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24. 황진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정승 소세양의 신도비

꿈꾸는 세상살이 2010. 3. 10. 11:07

소세양신도비(蘇世讓神道碑)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산33번지 숯골(炭谷) 선산에 소세양(1486∼1562)의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진주소씨익산종회 소유로 1998년 1월 9일 시도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는 1564년 조선 명종19년 6월 홍섬(洪暹)이 짓고 그의 아들 수(遂)가 비문을 썼다. 그 뒤 1584년 영의정 강녕군 홍섬이 비문을 추가로 지었는데, 소세양의 후손 이선연이 1697년 군수로 왔다가 이 내용을 종질 소세영으로 하여금 비문에 적도록 하였다. 기단, 비신, 이수를 갖춘 비석으로 이수와 기단부에 용문과 연화문이 시문되어 있다.

 

소세양은 연산군 10년 1504년 19세에 진사, 중종 4년 1509년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직제학, 전라도 관찰사,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종1품 좌찬성까지 올랐다. 우찬성으로 재직시에는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에 사직을 하는 등 어려움도 있었으나, 명종 이후 다시 등용되어 좌찬성에 이르렀다. 명종 17년 1562년 77세에 별세하여 익산의 화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 20권 70책이 전한다.

중종9년 1514년에는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얻었으니, 이는 문관 중에서도 문학에 뛰어난 사람을 골라 다른 일은 하지 않고 학업에만 열중하는 특별휴가를 주는 것을 말한다.

소세양의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 또는 퇴제(退齊), 퇴휴당(退休堂)이라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문장이 섬세하고 송설체로 유명하였는데,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또한 1994년 후손들이 돌거북의 등 위에 새로운 신도비를 세우니 지금은 신도비 2개가 나란히 세워져있다.

오래된 신도비의 해서체 비문은 강녕군 홍섬이 지었고, 경기도 관찰사 겸 병마사수군절도사 심전이 두전을 썼다. 비신은 높이 218cm, 폭 103cm, 두께 25cm 의 대리석인데, 화강암으로 된 방형대석(方形臺石)위에 세우고, 옥개형(屋蓋形) 개석(蓋石)을 얹어놓았다. 좌대인 방형대석은 가로 196cm, 세로 112cm, 높이 90cm의 크기로 전·후면에는 세 개의 정사각형 안에 국화문양을 넣었고, 양측면에는 두 개의 정사각형 내에 국화문을 조각하였다. 그러나 현재 얹혀있는 개석은 후대에 비석의 이수(螭首)가 파손되어 넘어질 위험이 있어 다시 만들어 놓았는데, 그 크기는 처음보다 두 배가량이 된다.

소세양신도비의 신비(新碑)는 1994년 2월에 성백효가 번역하고 13대손 소진태가 세웠다.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명종때 양관대제학을 지낸 홍섬이 짓고 그 아들 수가 쓴 신도비가 오랜 세월에 자획(字劃)이 이해할 수가 없어 안타깝게 여기던 중 종손들이 의논한 후 원문을 번역하여 그중 중요한 부분을 요약하여 새 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제 후세들이 새 비문을 통하여 공의 업적을 소상히 알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대석의 바로 앞에 원래의 이수가 놓여있는데 석질은 화강암으로 가로 128cm, 세로 77cm, 두께 43cm이다. 한 마리의 용이 우측을 향하고, 몸통 부분이 여러 겹으로 또아리를 튼 형태인데, 힘차고 굵게 조각되어 있어 깊은 구름무늬가 있다.

신도비란 원래 임금이나 고관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다. 여기에는 사적(事蹟)을 적어 무덤의 동쪽이나 남쪽에 세우고, 비는 남향을 하도록 했다. 조선 왕의 신도비는 태조의 건원릉과 세종의 홍릉이 있으며, 문종이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리니 더 이상 세우지 않았다. 한편 관리들에게는 2품 이상에게만 세웠으며, 3품 이하의 관리들은 조금 작은 비석을 세우고 이를 묘갈이라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3품 이상의 관리는 신도비가 허용되었으나 현존하는 신도비는 발견되지 않았다.

신도비는 묘소가 있는 곳까지 안내하는 길잡이로 진입로의 밖에 세워 여기부터가 묘역임을 알리는 역할도 한다. 따라서 밋밋한 돌을 세우는 것보다는 고인의 생전 업적을 적음으로써 후세에 본이 되라는 뜻을 포함한다. 그러기에 신도비는 선조의 불망비와도 같은 성격이 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신도비기 많은 계단을 오른 후에 세워놓는 예도 있으며, 마을 어귀에 세워서 미리 알리는 곳도 있다. 아니면 여기처럼 조상의 그늘아래에 두어야 한다는 선산의 특성 때문에 본인의 묘소 옆에 두는 경우도 있었다.

