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세오충렬유적(三世五忠烈遺蹟)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중신리 131-1번지에 있는 사당으로, 해당 건물과 부지면적 11,018㎡ 전체에 대하여 1982년 8월 30일에 시도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오씨문중의 소유로 정부와 유지들의 호응에 힘입어 세워진 유적이다.
오충렬사(五忠烈祠)는 조선 숙종 7년 1681년에 세웠고,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과 병자호란까지 1592~1638년 사이 3대(代)에 걸쳐 나라를 위해 순절한 해주오씨 5충신(五忠臣)의 유적이 있는 곳이다. 원래는 오응정(吳應鼎)과 그의 아들 욱(稶)과 직(稷), 그리고 직의 아들 방언(邦彦)을 배향(配享)하여 사충사(四忠祠)라 하였으나, 근년에 오응정의 아들 동량(東亮)을 추가하여 오충렬사(五忠烈祠)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오충신의 묘와 오응태(吳應台), 오하몽(吳下蒙), 오식(吳湜), 오석근(吳碩根) 등 직계선조의 묘가 있다. 옆에는 별도로 담을 쌓아 오영우(吳永祐), 오사고(吳思古), 오희(吳僖), 오사만(吳思萬), 오영수(吳永守) 등을 모신 신단(神壇)과 함께 해주오씨삼세신단비도 보인다. 오응정의 묘소 옆에는 오응정신도비를 세워두었다. 건물로는 입구의 충신문(忠臣門)이라 쓴 외삼문과 오른쪽의 신단문, 복절문(伏節門)이라 쓴 중삼문, 영국관(寧國舘), 장의문(丈義門)이라 쓴 내삼문, 3세오충렬사, ‘3자1손3세5충’이라고 쓴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평소 방문에는 외삼문을 통하지 않고 주차장에 딸린 일반 관리사(管理舍)의 문을 사용하고 있다.
오응정(1548∼1597)은 용안현(龍安縣) 출신으로 자는 문중(文中), 호는 완월당(翫月堂)이다. 조선 선조 7년 157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에서 치적을 쌓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까지 호송하였다. 순천부사겸총병부문안사(順天府使兼總兵府門安使) 전라도우방어사(全羅道右防禦使)가 되어 어모장군(禦侮將軍) 욱, 동량과 더불어 남원성(南原城) 전투에서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게 되자 화약더미 속에서 세 부자(父子)가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이를 기리어 영조 35년 1759년에 용안에서 오응정을 제사하고 그에게 자헌대부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렸다.
오욱은 오응정의 장남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충무위부사정(忠武衛副司正)이 되었다. 정유재란때 아버지 오응정을 따라 남원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세가 위급해지자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조정에서는 호조좌랑을 증직(贈職)하고 복절령국공신(伏節寧國功臣)이라는 훈호(勳號)를 추증(追贈)하였다.
오직(1574∼1619)은 차남으로 광해군때 도원수 강홍립(康弘立) 막하(幕下)의 우영천총(右營千摠)으로 요동심하(遼東深河) 전투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강홍립이 후금군(後金軍)에게 항복하자 격분하여 부차(富車)에서 적과 싸우다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모친이 꿈을 꾸는데 뜰에서 설매(雪梅)를 꺾어 품었다하여 자를 사형(士馨)이라 하였고, 호는 삼송정(三松亭)이다.
오동량은 오응정의 아들로 무인이며 충신이다. 호는 운탄(蕓灘), 자는 사운(士蕓)이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봉해졌다. 오동량은 선조 27년 1594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비변랑(備邊郞) 겸 선전관(宣傳官)에 특별 임명되었다. 당시 전쟁 중인 11월 어모장군(禦侮將軍)에, 12월에는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가 되었다. 강화도 전투에서 김천일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공을 치하한 것도 기억할 만하다.
오직의 아들 방언(1588∼1637)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싸우다,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을 당하자 샛강에 투신자살하였다.
1597년 8월 14일과 15일 양일간의 남원성 전투에서 정부군은 명나라 장수 양원과 함께 적을 공격하였으나, 양원이 비오는 날 밤 적의 기습을 받고 도망가면서 중과부적인 오동량군(吳東亮軍)은 패전하고 만다. 이때 아버지 오응정, 형 오욱, 그리고 오동량과 의병들이 산화하니 8월 16일에 그 수가 5,000명을 넘었다. 그러나 이에 맞선 왜군은 56,000명에 달했다. 이 전투에서 순절한 의병들과 학살당한 민간인까지 합하면 무려 만여 명이나 되는 목숨이 희생되었다. 정부는 이런 고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만인의총(萬人義塚)을 세운 것이다. 여기에 아버지 오응정과 아들 오욱, 오동량의 위패가 포함되어있다.
