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17. 전국최초의 5년제 관립학교 익산 구이리농림학교 축산과교사

꿈꾸는 세상살이 2010. 1. 27. 11:13

익산 구이리농림학교 축산과교사(益山 舊裡里農林學校 畜産科校舍)

 

전라북도 익산시 마동 194-5번지에 이리농림학교가 있었다. 1922년 개교당시에는 농과와 임과로 시작하여 본관과 정원을 갖추었으나, 곧 이어 축산과를 신설하고 399㎡의 축산과 교실 1동을 지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2005년 6월 18일 축산과 교사를 등록문화재 제178호로 지정하였다.

 

이리농림학교(裡里農林學校)는 일제 강점기에 주된 산업인 농업을 육성하기 위하여 세워진 학교다. 당시 농림학교는 그 명성이 자자하여 인근은 물론 전국의 각 지역에서 찾아오는 학교였으며, 한국에 있던 일본인의 자제는 물론 심지어 일본에서도 해마다 일정인원을 보내 유학시키던 정도로 유명하였다.

강점기인 1918년 최초의 5년제 농림학교를 설립한다는 정보가 퍼지자, 지성인들은 인근의 농장주들과 황등의 대지주가 참여한 가운데 15만원을 모아서 농림학교 이리유치를 준비하였다. 당시 서울과 대구, 대전, 이리에서 청원서를 냈으며, 최종적으로 이리가 낙점된 것이다. 그때까지는 2년제 농림학교가 몇 군데 있었으나 5년제 이리농림학교에 거는 기대가 자못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농촌도시 이리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여타 지역보다 치밀한 준비로 대비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리농림학교의 첫 신입생 모집은 경성중학교와 전주소학교에서 치렀는데, 첫해에는 한국인 107명, 일본인 165명으로 합계 272명을 선발하였다.

처음에는 1922년 5월 5일 이리시 마동(馬洞)의 잠업회사 건물을 가교사로 출발하였다. 실습부지 13,000여 평의 공립이리농림학교는 농과와 임과로 시작하였으나 1931년 3월 수의축산과가 증설되었고 1932년 축산과 특별교실이 건립되었다. 한일공존의 미명아래 신입생은 한일 각각 절반씩 모집하였으며, 전원 기숙사시설에서 공부를 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광복 전까지 졸업한 학생수를 보면 한국인 1,050명, 일본인 999명으로 최고의 농업기술을 갖춘 전문인을 배출하였다. 일본인은 광복 후에도 3명이 더 졸업하여 총 1,002명이 되었다.

여기에서 졸업한 학생들은 전문 기술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각기 새로운 농업을 위하여, 또는 새로운 임업을 위하여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중 일부는 일본인 농장에 취업한 경우도 있었고, 아예 일본으로 건너가서 취업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더 많은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해외로 유학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관립 5년제 구이리농림학교가 가지는 당시의 위상이었다.

1923년도에 착공하여 이듬해에 완공한 본관동과 정문 등 처음에 지어진 농과와 임과 교실 및 사무실은 소실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멀리 떨어져있던 축산과 교실만이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학교인 만큼 소실(燒失)후 나중에 지어진 건물들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고풍(古風)을 더하고 있다.

이리농림학교는 해방 후인 1947년 8월에 6년제인 이리농림중학교로 개편되었고, 1951년 8월에 3년제인 이리농림고등학교로, 1991년 3월에 2년제인 이리농공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다가 1998년 5월에 학교명이 익산대학으로 변경되었고, 2008년에는 전북대학교와 익산대학의 통합으로 현재는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가 되었다.

한편 1947년 10월에는 이리농림중학교 내에 이리농과대학의 설립을 인가받았고 이듬해 3월에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리농대가 1963년 전주로 이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전북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이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전북공대 역시 익산에 있는 현재의 전북기계공업고등학교 자리에서 전주로 옮기게 되니 그때가 1974년 2월이다. 또한 기독교 이리방송도 1961년 11월 1일 문을 열었다가 30년이나 지난 1992년 전주스튜디오를 개설하였다. 그러더니 1995년 9월 1일 기독교전북방송으로 이름을 고치고 2000년 11월 15일 전주시 다가동 3가 114-8번지로 이전하고 말았다. 전북 자(字)가 들어가면 모두가 전주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99섬을 가진자의 욕심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익산의 소중한 자원을 타지에 빼앗긴 것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1932년 건축된 이리농림학교의 축산과 교사는 벽돌조 벽에 목조트러스로 구성되었으며, 당시 이리농림학교에서 사용하던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어 학교의 상징적 가치가 크다. 뿐만아니라 현재의 건축물과 다른 부분이 있어 건축적 가치로도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상하 인방의 띠장식이나 모서리부위의 세부의장 등 부분적인 면에서 매우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된다. 건물 중앙의 작은 문과 양쪽의 큰 문 등 대칭구조의 배치도 조화롭다. 내부는 처음에 3개의 교실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6개의 방으로 구분되어 있다. 가운데 교실 하나에서만 뒤편으로 복도가 났으며, 이 복도의 뒤편에 또 다른 출입구와 화장실이 있다. 천정의 자연 환풍구도 특이하다.

