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16. 익산에 두 개나 세워진 서울 출신의 영의정 김육 불망비

꿈꾸는 세상살이 2010. 1. 18. 09:55

김육 불망비(金堉 不忘碑)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77번지에 있는 비석으로 2002년 12월 14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11호에 지정되었다. 이는 청풍김씨종중의 소유이다. 함라면 함열리 473번지에 있는 조해영가옥의 입구좌측에 위치하며, 비(卑)의 후면이 현재 조해영가옥의 진입로와 접해있다.

 

김육불망비의 전면은 정원의 나무에 가려져있어 비문을 알아보는데 힘이 든다. 비는 기단(基壇), 비신(碑身), 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단은 화강암으로, 비신과 이수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이수는 무늬를 양각하였는데, 전면 중앙에는 두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으며, 이무기의 몸체가 주변을 감싸고 있다. 이수의 후면 중앙에는 국화무늬가 있고 주변에는 구름무늬가 양각되어있다.

비문으로 보면 비의 건립연대는 조선 효종10년 1659년 기해년으로 영의정 김육이 사망한 이듬해이다. 그러나 비의 건립계기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구전하는 그 어느 것도 없다.

김육(金堉)은 실학자로 경제개혁가로 선조13년에서 효종9년까지 살았던 문인이며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또는 회정당(晦靜堂)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580년 8월 14일 서울 마포구 마포동 일대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1658년 9월 4일 중구 회현동 자택에서 숨졌다.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는 김육의 신도비가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기묘사화때 조광조와 함께 사사한 김식이며, 참봉 김흥우(金興宇)의 아들로 선조38년 1605년에 사마회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경세(經世)에 뜻을 두었으나 광해군 1년 1609년에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 즉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자신의 뜻을 펼 수 없음을 알고 가평 잠곡(潛谷)에 내려가 회정당(晦靜堂)을 짓고 10여 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후에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이 득세하자 관직에 나와 의금부도사, 음성현감, 병조참판, 형조판서, 우참찬, 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인조1년 1638년에 충청도 관찰사에 올라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여, 훗날 1651년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수차(水車)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김육이 사망하자 충청도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해 ‘대동선혜비’를 세웠다. 인조 2년 1643년에 한성부윤, 도승지, 심양으로 끌려가는 소현세자의 보양관(輔養官)으로 수행하였고, 귀국 후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다. 1645년에 다시 중국을 다녀오는 과정에서 화폐를 주조하는 것과, 수레의 제조 및 시헌력(時憲曆)의 시행을 착안하게 된다.

효종 1년 1649년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 그리고 사은 겸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대동법의 확장시행을 적극 권장하였다. 1650년 대동법(大同法) 실시로 김집(金集)과 논쟁한 후 퇴직하였다가, 1654년 다시 영의정이 된다. 1657년 7월에는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여 효종에게 고하고 전라도에서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비석은 호남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여러 차례 건의하고, 임금에게 유언으로까지 간절하게 당부한 김육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비이다. 그러기에 비문은 ‘영의정김공육경요보민인덕불망비(領議政金公堉輕徭保民仁德不忘碑)’라고 쓰여 있으며, 건립일은 ‘기해 2월’이라고 적혀있다. 자세히 보면 ‘김공보다 산이 높지 않으며, 예나지금이나 바다도 김공보다 깊지 않다는 ’산부대상공해부심고금‘이라는 글귀도 보인다.

이러한 김공의 충정은 효종도 알아주는 정도였다. 김육이 사망하자 ‘대동법을 추진하던 김(金)영부사(領府事)가 홀로 담당하여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음으로써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매번 생각할 때마다 잊지 못하여 김육처럼 확고한 인물을 얻기를 바라나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충청도민이 세운 불망비는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140-1 마을어귀에 있는데 ‘조선국영의정김공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朝鮮國領議政金公堉大同均役萬世不忘碑)’라고 적혀있다. 이 비 역시 기해년인 효종10년 1659년에 세워졌고 1973년 7월 10일 시도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

