련되어 있는 곳이다. 바로 그런 곳에 어래산이 있었다니! 차라리 무심했던 내가 어리석었다고 해야 맞겠다.
칠목재에서 어래산으로 오르는 길은 커다란 안내판이 있어 찾기가 쉽다. 밭을 지나자마자 바로 시작되는 경사면부터가 가파르다. 초입에는 몇 되지 않는 집들이 마을을 이루지만 실상은 빈집들이 더 많은 곳이다. 밭에서는 빨갛게 익어가는 감들이 나를 유혹하고, 더러는 땅에 떨어진 홍시가 있어 벌떼를 불러 모은다. 나간 집 마당에 김장용채소가 자라는가 하면, 움막의 귀퉁이에는 감식초를 만들었을법한 커다란 통들이 보인다. 언제 사용하였는지 모를 문이 굳게 잠긴 기도원의 마당을 지나 산을 향하니, 작은 바구니에 감을 들고 있는 노인이 길을 막는다. 홍시든 곶감이든 약간 덜익은 감을 따서 익혀야 하건만, 어쩐 일인지 완전히 익어 땅에 떨어진 감만 주워들고 있었다. 외딴집 문설주에 귀댄 눈먼 소녀가 생각나서 한마디 거들었더니, 덜 깨진 감을 내밀며 자기 밭뒤로 돌아가면 바로 산성이란다. 그렇지않아도 어래산은 빤히 보이는 외길이라 벗어날 수도 없는 공간이건만, 가지고 있던 마지막 친절까지 나눠주고 있었다.
말이 가을이지 어래산은 아직도 여름이었다. 인적이 드문 길 위에 참나무잎이 떨어졌을 뿐, 키를 넘는 고사리들은 전에 만났던 기억을 더듬어 아는 체를 하고 있었다. 행여나 고사리에게 치일까봐 소나무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뻗어있고, 참나무도 뒤질세라 앞을 다투고 있었다.
인적이 끊긴 산성, 찾는 사람이 없는 산성터에는 터줏대감이 따로 있었다. 백제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온 고사리다. 이제는 그 자손들이 번창하여 고을을 이루니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심사가 뒤틀린 칡넝쿨도, 아무에게나 덤벼드는 엉겅퀴도 고사리를 어쩌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찾는 문지나 성벽마저 그 어느 것도 내어주지 않았다. 작고 아담한 토성에서 한편으로는 얄밉고 거슬리기도 하였지만, 그정도의 지킴이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존재마저 불투명했을 것을 생각하니 고맙게만 여겨진다. 너무도 오랜 세월동안 세상을 등지고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 산성, 산은 정말 스스로를 보호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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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2 익산투데이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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