만인의총(萬人義塚)은 남원시 향교동 636번에 있으며 국가사적 제272호 지정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때 나라를 지키다 순국하신 접반사 정기원, 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 부사 임현, 통판 이덕회, 구례현감 이춘원 등 민관군 1만여 명의 충혼을 모신 곳이며, 충렬사에는 임진란과 정유란에서 순국한 50여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강점기에 일제의 탄압으로 단소가 파괴되었고 재산도 압수당하였으며 제사마저 금지해 오다가, 해방과 더불어 사우를 일으키고 매년 9월26일(정유년 음8월16일 해당)에 만인의사 순의제향(殉義祭享)을 다시 모시게 되었다. 예전의 사적 제102호는 1964년 현위치로 이전하면서 사적 제272호로 변경되었다.
오충렬사는 현종 7년 1666년에 건립하여 향사하도록 하여 현종 11년 1670년에 착공하였으나, 재원부족과 국가환란으로 취지가 무색하게도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978년 용안의 유림들이 발의하고 1981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지 9,000평에 오충렬사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1982년에 묘역이 확장되면서 기념비와 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사당과 내삼문, 외삼문 등이 차례로 건립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관리사무소, 신위를 모신 사당, 유품과 유물을 전시한 영국관(寧國館)과 오공신도비(吳公神道碑)가 있다. 외삼문과 중삼문의 사이에는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한 느티나무숲이 넓은 잔디밭과 함께 가을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아내는 삼세오충렬사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긴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느 사당이나 어느 향교가 비슷한 것이 아니겠는가. 특별히 자신의 조상 누군가가 연관이 있다면 몰라도, 모두가 다 같이 느껴지는 것은 매 한 가지일 것이다. 무덥던 여름 어느 날, 한낮을 알리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들어선 곳이 바로 삼세오충렬사였다. 얼마 뒤에 다시 찾으니 이번에는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나를 반긴다. 그러나 내가 그날에 맞춰 다시 찾아올 수가 없으니 그저 안타까운 심정이다.
물론 나로서도 다른 이유가 없이 그냥 찾아본 곳이었다. 그전에 남원의 ‘만인의총’을 둘러본 적이 있었지만, 유적지를 둘러본다는 외에 아무 뜻없이 보았던 탓에 이와 연관이 있었다는 것을 까마득히 몰랐다. 그러기에 생각이 없으면 손에 쥐어줘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둘은 아마도 형제나 다름없는 형국이었다.
요즘 원호처에서 3대에 걸쳐 군복무를 마친 가족을 찾고 있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자랑스런 군복무를 마쳤지만, 3대에 걸쳐 모두 복역을 한 가족은 자랑하여 마땅하다는 판단에서다. 우리 가정을 보더라도 나는 공병장교로 전역하였고 아들은 오늘도 최전방 철책에서 수색중대장으로 복무중이니 문제가 없으나, 작고하신 선친께서는 군복무를 하셨는지 잘 모른다. 삼촌은 군에서 전사하셨고 오촌당숙께서는 상이군경용사인데, 나이가 많으셨던 선친의 군대생활 얘기는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는 강점기였으니 군에 간 것이 잘한 것인지, 아니면 안 간 것이 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오씨 가족은 3대에 걸쳐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목숨을 아깝다하지 않고 나를 던져 희생하였으니 그 대가로 지금의 우리가 있지 아니하겠는가. 그런 분들에게 하물며 재산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지금의 권세가나 정치인들은 각성하여야 한다. 목숨걸고 군대에 다녀온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에는 반대하면서, 자기 재산을 늘리고 권세를 유지하는 데에 기를 쓰는 것을 보면 불쌍하기마저 하다.
2009년 어느 날 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국무총리 그리고 대통령실장과 감사원장, 국가정보원장, 4명의 장관을 포함하여 집권여당의 원내대표까지 군대 징집면제를 받은 것은 다시 찾기 힘든 전례가 될 것이다. 또 어디까지 선을 그을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권력자 본인 또는 그들의 아들이 군에 가지 않은 수가 절반에 가깝다고 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누구라도 몸이 아프고 체력이 떨어져서 군대에 가지 못할 수는 있으나, 그 사람들이 모두 몸보신할 형편이 안 되고 병고칠 돈이 없어서 그랬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 형편상 법적으로 면제대상인 경우도 있겠으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니 그것 또한 명쾌한 답변은 되지 못할 것이다.
비행기타고 미국가서 애를 낳으면 미국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고, 출산 때가 되면 줄을 서서 떠나는 사람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자기는 군대에 가지도 않았으면서, 잠에 찌들어 졸고있는 초병에게 근무는 이렇게 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선수생활을 하지 않은 축구감독은 없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축구감독 되는 일에 노력하면 충분하다. 목숨걸고 싸우는 군대를 축구부와 비교하는 것은, 이번 전쟁에서 지더라도 다음 전쟁을 이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편협된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남의 희생을 두고 박수 한 번 쳐주면서 말로만 고맙다고 하면 끝이 아니다. 그 박수에는 진정으로 느끼는 고마움이 묻어나야 한다. 그리고 본인도 그에 준하는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방은 내가 말하는 고마움을 받아들일 것이다. 입에 발린 립서비스는 아무 소용이 없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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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09.11.25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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