줄기초에 해당하는 부분은 검정색 계통의 어두운 적벽돌을 쌓았고, 벽체는 붉은 색이 도는 적벽돌을 쌓아 비교가 된다. 왼편의 교실바닥은 현관바닥과 같은 높이로 되어있는데, 이는 축산과 교사(校舍)로서 동물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보장하기 위한 배려가 아닌가 생각된다.

시(詩) ‘보리피리’로 유명한 나병(癩病) 시인 한하운(韓何雲)은 1919년 2월 24일 함경남도 함주군 태생으로 1940년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과를 졸업하였다. 구본관 앞 교정에는 그를 기리는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구이리농림학교의 정문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역사를 전해주는데, 농림학교답게 초창기 졸업생들이 졸업기념으로 식수(植樹)를 한 것도 있다. 정원의 바닥에는 이끼가 끼어있고, 아름도 넘는 나무들은 작은 밀림과도 같다. 세월을 먹고 자란 그 나무들은 지금 도심속의 삼림욕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묘목장에 심었던 나무들도 이제는 성목(成木)이 되어 농원(農園)이 부럽지 않은 정도다. 담장을 넘어 뻗은 가지는 도로를 덮고도 남아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가을이면 단풍든 낙엽이 운치를 더해준다.

처음 학교가 건립될 때에는, 넓은 면적에서 농업과 임업 그리고 축산업에 대한 야심찬 계획을 꾸몄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리농고와 익산대학이라는 편제를 거치면서 새로운 교사를 지었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고층건물의 부대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축산과 교사는 한때 주건물이었으나 이제는 밀려난 뒷방신세가 된 것이다. 현재를 보면 입구에서 가장 멀리 있는 곳, 울타리에 인접하여 있는 곳, 매일매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곳, 어쩌다 한번 과거를 찾으러 가는 곳에 불과하다. 정말 이러다가는 낡고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용도를 아예 없애자고 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현재는 꼭 필요한 건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때는 아주 중요했던 원조를 생각한다면 매일 쓸고 닦아 활용도를 높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에 맞는 용도야 찾아내면 되는 것이고, 불편하면 지난 풍습의 우리 문화라고 생각하면 충분할 것이다. 지금 당장 어떤가만 생각하고 효율만 따진다면 모두 버리는 것이 혁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잘못하면 우리의 뿌리가 없어져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도 이리농림학교를 잊지 말자는 개교80주년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학교의 역사가 오래되어 그것을 자랑하자는 기념관이 아니라, 이리농림이 가지는 익산지방의 학구열에 대한 자부심이다. 또 반대의견을 들자면 강점기에 이리농림학교는 일본인이 부를 위하여 기술을 연마하던 아주 중요한 구심점이었던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픈 과거라고 하여 덮어두고 모른 체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과거를 되새기고,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발판으로 삼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좋든 싫든 과거가 없는 현대인은 문화가 없는 민족이며, 돌아갈 뿌리가 없는 국민이다.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돌아가 쉴 곳이 고향이고, 내가 돌아가 자랑할 곳도 바로 고향이다. 내 고향을 생각하지 않고, 내 나라를 걱정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만족만을 구걸한다면, 그는 돌아갈 조국이 없는 영원한 떠돌이로 남고 말 것이다.

 

첫번째 본관 공사장면 / 아래는 완공 후 모습 

 

 첫

 

첫 번째 본관이 소실되자 그 자리에 두 번째 본관동을 지었다.

 

정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지은 세 번째 본관동, 이후 에 익산대학에서는 네 번째 본관을 지어 사용하였다.

 

이리농림역사 기념관

 

이리농림 축산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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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10.01.20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