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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우리민족의 최대 민속놀이인 농악/무형문화재 이리농악

꿈꾸는 세상살이 2009. 12. 23. 08:49

이리농악(裡里農樂)

 

이리농악은 이리지방에서 전해오는 민속음악의 하나다. 1966년 6월 29일 우리의 민족의 고유음악인 농악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고, 이리농악은 후에 ‘제11-다’호로 추가되었다. 그것은 이리농악이 가지는 정통성과 우수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본다. 현재는 익산시 모현동 2가 303-4번지에 이리농악전수회관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농악은 우리민족이 낳은 대표적인 전통공연 예능 중의 하나다. 타악기인 풍물의 기악연주를 중심으로 하면서, 무용적요소를 비롯한 연극적요소와 유희적(遊戱的), 제의적(祭儀的)인 요소 등을 두루 통합한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공연예술이다. 이리농악은 문굿(달아치기, 멍석말이), 당산굿(질굿, 고사굿, 안바탕, 미지기굿, 개인놀이, 인사굿), 샘굿, 들당산굿, 마당밟기(마당굿, 샘굿, 조왕굿, 철용굿, 노적굿, 고사굿), 판굿(내드림굿, 우질굿, 좌질굿, 풍류굿, 양산도, 안바탕, 삼방진, 방울진, 호호굿, 달아치기, 미지기, 짝드름, 일광놀이, 구정놀이, 인사굿)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리농악의 판제는 첫째마당, 둘째마당, 셋째마당과 뒷굿으로 구분된다. 공연순서는 시작을 알리는 내드림굿에서는 청령소리굿, 일채굿, 휘모리이채굿, 삼채굿, 이채굿, 인사굿으로 이어진다. 첫째마당에서 셋째마당까지는 이리농악 판굿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데, 첫째마당은 오채질굿, 좌질굿, 우질굿, 풍년질굿, 양산도, 삼채이음굿, 삼채굿, 삼채변형굿, 삼채굿, 빠른삼채굿, 긴매도지로 이어진다. 둘째마당에서는 오방진굿, 오방진변형굿, 진오방진굿, 삼채이음굿, 삼채굿, 삼채변형굿, 삼채굿, 빠른삼채굿, 이리매도지 등으로 연결된다. 셋째마당에서는 일채굿, 어름굿, 호호굿, 자진호호굿, 乙자진굿, 방울진굿, 가위치기, 빠른삼채굿, 짧은매도지 등으로 이어진다. 넷째마당의 개인놀음으로는 쇠놀음, 고깔소고놀음, 채상소고놀음, 설장고, 열두발상모놀음, 기놀음 등이 있다.

 

이리농악의 기능보유자 김형순은 1933년 9월 7일 전북 부안군 주산면 신기리에서 태어났고, 13세 때 장고에 입문하였으며 17세 때에 부안의 이동원으로부터 설장고놀이를 배웠다. 또한 그는 정읍, 김제, 부안을 중심을 조직된 정읍농악단을 따라다니며 체계적으로 농악을 배웠다고 전한다. 20세인 1952년에 전북 익산시 평화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박남석, 이동원, 김문달, 현판쇠, 김경천, 강기팔, 양병권 등에게서 풍물지도를 받았다. 1953년 3월에 당시 계모임 형식의 농악단을 구성하였고, 1959년 4월 초파일에 ‘이리농악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이르렀다. 그 후로 인근 타 지역에서 우도농악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리농악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리농악은 1981년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여, 1983년 제1회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1985년 9월 20일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도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그리하여 1986년 11월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의 가치를 인정받아 중요무형문화재 제11-다호로 지정받기에 이르렀다. 더불어 이리농악보존회도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고, 1991년 11월 모현동 외장마을에 이리농악전수회관을 건립하여 맥을 잇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의 농악에서 ‘제11-가’는 영남형농악의 전통을 지닌 진주·삼천포농악이며 김선옥예능보유자와 박염예능보유자가 있고, ‘11-나’는 경기충청지역에서 활동하던 전문연희패에서 뻗어나온 두래패의 영향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맥을 이어온 평택농악으로 김용래예능보유자가 있다. ‘11-다’는 이리농악으로 김형순예능보유자, ‘11-라’는 강원도 영동지역의 대표농악인 강릉농악으로 정희철예능보유자와 박기하명예보유자, ‘11-마’는 호남좌도농악의 대표인 임실필봉농악으로 양진성예능보유자가 각기 전수조교를 두고 후진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진주·삼천포농악은 전원이 전립을 쓰고 채상이나 부포를 돌리는 것이 다른 농악과 상이하며, 군악의 영향으로 쇠가락이 빨라 진법놀이가 활발하고 씩씩한 기상을 느낀다. 평택농악은 가락이 빠르고 힘이 있어 맺고 끊음이 분명하나 어딘지 여성스러운 풍취를 준다. 당산벌림과 무동놀이가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무동던질사위, 앞뒤곤두, 동거리와 곡마단 등은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강릉농악은 쇠와 소리의 가락이 옛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으며, 가락을 반복하고 농사의 전 과정을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필봉농악은 우리가 흔히 듣던 가락을 들려주는데, 느린 듯하나 웅장하고 힝이 있으며 남성적이다. 양반과 장구, 포수, 쌍쇠가 각기 자신의 놀이를 보여준다.

