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지역 교회의 탄생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는 1816년 맥스웰과 홀이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 갈곳마을에 정박하여 조대복에게 영문성경을 전달한 시점부터로 알려진다. 1832년에는 귀출라프가 보령시 오천면 고대도리에 머물면서 전도하였고, 1866년 토마스선교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후로는 좀더 빈번한 접촉을 통하여 경이적인 기독교전파가 이루어진다.
중국은 1607년 선교이후 27년 동안에 10 명의 신자가 생겼으며, 태국은 30년 동안에 2명의 세례자가, 몽골의 경우 47년간에 단 한 명의 신자도 생기지 않을 정도의 저항을 받았던 것과 비교된다. 반면 우리나라는 선교이래 24년만인 1909년에 노회를 조직하였고, 1912년에는 타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렇게 급속하게 전파된 기독교는 그 속도만큼이나 많은 희생도 뒤따랐다. 카톨릭의 경우 4차례의 박해와 극심한 견제 속에서 3만 여명의 순교자를 냈으며, 개신교 역시 일제의 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약 3천 명의 순교자를 내는 아픔도 겪었다. 순교자의 피가 곧 교회의 씨앗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우리 익산시의 기독교 역사는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기 전의 일로 익산군에서는 1901년 오산면의 남전교회, 1903년 삼기면의 서두교회와 여산면의 고내리교회, 1904년에 망성면의 무형교회, 1906년에 웅포면의 웅포교회와 대붕암교회, 용안면의 송산교회가 설립된다. 황등면의 동련교회는 1901년 자체예배를 보기 시작하였고 1905년 정식 선교사의 예배를 드리면서 동련교회로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192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정식기록에 의한 것으로, 이들 교회가 그 전부터 자체예배를 보았다는 설이 많다. 용산교회가 동련교회에서 1907년 분립되었으며, 이리시 권역에서는 1906년에 고현교회가 최초로 설립되었다.
◆3·1 만세운동에서 기독교의 위치 3·1 만세운동에서 낭독된 독립선언서는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 대표 33인이 작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지도자의 역할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이끌어냈다. 이때 참여한 33인 중 천도교 소속은 15명, 기독교 소속은 16명, 불교소속은 2명으로 되어있다.
겉으로 나타난 구성을 보면 당시 전통적인 유교의 대표가 참여하지 않은 것은 원래부터 정적인 유형인데다, 신흥 종교인 천도교나 기독교에게 그 활동성을 넘겨준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것은 불교계가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민족대표에는 적은 인원이 참석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반면에 천도교나 기독교는 활동적인 면과, 당시 부흥하는 종교로서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데는 제격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날 즈음은 일제의 신사참배가 심하게 강요되던 1925년 이전이어서, 기독교 본래의 유일신 사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적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만세운동은 기독교적 신앙심보다는 순수한 민족정신과 자조정신, 개화사상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3·1만세운동이 지나서 기독교 장로회 총회가 가을철에 밝힌 피해상황은 체포된 신자 3,804명, 체포된 목사와 장로 134명, 체포된 기독교계 교사와 기관지도자 200명, 감금된 남신도 2,125명, 감금된 여신도 531명, 태형을 받은 자 2,162명, 사살된 자 41명, 태형으로 사망한 자 6명, 자료발표 당시 수감중인 자 1,642명, 파괴된 교회 12곳, 파괴된 학교 8곳에 달했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집계에 국한 된 것이며, 민족대표 33인 중 장로교보다 훨씬 많은 대표를 낸 감리교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였을 것이라 짐작하고도 남는다.
결과적으로 보면 제암리 학살사건처럼 기독교인들이 대거 피해를 당한 예가 많이 있었으며,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 중에 기독교인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도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우리 지역의 만세운동에서는 어떤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으로 계몽을 기치로 내세운다거나, 신사참배에 반대되는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가 10개를 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기독교가 강세였던 익산지방의 신앙심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런 자료들을 근거로 기독교와 3·1운동에 관한 당시 상황을 더듬어보면 상당부분 접근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전교회 전북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618-1번지에서 1897년 10월 15일 익산 최초인 남전교회를 창립하게 된다. 초기에는 성도 이윤국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었고, 외국인의 발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남차문교회로도 불렀다. 1899년 3월 15일에 전킨 선교사가 김정현(金正賢)·이성일(李成逸)부부에게 세례를 주니 익산지역 최초의 세례자가 탄생하였다.
1910년 4월 1일 오산면 신덕리에 남학교를 세워 도남학교(道南學校)라 하였으며 여학교를 별도로 세우니 미성학교(美聖學校)였다. 그러다가 이 둘을 합쳐 신성학교(新聖學校)로 개명하고 1942년까지 운영하다가, 오산남초등학교가 생기면서 문을 닫았다. 소위 말하는 개화기에, 우리말을 가르치고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는 데는 관의 통치를 덜 받는 사립학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이들은 여기에서 기독교의 이론은 물론이며 신학문과 민족정기도 함께 가르쳤다.
문용기와 장경춘은 남전교회의 성도로서 이리 4·4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도남학교의 학생 박영문과 박도현이 이들을 도왔다. 문용기가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 도남학교 학생들은 이를 배포하고 거사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는 등 역할분담을 하였다. 이들은 당시 순국한 6명의 열사명단에 포함되어있다.
