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선생 생가(李秉岐先生 生家)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번지 진사동에 있는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선생의 생가를 말한다. 이는 며느리 윤옥병씨의 소유의 한식건물 여러 채로 1973년 6월 23일 시도기념물 제6호로 일괄지정 되었다.
가람(1891.03.05~1968.11.28)은 한국 현대시조의 중흥을 이룩한 시조시인이며 국문학자였다. 이 생가는 1901년 건축된 것으로 특별한 특징은 없으나 양반집의 배치에 따르며,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 정자 등 여러 채의 초가로 이루어졌다. 집 입구에 있는 승운정(勝雲亭)이라는 단칸 규모의 작은 모정이 있고, 승운정기(勝雲亭記)의 현판도 걸려있다. 그 옆에 아주 오래된 탱자나무가 하나 있다.
승운정과 사랑채는 나란히 병열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사랑채의 앞에 인공 연못을 두었다. 건물 입구에 있던 행랑채는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에는 기와를 얹었다가 다시 초가로 환원되는 곡절도 겪었었다. 사랑채는 일자형이며 잡석으로 낮은 단을 쌓은 후 그 위에 지었다. 앞뒤에 퇴를 구성한 전후퇴집의 구조인데, 동측으로부터 방, 부엌, 방, 방, 대문간 그리고 헛간으로 되어있다.
진수당(鎭壽堂)이라는 편액이 걸린 끝 방은 가람 선생이 책방으로 사용하던 곳이며, 평소 기거하던 곳은 한 칸 건너인 수우재(守遇齋)이다. 안채는 호남지방에서 보기 드문 고패형 집이다. 잡석 축대를 쌓아 마당을 높인 뒤 그 위에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였으니 아래채와 상당한 고저차가 난다. 실의 구성을 보면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넛방이 마주하며, 안방의 전면으로 부엌이 돌출된 형태이다. 안방은 상하 두 칸으로 비교적 크다. 안방의 웃방 한 쪽은 칸을 막아 찬방으로 만들었고, 아랫방의 뒤쪽으로는 쪽마루를 달아 고방채와 장독대가 있는 뒷마당으로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건넛방의 전면과 좌측면에 툇마루를 놓았고, 우측면은 안방으로 연결되는 대청마루가 있다. 안채 동쪽에 고방채가 있고, 안채와의 사이 마당에는 장독대를 두었다. 세 칸으로 되어있는 고방채는 광, 헛간과 안변소로 나뉘어있다.
들머리에 있던 행랑채와 남쪽의 부속건물은 근래에 철거되었다. 모정의 전면에 연못이 있고, 높지 않은 축대 위에 세워진 안채는 안방과 부엌이 붙어있으며 건넛방과 마루가 있는 ㄱ자형이다.
수우제와 진수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사랑채는 4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뒤에 장독대가 있으며, 집의 뒤쪽으로는 언덕배기 대나무 밭이 울타리를 대신하고 있다. 철거된 행랑채와 고방채에 각각 다른 변소를 가지고 있어, 작지만 선비 집안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모정 옆에는 오래된 탱자나무가 있는데 수령이 약 200년에서 최대 600년 까지 추정되며,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112호로 별도 지정되어 있다.
집앞에는 작은 연못을 파고 석축으로 쌓았다. 동북쪽 모서리부근에는 커다란 배롱나무가 서있고, 반대쪽인 남서쪽에는 동백나무가 있다. 이들 역시 오래된 고목으로 크게 자라지 않는 나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세월을 가늠하기도 어렵다. 서천 마량의 동백나무가 수령 5~600년을 자랑하지만 여기 이병기생가의 동백보다도 굵지 않기 때문이다.
생가는 진사동마을의 입구인 진사교를 지나면 한눈에 들어온다. 생가 초입의 진사경로당이 마치 안내실이라도 되는 양 자리하고 있다. 들어서자마자 처음 만나는 곳에 동상이 있고 그의 오른쪽으로 난 뒷산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가면 대밭이 나온다. 이 대밭은 생가의 뒤안에 난 대밭과 연결되어있고, 그곳에 가람의 묘소가 있다. 물론 주위에는 여러 기의 묘가 있지만 제일 안쪽에 작은 비석을 하나 놓고 있는 모습은 쓸쓸하게 보인다. ‘비석을 크게 만들지 마라’는 가람의 유언에 따라 작은 비석을 세우니 그 묘비명은 그냥 ‘이병기선생묘’다. 묘앞에는 대나무가 가로막아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가 다녀간 듯 시든 국화송이가 그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후손들이 왔다갔다면 아마도 한 아름 놓고 갔을법하기에, 이것은 필시 가람을 기리는 문학인의 정성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가람 이병기는 시조문학 부흥에 한 획을 그었으며, 현대시조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당시 한문시조의 주류에서 한글을 사용하며, 향토적인 냄새를 풍기는 작품으로 민족을 일깨운 문학가였다.