이리농악은 호남이라는 성격상 임실필봉농악과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특징으로는 호남우도농악의 대표로 다른 지역의 농악에 비해 느린 가락을 많이 쓰며, 설장고의 가락과 춤이 발달되어 있는데 진법과 상쇠의 부포놀이 및 소고춤의 기법이 다양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음악적 특징으로 비교적 느린 가락을 많이 쓰며 진풀이도 다양한데다, 가락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변주되어 다채롭고 기교가 뛰어나다. 이는 풍류굿과 삼채굿에서 악절마다 맺고 푸는 리듬기법이 다르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영남농악과 다르게 북의 존재는 중요시 하지 않으며, 쇠꾼과 장고잽이 위주의 가락을 풀어간다. 따라서 가락 하나하나를 매우 조밀하게 다루며, 동작의 변화를 예고하지만 시작과 끝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풍류굿과 삼채굿에서는 악절마다 맺고 푸는 기법을 쓰는 등 가락이 구성지고 유장하며 기교가 뛰어나다. 이는 초창기부터 넓은 지역에 걸쳐 전문 농악인들의 지도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것이나, 기존에 전승되던 농악과 잘 어우러져 지금과 같이 독특한 농악이 되었음이 확실하다.

 

계림(桂琳) 김형순(金炯淳)의 설장고는 어깨춤이 곁들여진 흥겹고 구성진 가락과 경쾌한 율동 및 춤사위가 짜임새를 이룬다. 맺고 푸는 리듬의 기법이 변화무쌍하고 막힘없이 자연스러우며, 가락 또한 저절로 흥과 춤으로 연결된다는 평을 듣고 있다.

따지고 보아 우리네 잔치에 농악이 없다면 흥을 돋울 그 무엇도 없다. 온몸으로 연주하는 농악을 듣고 나면, 한바탕 광풍이 일고 간 뒤의 안마당처럼 평온함을 느끼기도 한다. 상쇠의 상모가 돌아가는 데로 나도 같이 머리를 돌리다보면 어느새 그만 현기증이 나고 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이제는 징소리에 맞춰 손뼉을 쳐보면 그 은은함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 소리는 마치 연못 반대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누나의 손등을 간지럽힐 물결이 되어 펴져나간다. 문득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 아직도 상모는 돌아가고 있다.

이제는 지루할 때도 되었건만 농악은 그 끝을 모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흥겨운 가락을 찾아서 장구의 채를 바라다본다. 왼손이 오른쪽으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오른 손이 왼쪽에 왔다가 오른쪽으로 옮겨진다. 발따로 손따로인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에도 장고는 쉴틈없이 흥을 돋운다. 덩더쿵~ 덩더쿵! 장구소리는 보는 이들의 어깨가 절로 들썩이게 만들었다. 이제는 농악을 마치려나보다 하고 생각할 즈음에 다시 꽹과리 소리가 장내를 진동한다. 잠시 쉬는 듯하였던 상쇠는 꽉 쥐어진 탱자나무 채에 힘을 넣어 다시금 꽹과리를 두들기기 시작하였다. 깨갱 깽깽 깽깨개갱~ 뭐라고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상쇠가 운을 띄자 지금까지 조용하던 무대가 다시 법석대기 시작하였다. 징이 울리고 장구가 바빠지더니 마침내 상모도 돌아가고 있었다. 숨이 멎을 듯하다가 다시 살아난 불씨처럼, 활활 타오르는 가락이 혼을 빼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농악을 하는 이나 보는 이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흥겨운 잔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놓아버린 광란이 아니라, 리듬이 맞고 서로 겹치지 않는 조화 속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오른 북을 치면 꽹과리는 반박자를 쉬며, 징이 울릴 시간에는 모든 가락이 잠시 틈을 만들어주는 절묘함이 어우러진다.

우리의 농악은 눈을 지그시 감고 개인이 듣는 음악회가 아니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대소사에 동원되어 마을주민 전체가 즐기는 합동음악이었다. 힘든 농사일에 있어서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음악이었다. 그러기에 큰 소리를 내는 악기로, 활력을 주는 빠른 가락으로,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있는 가락으로, 우리의 생활과 함께하는 음악으로 남아있다.

이리농악전수관에 가면 무대도 없는 작은 원형극장이 있다. 크기나 깊이가 그리 거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웃주민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다. 우리 국민이 우리 가락을 듣고 싫다할 사람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나름의 상황이 다른 만큼 방해를 주지 않겠다는 발상이다. 이리농악은 나보다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선한 가락인 것이다.

요즘 이리농악전수관에는 많은 수강생이 몰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단기간의 집중교육을 원하는 사람들로, 원대한 계획을 세우며 체계적이고 원칙적인 교육을 위한 수강생들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들이 머물다 떠난 자리는 항상 허전함이 맴돈다고 한다. 각 지역에서 나름대로 연구하고 공부한 자들이 한 차원 높은 수준의 농악을 배우러 오기도 하고, 취미삼아 배운 농악의 기초라도 제대로 알아보자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멀리서 온 만큼 기왕에 전문가의 완벽한 기능을 배우겠다는 열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1~2주의 짧은 기간에 익힌 기능으로 올바른 농악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니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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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대표하는 5대농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리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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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필봉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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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삼천포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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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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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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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3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