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11. 미륵산성 일명 기준성이라 불리는 고대석성

꿈꾸는 세상살이 2009. 12. 9. 15:04

미륵산성(彌勒山城)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산124-1번지 미륵산 정상의 ‘우제봉’에서 동쪽으로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국유로 1973년 7월 9일 시도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산은 주봉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보면 조금 낮은 봉우리가 또 하나 있다. 이곳은 헬기장이며, 더 내려가면 방송송신탑이 있는 봉우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성은 고조선의 준왕이 남하(南下)하여 쌓은 ‘기준성(箕準城)이라고 하지만, 성안에서 발견된 돌화살촉, 포석환 등의 유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주봉의 정상이 장대(長臺)를 이루며 그 주위에서 금마저(金馬猪)가 찍힌 평기와편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의 성(城)임이 증명된다. 마한의 여러 나라 중 하나가 이곳을 중심으로 영위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산성도 그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과 견훤을 쫓아 정벌할 때 마성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마성(馬城)이 바로 이 산성이다.

미륵산성에 관하여 전하는 기록은 ‘망와선생문집’이 있다. 이는 조선 중기 대문신(大文臣) 김성일(金誠一)의 사위 김영조(金榮祖 1577~1648)가 쓴 글이 실려 있다. ‘등기준성(登箕準城)’이란 글은 기준성에 오른 감회를 적은 것으로, 눈에 보이는 산세와 지리적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미륵산은 약 430m의 낮은 산이지만, 남쪽에는 만경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멀리 금강이 흐르고 있는 익산평야의 주산이다. 동으로는 여산의 천호산이 줄기를 두르고, 운장산 등 노령산맥과도 연결된다. 남북에 강을 끼고 남․서․북의 세 방면에 지류가 있어 해로(海路)로부터 진입로를 이룬 교통의 중심지이며, 동쪽은 소백산맥을 거쳐 신라와 가야지방을 공방하는 후방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중요한 위치의 미륵산성은 성곽의 총길이에 대한 주장이 많이 다르지만 최대 1,822m에 이르며, 외벽은 깬 돌을 면에 맞추어 쌓았는데 거의 수직벽을 이루고 있다. 할석의 크기는 길이 30~50cm, 높이 20cm 이다. 성의 내부 경사진 곳에 흙을 메워 산탁(山托)한 곳은 회랑의 너비가 8m나 되는 곳도 있다.

성벽의 높이는 약 4m, 성곽의 너비도 4m 이상이나 좁은 곳은 1m인 곳도 있다. 성의 평면은 변형된 삼각형을 이루며, 장축의 평면 직선거리는 약 680m, 남북의 최대 폭은 약 370m이다. 남변은 566.6m, 북변은 588m, 서변은 386.4m에 달한다. 수구가 있는 동변은 북서 모서리에서 동문까지 약 139m이다.

동문지와 남문지에 옹성(擁城)을 설치하여 방어에 용이하게 하였으며, 성내에는 몇 개의 계단식 축대가 보이는데 아마도 건물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990년과 1992년의 2차례 발굴조사에 의하면 백제 이후부터 조선 초기까지 4차에 걸쳐 개축된 사실이 밝혀졌다. 처음 축조이후에 곡창이면서 교통의 요지인 지역의 중요성 때문에 여러 차례 개축하여 조선시대까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에는 잡석으로 이뤄진 성벽과 아울러 남쪽과 동쪽의 문지가 발견되었고, 돌출시켜 쌓은 성벽인 치(雉) 11곳, 우물 2개가 남아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4개의 샘과 군창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내부에서 장기간 생활 할 수 있는 식수원과 곡식 창고가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현지에 동서 모두 합하여 8층으로 된 평지와 9개의 건물지가 있는데, 아마도 이곳이 군창터였을 가능성이 많다. 익산지역에서 가장 큰 성곽으로 여러 가지 참고문헌에서 자료를 확인 할 수 있다.

미륵산성은 쉽게 접하는 문화재이지만 어느 누구도 확인하기는 어려운 산성이다. 그 이유는 산성이 전 구간에 걸쳐 복원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상에서 산성에 가는 길이 평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산성쪽의 등산로에서부터 등산을 시작하였다하여도 문지에서는 북쪽이나 또는 남쪽으로 갈라지기 때문에 전 구간을 살펴보기는 역시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기에 보통은 정상에 서서 그냥 먼 발치로 눈도장을 찍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의 윤곽을 확인하려면 용화산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하긴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현재의 미륵산은 현재의 용화산을 포함하여 하나의 용화산으로 불렸었고, 그중에서 높은 봉우리로 여겨왔다. 그러니 용화산에서 미륵산을 바라보며 미륵산성을 살피는 것은 동일한 산에서 바라보는 것과 같으니 당연하다 할 것이다.

미륵산성에 오르는 길은 금마 군부대의 후문에서 가는 길이 정석이다. 다른 곳은 등산로인데 반해 이곳은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닦아놓은 길이 있다. 그러나 이 길 역시 잘 사용하지 않는 관계로 폐허나 다름없다. 예전에는 성문을 통하여 다니던 혼잡한 길이었을 터인데 지금은 패이고 깎여 쳐다보기에도 불안한 길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만큼 찾는 이가 적었다는 반증이다. 어찌되었든 있는 길로 가보아야 진정한 답사라고 생각하였지만 차로 들어가기에는 무리였다. 나에게 권한이 주어진다면 익산의 문화재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하겠다는 다짐도 해보았다.

얼마 전에도 성곽을 보수하느라 사용하였을 길이건만 어설프기만 하다. 협곡에는 문지가 있고 그 옆으로 실개천도 흘러간다. 산성을 사용하던 시절에는 문지나 입구의 시야가 확보되고 통로도 반듯하였겠지만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익산 최대의 숲을 이루고 있다. 아름도 넘는 나무들은 저마다 자신을 뽐내고 바위에 난 이끼는 나이를 자랑하고 있다.

엊그제 내린 비로 제법 소리를 내어가며 흐르는 물이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 같다. 대략 1,500년도 넘었을 오랜 시간동안 지켜보았노라며, 성을 지키던 병사들의 함성을 전해주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성을 쌓던 인부들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의 형편으로도 저렇게 거대한 성벽을 쌓으려면 난공사일진대, 하물며 영양도 부실하고 장비도 시원찮던 과거에는 어땠을까, 그때를 생각해보면 앞이 캄캄하다. 빈손으로 오르기에도 가파르기로 유명한 미륵산에서 무거운 돌을 지고 날랐을 인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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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09.12.09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