16세가 되던 1906년 12월 5일 김수와 결혼하였고, 19세 되던 1909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6개월 만에 마쳤으며 1910년 4월에 서울로 올라가게 된다. 관립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야간에 조선어강습원의 문법 강의를 듣는 등 우리말에 깊은 인연을 맺었다. 1913년 사범학교 졸업하고 전주의 보통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3.1운동 때 서울로 가서 큰일을 도모하게 된다. 주시경 선생의 영향으로 1921년 12월 권덕규, 최두선 등과 함께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20년 ‘공제(共濟)’ 창간호의 ‘수레 뒤에서’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신시와 신소설의 흐름에 따라, 시조의 ‘신시조 운동’을 주장하며, ‘시조란 무엇인가’, ‘시조를 혁신하자’ 등을 발표하였다. 1926년 시조문학의 구심점이 된 ‘시조회(時調會)’를 창립하고,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歌謠硏究會)’로 변경하면서 조직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고시조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이 아니라는 듯 ‘가루지기타령’, ‘인현왕후전’, ‘어우야담’, ‘금강경삼가해’, ‘한중록’, ‘인현왕후전’, ‘춘향가’를 비롯한 많은 고전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그가 모은 자료들은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여 보존되고 있다.
1930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함흥경찰서로 잡혀가 수인번호 453번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6년 10월 3일 서울대학 문리대에서 국문학개론을 강의하기도 하였으나, 1951년 전주의 명륜대학에서, 1956년에 전북대학교의 문리대에서 강의를 하였다. 이때 고향에 내려오면서 고서(古書)를 트럭에 싣고 온 것은 훗날 두고두고 화제가 되는 일화였다. 1956년 교수로 근무하면서 ‘국어국문학’에 논문 ‘별(別) 사미인곡’, ‘속(續) 사미인곡’을 발표하였다. 오랜 지병을 앓아온 가람은 여산의 생가에서 별세할 때까지 시조작가로, 국문학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역대시조선’, ‘가람문선’, ‘국문학전사’ 등 많이 있으며, 1960년 학술원공로상, 1962년 국민훈장 문화포장, 1961년 전북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생가 외에도 전주시 다가공원과 고향인 여산초등학교에도 시비(詩碑)가 있다.
이 생가는 최근에 여러모로 단장되고 있어 기분이 좋은 곳 중의 하나다. 처음 방문시에는 진입로부터 거북스러웠으나, 현재는 진입로정비, 경내 주차장과 동상, 시비까지 갖춘 문학의 성지가 되어감을 느낀다. 참우리말 사랑으로 점철된 선생의 숭고한 정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전국에서 생가가 문화재로 등록된 곳은 대략 60여 곳, 생가터가 지정된 곳은 30여 곳에 이른다. 이중에는 사적으로 분류된 윤봉길의사의 생가와 유관순열사의 생가가 있는가 하면, 중요민속자료에 윤보선 전대통령의 생가도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잘 아는 영랑생가나 한용운생가터, 사명대사생가터 등도 있다.
익산에서는 이병기생가가 유일하게 문화재로 등록되었는데, 이와 비슷하게 문학인으로서의 생가도 전국적으로 보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생가에 가보면 우리 지역의 이병기선생생가처럼 잘 보존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서운한 것이 있다면 그들 문학인들은 별도의 문학관을 가지고 많은 문학인들을 부르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런 시설이 없다는 것이다.
인근도시 김제에도 아리랑문확관이 있으며, 군산에도 채만식문학관이 있다. 군산에서는 넓은 대지에 진포시비공원도 만들었으며, 탁류의 배경지에는 각 요소마다 소설의 내용에 따라 기념비를 세워두고 있는 실정이다. 굳이 말하자면 시내에 채만식의 탁류 기념비가 8개소나 있으며, 월명공원에 기념비가 있고 문학관도 별도로 가지고 있는 정도다. 부안에서는 작지만 석정공원을 만들어서 석정을 기리며, 고창에서도 서정주문학관을 만들어 놓고 생가와 함께 여러 사람들을 맞고 있다.
문학관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떨 것인가는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우리가 그를 생각하고 기리는 정신이 어느 정도이냐가 문제이지 규모나 시설의 종류가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따지고 들자면 그분의 업적이나 집필서적 등을 관리하면서, 후세에 전할 공간을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기존의 생가에 두려한다면 관리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정이 여의치 못한 우리 익산은 생가에서 관리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별도의 관리시설을 두지도 못한 상태로 여기저기 임시방편으로 옮겨 다니는 형편이다. 지금이니까 그나마 이정도 이지 조금만 더 지나면 관련 자료를 모으기도 힘들게 될 것이다. 또한 힘겹게 모은 자료들도 일정한 공간이 없어 버려지는 사태까지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가 지양해야 할 숙제다.
2010.03.24 익산투데이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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