묘비가 순수한 고인의 인적사항을 적는 것이라면, 신도비는 길안내를 겸한 고인의 안내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소세양신도비는 진주소씨 선산에 있는 소세양 묘소의 비석이다. 이 산은 아버지 소자파의 묘부터 시작하여 후대 일가의 묘가 있는 곳이다. 소자파묘는 맨 위쪽에 있으니 우백호를 거쳐 차량으로 진입도 가능하다. 그러나 소세양신도비는 중간쯤에 있으니 천상 제각의 정문에서 걸어 올라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곳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용화산 아래의 용화리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오른쪽인 서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동쪽은 1번 국도가 바지춤을 추겨 올려놓았으니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아름답기는 하다.

양곡은 금마의 아석정이 있는 뒷산 깃대숲에 태허정(太虛亭)을 지었다. 태허정의 절경은 중국의 사신과 주고받던 문답을 적은 익산군지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익산이며 그중에서고 태허정이 그 중심인데, 편액은 주지번이 썼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양곡은 이 태허정의 아래 즉 대나무밭 위에 퇴휴당(退休堂)을 지었는데, 이곳은 소세양 노년의 은거당(隱居堂)이었다. 은거당은 그 규모가 커서 거당(居堂)과 누당(樓堂)을 따로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관직을 그만두고 이 누당에 있을 때에 전라도의 수령들 모두가 한 번씩은 들러 인사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수령은 관인을 차고 방문하지 못하고 옆에 있던 커다란 은행나무에 걸어두고 빈손으로 들어갔다 하여 퇴휴당을 괘인정(掛印亭)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마을의 이름을 은행나무 정자라는 뜻으로 행정(杏亭)이라 하는 것은 그때부터 연유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연을 지닌 곳으로는 황화정을 들 수 있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의 황화정은 예전에 익산군에 속한 곳이었으며, 익산지역에 부임하는 고을 수령들이 모두같이 초입에 있는 황화정에 들러 쉬었다 가는 곳으로, 관을 벗어놓고 의복을 느슨하게 하여 쉬던 곳이었다고 한다. 무엇이 막중한 업무를 관장하던 수령들의 발길을 잡았을지 생각해보면, 먼 길을 다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아마도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산천경개(山川景槪)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사실은 이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으니 이는 전라도 감사의 임무교대장소였던 것이다. 이는 황화정이 전라도 땅으로는 처음 접하는 지경으로, 새로 오는 전라감사가 첫발을 내딛는 지역이라는 의미가 담긴 곳이었다. 따라서 이곳에 있던 정자 황화루에서 서로 교대를 하고 잠시 쉬었다가던 곳으로서, 태허정과는 의미가 다르다. 지금은 정자가 없어졌고 지명(地名)만 남은 상태다.

현재는 태허정과 퇴휴당도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소세양이 학문에 뛰어나고 의지가 굳은 사람임은 앞에서 보아왔다. 그런데 여색에 대해서도 대체로 무덤덤하였으나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나는 30일만 같이 살고나면 그 다음은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돌아서는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라고 장담했다 한다. 그러나 황진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난 후, 드디어 이별하는 날이 되자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 ‘송별소양곡(送別蘇陽谷)’을 지어주자 그만 감동하여 자신의 뜻을 꺾고 하루를 더 머물렀다는 풍설(風說)도 전한다. 이때 황진이는 자신과 사랑을 나누었던 여러 남자 중에서 유일하게도 소세양에게만 마음을 주었다는 말도 있다. 이는 황진이가 지은 시 ‘알고 싶어요.’에서도 나타난다. 이렇듯 관직이나 학문에서 높은 경지에 이른 소세양은 율시(律詩)에도 뛰어났고 송설체(松雪體)를 잘 써서 필명(筆名) 또한 높았다.

그러면 여기서 대쪽같은 선비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루를 묵게 한 황진이의 한시(漢詩), ‘송별소양곡’을 읊어보고 가기로 한다. 소세양(호=양곡)을 이별하여 보내는 시(詩)라는 뜻이다.

月下梧桐盡

霜中野菊黃

樓高天一尺

相盞醉無限

流水和琴冷

梅花入笛香

今日相別後

憶君碧波長

달빛어린 뜰에는 오동잎 지고

서리속에 들국화 시들어 가네.

누대는 높아서 하늘에 닿고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구나.

차가운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

피리에 감겨드는 그윽한 매화 향기

오늘 우리가 헤어진 후면

그리움은 강물처럼 한이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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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100310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