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동5층석탑(南中洞五層石塔)
전라북도 익산시 남중동 201-5번지 이리여자고등학교 정원에 자그마한 석탑이 하나 있는데, 2003년 11월 15일 익산시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이탑은 원래 전북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三奇里)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전한다.
남중동5층석탑의 기단부(基壇部)는 2매의 지대석 위에 1매의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으로 이루어 졌다. 또 기단갑석이 1층 옥개석 폭만큼 줄어들어 고려시대 석탑에서 보이는 것처럼 안정감이 적어지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탑신부는 5층으로 되어있으며, 탑신석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각 층의 면석에는 도드라진 모양으로 우주를 모각(模刻) 하였으며, 1층 탑신석에 비하여 위층의 탑신의 높이가 크게 줄어들지 않아 비교적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옥개석은 3층의 층급받침이 있으며 낙수면과 우동마루의 경사는 심하지 않으나, 옥개석의 합각에서는 반전을 이루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5층 옥개석 위에는 노반과 앙화, 수연이 함께 표현된 듯한 큼직한 상륜부가 놓여있다. 상륜부는 1매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보통 노반(露盤)과 앙화(仰花) 위에 복발(覆鉢)이 놓이는 것과 달리 복발 대신 수연과 같은 구조물이 놓여있는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탑의 제작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사각형의 기단부는 한 변이 78cm이며 땅에 묻혀있어 그 높이를 알아내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예전의 기록을 보면 높이가 53cm이며, 갑석의 상단면부터 상륜부 보주의 끝단면까지는 217cm, 탑의 전체 높이는 270cm의 작은 탑이다. 몸돌은 면석과 우주 그리고 탱주가 하나로 되어있는데 1층의 높이는 23cm, 2층은 18cm, 3층은 14cm, 4층은 11cm, 5층은 8cm이며, 맨 위 보주의 높이는 39cm이다. 또 몸돌의 너비를 보면 1층은 47cm, 2층은 40cm, 3층은 36cm, 4층은 29.5cm, 5층은 26cm이다.
지붕돌과 3개층의 층급받침을 하나의 돌로 조각한 옥개석의 높이를 보면 1층은 25cm, 2층은 22cm, 3층은 20cm, 4층은 19cm, 5층은 18cm이다. 또 4각형의 옥개석 너비로는 1층이 77cm, 2층이 71cm, 3층이 64cm, 4층이 57cm, 5층이 52cm이다.
현재 국내에 알려진 오층석탑은 약 54개가 국보를 비롯한 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고, 삼층석탑은 약 188개, 칠층석탑은 약 9개, 구층석탑은 약 4개가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각 지역의 향토문화재를 합치면 그 숫자는 더 많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보면 옛 목탑은 재료의 특성상 현존하는 숫자가 적은 것이 당연한 이치로 여겨지며, 석탑이 문화재로서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석탑의 무게로 보아 높은 탑을 쌓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던 것과, 기술적으로 다루기 힘든 작업이었음을 감안하면 그 규모가 작고 높이가 낮음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동양 최대의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에 익숙한 익산사람들은 남중동 5층석탑이 왜소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건물의 모퉁이에 외로이 서서 조용히 고개를 숙인 모습은 여럿이 들어다가 현관에 옮겨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담하다.
이 탑은 이리여자고등학교내에서도 처음에 놓여있던 구정문쪽 경사면에서 현재는 본관동 앞 화단으로 이전설치 되어있다. 2003년도에 강당을 지은 후 옮겨왔다고 하나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고, 본래의 지대석을 그대로 남겨두고 몸체만 옮겨온 것은 커다란 실수로 여겨진다. 기존의 지대석은 화강석 2매로 나뉘어져 있으며, 가로세로의 크기는 각 92cm이다. 탑은 화단에 위치한 관계로 나무가 기단부의 모습을 가리고 있어 조망에 부조화를 이룬다. 넓게 번져 사람의 발 디딜 틈조차 주지 않는 향나무와, 잎이 뾰쪽하여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화초는 마치 호위병이라도 되는 양 거부감도 든다. 거기다가 나무가 넘어지지 않도록 메어 놓은 줄은 보이기 싫은 속내를 드러내는 것 같아 부자연스럽다. 아마도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부터 그랬을지는 모르나 이제는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다. 최영희교장선생님은 관계기관에 세 차례의 공문을 보내 남중동오층석탑의 이전설치를 건의하였으나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리여자고등학교는 1924.04.10 익산시 갈산동 47번지에서 4년제인 이리여자고등여학교로 문을 열었고, 첫해 56명이 입학하여 35명이 졸업할 정도로 주변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도 알 수 있다. 이후 1933.04.01 남중동 201-5번지의 현재의 위치로 신축이전 하였으며, 1946년 9월 1일 6년제인 이리여자중학교로 바뀌었다가 1951년8월 26일에는 3년제인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이리여중이 지원중학교로 이름을 바꾸더니 2005년 8월 16일 다른 곳에 건물을 짓고 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2009.02.11 제82회 졸업식을 가졌으며 총 졸업생 수는 21,138명에 달하는 전통있는 학교다.
당시의 학교로는 1922.05.05 설립된 관립5년제 이리농림학교가 있었고, 이리공고가 1940.04.11 5년제 이리공립공업학교로 문을 열 정도였다. 이것을 따져보면 남아선호사상에 젖어있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학교가 일찍 설립된 것은, 미작을 위주로 하던 호남지방의 경제적인 여건이나 높은 문화의식이 작용한 지역적인 현상이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금은 본관동을 비롯한 교사4동, 강당, 지초학사(芝草學舍), 시청각실 등이 있으며 특히 새로운 체육과목에 맞춰 골프연습실을 갖추어 대중체육을 보급하는 등 여전히 앞서가는 학교를 선도하고 있다. 내가 방문하던 날도 제90회 전국체전에 참가하는 학생들이 출전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제32회 문화관광부장관기 전국남여펜싱대회 사브르부문에서 우승하는 등 쟁쟁한 선수들도 포함되어있었다.
학교운동장에는 요즘 웰빙바람을 안고 매일처럼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지만 남중동5층석탑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극히 제한된 사람들만 찾는 탑이 된 것이 안타깝다. 아무라도 언제라도 보고 감상할 수 있는 그런 탑이라야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할 것이다.
남중동오층석탑은 높이와 너비 등에서 작고 아담한 느낌을 주며, 모서리가 풍상에 깎여 닳은 모습을 보여준다. 혹시 산속의 작은 절 입구에 있었다면 어울릴 듯한 모습이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석탑으로는 익산시 마동 260-2번지의 이리초등학교의 정원에도 하나가 있다. 이탑 역시 정원에 놓여있어 조망하기가 불편하며, 모양이나 크기로 보아 남중동5층석탑과 매우 유사하다. 안타까운 것은 이리초등학교의 탑 역시 지어진 연대나 제작자 및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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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리초등학교의 정원에 있는 5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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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10.01.06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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