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7. 송병우의 왕궁저수지완공기념 별장, 함벽정(涵碧亭)

꿈꾸는 세상살이 2009. 11. 12. 13:21

함벽정(涵碧亭)

 

1920년에 왕궁저수지(王宮貯水地)의 둑이 완성되자 부호(富戶) 송병우(宋炳雨)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35년에 세운 누각이다.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동용리 산 572-4번지에 있으며, 익산시 소유의 함벽정 1곽과 일대 8,324㎡에 대하여 1986년 9월 8일 시도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하였다. 송병우의 아호는 표정(瓢庭)이다.

 

왕궁저수지는 일명 용남저수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1930년 3월 27일에 왕궁수리조합이 설립되었다는 기록에서도 연유를 찾을 수 있다. 준공기념비에는 창립위원장이 바로 조합장인 송병우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송병태(宋炳台), 이학승(李學承)등이 창립위원평의원으로 적혀있다. 화강암으로 된 이 비는 건립연대의 숫자를 지워버려 알아볼 수 없으나 흔적으로 보아 소화(昭和) 2년(?)으로 적혀있었던 듯하다. 뒤에 있는 송병우공적기념비는 까만 오석으로 만들었으나 설립연도가 지워지기는 마찬가지다.

왕궁저수지의 면적은 약 8.86㎢, 폭 3.4km, 길이 3.8km인 원형을 이루고 있다. 저수지의 남서부와 북동쪽이 높은 편이고 중앙부는 평탄하며, 동용지와 동벌지, 염곡지 등의 소류지를 가지고 있다. 만수위는 해발11.8m, 최저수위는 해발 1.5m로 물이 넘치면 여수로를 통하여 흘러나가는 월류식(越流式)이었는데, 최근 1992년에 수문을 만들어 일시에 방류할 수 있는 장치를 추가하였다.

왕궁저수지로 흘러들어오는 물은 각기 학현천, 양곡천, 부용천을 거친 후 한 곳에 모인다. 따라서 내려오는 동안 상류의 논과 밭에 충분한 수분을 공급하고 나머지는 저장하였다가 필요시에 방류하는 농업용 수원지를 만드는 것이다. 또 왕궁저수지의 수문에서 내려가는 물은 왕궁천을 이루다가 춘포면에 이르러서는 익산천에 합류된다. 요즘은 관개시설의 발달로 왕궁저수지의 물을 이용하는 논은 많이 줄었으나 왕궁이나 금마, 춘포의 논에서는 일부 이용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인근의 모든 논에서 저수지의 물을 사용하였을 것이니 얼마나 뿌듯하였을까. 대지주 입장에서 볼 때 비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물을 댈 수 있다는 것은 반드시 넘어야할 산을 없애는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왕궁저수지의 수문에서 약 50m 이격된 암대(岩臺)위에 세운 정자가 바로 함벽정이며, 주위에 벚나무를 심어 경관을 조성하였다. 일반 정자에 비해 월등히 큰 이 정자는 여래 개의 칸으로 구분하였으며, 일부는 창호지를 바른 문으로 구분하여 오수를 즐기거나 하룻밤을 묵어 갈 수 있는 별장으로 사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함벽정(涵碧亭)은 푸르름을 머금은 정자라는 뜻인데 정각(亭閣)으로서는 큰 규모에 속한다. 건물의 주춧돌은 석축 2단위의 토방에 세워졌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건물에 팔작지붕을 취하고 있다. 건물의 기단은 1단으로 되어있고 동서로 11.19m, 남북으로 8.46m, 넓이 94.67m²로 약 28.6평에 달한다.

주춧돌을 보면 내부의 마루 밑에 설치한 11개는 마름모꼴의 사각기둥 형태이며, 사방을 둘러 설치한 18개는 네모꼴의 육면체모양인 주춧돌 받침을 두었고 그 위에 상하면을 깎아낸 원구형의 주춧돌을 올려놓았다. 쑥 내민 처마가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치 닭다리처럼 길게 세워놓은 계자각(鷄子脚)을 두었고, 네 모서리에는 별도의 계자각용 주춧돌이 있는데 높이는 91cm이며, 아래쪽의 한 변이 35cm, 위쪽의 한 변이 19cm인 사다리꼴의 팔각기둥 모양을 하고 있다.