익산 사람들의 김공(公)에 대한 정은 더욱 컸었나보다. 이곳 함라의 불망비 외에도 용안에 가면 또 다른 불망비를 만날 수 있다. 용안면 교동리 299번지 용안동헌의 뜰에 서있는 불망선정비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비석이 있으니 바로 김육불망비이다. 기해년 4월에 세워진 비석에는 ‘영상김공육대동인정후세불망비(領相金公堉大同仁政後世不忘碑)’라고 쓰여 있다. 익산시 성당면과 용안면에는 옛 조운창이 있었던 곳으로 김육이 주장한 대동법의 확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동리의 비석은 여럿이 어울려있기는 하나 어떤 방법으로든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는다. 뿐만아니라 사람들의 인정마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근 경기도의 비석이 시도유형문화재로서 비각 안에 보존된 것과 함열리의 비석이 향토유적으로서 노출된 것도 비교되는 일이다. 우리 익산시가 관리하는 문화재가 많아서 일부는 소홀하였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듣고 싶은 답이 아니다. 다른 역사가들이 판단할 때 같은 사람에 대한 공적불망비를 놓고 다르게 평가하는 것은 좋은 현상은 아닐 것이다. 차제에 용안 교동리의 비석에 대하여 좀더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불망비란 고을을 선정한 은혜를 기리는 것이거나, 뚜렷한 공적을 잊지 않기 위하여 세우는 비석이다. 그런데 김육은 고향도 아닌 익산에, 혹은 수장이었던 적도 없는 지역에서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씩이나 불망비를 세운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관리하는 후세불망비나 만세불망비의 본뜻을 잊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볼 일이다.

대동법은 각 지역의 특산물로 세금을 내는 것과 농민들이 호역(戶役)으로 부담했던 납세제도를 전세화(田稅化)해 쌀(白米)로 납부토록 하는 조세제도다. 이로써 농사일이 한창인 때에 수시로 시행하던 호역의 노동력 낭비는 물론 부역에 의한 비효율을 타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농번기에 시기를 놓치지 않고 농사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특산물을 생산하지 않는 백성들이 불합리한 조세제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육의 ‘대동인정(大同仁政)’에 얽힌 사연이다.

저서로는‘구황촬요(救荒撮要)’와 ‘유원총보(類苑叢寶)’, ‘종덕신편(種德新編)’, ‘잠곡유서(潛谷遺稿)’, ‘잠곡필담(潛谷筆談)’, ‘송도지(松都誌)’, ‘팔현전(八賢傳)’,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등이 있다.

명신록을 저술하는 데는 아주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듣고 행한 것만 적는 것도 아니니, 중도(中道)를 행하고 사견(私見)을 보태지도 빼지도 말아야 한다. 때로는 말을 전하는 사람에 따라 좋게도 전하고 나쁘게도 전하니 그 사실을 알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역사학자 이긍익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김육의 예를 들어 그 고충을 설명하기도 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명신록(名臣錄)’을 편찬하면서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을 싣지 않고 계곡(谿谷 : 장유(張維))을 실었더니,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편지로 그 부당함을 책하였다.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이 같은 시대의 사실인데도 듣고 본 것이 서로 달라 넣고 빼기가 어렵거든... 중략..., 감히 사견으로 어떤 이는 올리고 어떤 이는 깎은 것이 아니니, 이는 널리 수집하여 후세에 완전한 글을 저술할 분에게 고징(考徵)의 자료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다만 듣고 본 것이 넓지 못하여 많이 빠뜨린 것이 한스러우니...’ 이런 책을 저술할 정도의 확고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효종이 그토록 안타까워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불망비의 좌측에는 거북의 형상을 한 돌이 하나 있는데 등의 중앙에 홈이 파여져 있다. 마치 미륵사지의 석등하대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하나가 아닌 둘이 있어야 어울릴 듯하나, 비석에 석등을 세웠을 이유가 없으니 그것도 모호하다. 거기다가 이 거북돌의 앞면은 불망비와 반대방향으로 놓여있으므로, 불망비의 부속품인지 아니면 조해영 가옥의 입구를 표시하는 상징물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예전에는 없었던 것이며, 최근에 그냥 조경물로 가져다 놓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바윗돌과 비석은 서로 연관성이 없는데도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잘못 전달될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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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조해영가의 입구에 있는 김육불망비의 전면.

 

 

아래는 조해영가의 김육불망비 후면

 

 

 아래는 용안동헌에 있는 불망선정비들로 그 중에서 크고 오래된 가운데 비가 김육 불망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