주된 기둥 위의 공포(貢包)는 이익공계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일반적인 평주(平柱)위 공포의 쇠서(牛舌)가 전면(前面)으로만 돌출되는 점과는 다르다. 이 건물에서는 좌우 대각선 방향으로도 돌출시켜 마치 귀기둥에서의 공포결구수법(貢包結構手法)과 같이 짜여져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마루는 기둥 밖으로도 베란다와 같은 회랑을 둘렀으며, 중앙 마루는 경계를 두어 여러 개의 방으로 구분하였다. 당시 방을 구분한 문짝은 없어지고 기둥과 문틀만 남아있다. 이 정자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로 수려한 단청을 들 수 있는데, 건물 부분에 그려진 그림은 예술적인 면에서도 우수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기둥과 기둥의 간격에 맞춰 처마도리 밑에도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려 두었다. 주변에 있는 연지에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백련(白蓮)을 갖다 심었다고 전한다.

누정의 전후면에 ‘함벽정(涵碧亭)’이라는 현판이 있고, 누정의 내부 편액으로는 ‘함벽정기(涵碧亭記)’ 등이 있다. 함벽정의 앞마당에서 보는 풍광은 수목이 가리고 있으나 멀리 산이 보이고, 뒷마당에서의 풍광은 바로 왕궁저수지와 맞닿았다. 암대로 올라가는 누정의 언덕 입구에 문설주처럼 두 개의 돌기둥이 있으며 그 중 하나에 함벽정이라고 쓰여 있다.

함벽정의 서남쪽 축대아래에는 관리사(管理舍)가 있다. 당시의 별장이었던 함벽정과 왕궁저수지를 관리하던 집사(執事)의 거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왕궁저수지의 중요성이나 다른 정자와 비교하여 특별히 컸던 함벽정의 관리여서 그랬는지 이곳 관리사 역시 번듯하다. 비록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지는 않지만 여느 여염집보다도 크고 지체 높은 양반의 안채만큼이나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 혹시 송병우의 여름 휴가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할 정도다.

왕궁저수지의 물이 어느 때에 들어왔다가 언제 나가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긴요한 수자원이며 홍수조절도 담당하는 사회기반 시설이라고 말하면서도 예전에 비해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은 확실하다. 어쩌다 들러보는 왕궁저수지는 여기저기 쓰레기들이 떠다니는 방치된 저수지로 전락하였다. 그런 틈을 이용하여 언제부터인지 외국에서 온 물고기들이 자리를 잡았다. 토종물고기의 씨를 말린다는 베스다. 전국의 조사(釣士)들이 베스낚시터로 왕궁저수지를 꼽는다고 하니 그 유명세가 대단하다. 혹시나 표정(瓢庭)께서 아시면 기겁을 하실지도 모를 일이다.

봄에 함벽정으로 가는 길은 온통 하얀 꽃길이다. 함벽정의 앞마당은 물론이며 진입로와 후원에도 오래된 벚나무가 있어 하늘을 가린다. 이 나무들은 함벽정을 세웠던 당시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갑게 맞는다. 경내는 그리 넓지 않지만 언제 보아도 푸근하고 평온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고풍의 한옥이 주는 우리만의 정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 하나, 지엄한 관청이 아닌 흙과 더불어 살아온 농부의 별장이었으니 더욱 그랬음직도 하다.

인근에서 오래된 정자로는 왕궁의 망모당, 금마의 아석정, 여산의 수덕정, 함라의 서벽정터가 있다. 그 중에서도 함벽정은 규모가 크다못해 웅장한 느낌을 주며, 보존 상태도 가장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다. 유사한 누정으로 전주시 교동1가 1003번지에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고 한양으로 가던 중 잠시 쉬어갔다는 오목대가 있다. 이 건물은 시도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오목대가 솟을대문과 같은 인상을 준다면 함벽정은 기와집 안채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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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09.11.11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