당일 아침 남전교회에 모인 교인과 주민 150여 명은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입어 결사의 의지를 다짐하였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받은 이들은 허리춤과 바지가랭이에 간수하고 대님이나 허리띠로 단단히 묶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집결지인 솜리장터를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이로써 이리 4·4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날 이리장터에 참석하지 못한 인원 중에서 약 30여명이 별도의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오산면 오산리와 남전리의 기독교인들이었으며, 수가 적은 인원이었기에 기세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과격한 양상을 띠었다. 미리 준비한 곤봉을 갖추었음은 물론 권총이나 비수까지 휴대한 무장군중이었다. 일부는 일본 수비대를 습격하는가 하면 일본인과 일본인 점포를 가리지 않고 파괴하는 이도 있었다. 이날 헌병이 사살되고 헌병보조원이 구타를 당하는 격렬한 시위로 이어졌다.
이때의 사역자 최대진목사는 만세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는데, 전북노회장을 맡고 있었던 직책 때문에 당일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한편 시위에 참석하여 육체적 정신적 손상을 당한 성도들에 대한 미안함과 계속되는 일경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남전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은 전주 서문교회의 경재(鏡齋) 김인전(金仁全, 1876~1923) 목사와 유사하다.
◇동련교회 1901년 군산시 서수면 신기리 장평마을의 지성옥씨 뒷방에서 처음 예배를 보기 시작한 동련교회는 1902년 황등면 동련리로 옮겨온다. 전남 승주 태생의 백낙규는 원래 동학군의 소접주 출신으로 개혁과 개화에 꿈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1904년 세례를 받음으로 이 교회에서는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백낙규(1876~1943)장로는 사재를 털어 교회신축을 도왔으며 추가로 학교도 설립하였다. 동련교회는 민족의 계몽을 염두에 두고 계동학교를 설립하니 그때가 1909년이며,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은 날은 1910년 8월 15일이다. 이어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1916년 학교후원회를 조직하고 지원을 하게 된다. 이때 세웠던 학교의 국기봉 지주석은 항상 감시하고 방해하던 일제가 가져갔다.
이들은 황등산 자락에 신사(神社)를 세우면서 ‘황기(皇紀) 2600년 기념석’으로 사용하였으니 그때가 서기1940년이다. 많고 많은 황등의 돌 중에 어느 적당한 돌이 없어 가져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돌은 해방 후에 교인의 집에서 문설주로 사용하던 것을, 1988년 동련교회의 종탑 밑에 옮겨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황등신사였던 자리에는 거대한 돌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있어 과거를 말해준다.
동련교회(東蓮敎會)가 삼일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상세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당시 황등에서 연일 이어지던 만세운동을 주동한 사람들이 동련교회 교인들이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자료와 당시 처한 민족적 상황에 비추어 보면 서두교회의 박병열장로, 남전교회의 최대진목사, 고현교회의 오덕근장로와 더불어 동련교회의 백낙규장로가 선봉에 섰을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교인들과 계동학교 학생들도 상당수 참여하였다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동련교회는 위의 국기게양대 지주석의 예를 보더라도 상당한 견제와 억압속에서 많은 애국심을 발휘하였을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동련교회와 고현교회는 같은 선교사인 하위렴이 목회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민족적 성향은 물론 종교적 성향도 상당부분 비슷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이런 때에 동련교회의 계원식은 군산의 구암예수병원을 사임하고 황등에서 기성의원을 연 의사로, 구제사업에 앞장섰다. 삼일운동 당시에는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는 혐의를 받아 경찰서에 불려다녔다. 이런 연유로 여러 교인 중에서도 계원식과 백낙규가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계동학교는 1909년부터 1935년까지 4년제로 운영되면서 105명이 졸업하였으니 다른 공립학교의 6년제와 비교가 되었다. 이는 일제가 계동학교의 운영을 방해했다는 증거이며, 나머지 2학년은 이웃 함라의 학교 혹은 이리의 학교로 편입하여 통학하는 불편을 조장하였다. 나중에 1936년부터 1947년까지 6년제로 운영되는 과정에서는 121명이 졸업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벌써 황등면을 아우르는 황등공립보통학교가 1927년 6월 5일 개교하여 경쟁체제로 운영되었지만, 졸업생들은 각처의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거나 지역의 주요한 인사로 활동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고현교회 1904년 오원집이 고현리 곽도일씨의 사랑방에서 오덕근, 김자윤, 고선경, 김경장, 오덕순 등과 기도를 시작하면서 교회의 태동을 알렸다. 1906.06.01 초가로 된 4칸 예배당을 마련하니 이리시 권역에서는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 이때 오원집은 1900년도부터 옥구군 회현면의 지경교회로 20리를 걸어서 예배보러 다니던 신자였었다.
고현교회(古縣敎會)의 오덕근(1861.04.13~1950)은 1917년 12월 1일 장로직을 받은 주무자였으며, 4·4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인이라고 교회당에서 예배만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본인은 실제로 태극기를 제작하여 배포하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오덕근(吳德根)은 감옥에 가서도 우리 민족이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오준환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이런 내용을 보더라도 고현교회의 교인들이 상당수 참여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고현교회는 초기교회의 울안에 오덕근장로를 기리는 기념비(記念碑)를 세웠다.
그가 출옥하여 가산을 정리한 후 학교를 세웠는데 민족교육을 위한 백동학교(柏東學校)였다. 그후 김한규집사(1891~1981)는 1920년 계문학교(啓文學校)를 설립하고 민족혼을 불러 넣어주는 민립교육(民立敎育)을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1918년 고현교회가 여학교인 경신의숙을 세웠으나 곧 남녀공학이 되었고, 재정이 확보되면서 경신학교(敬信學校)라는 명칭으로 바뀐다. 학제도 처음에는 4년제였으나 1936년에 6년제로 변경된다. 훗날 재정악화 문제와 한글중심의 민족혼 교육에 반하는 신사참배의 강요에 반대하다가 버티지 못하고 경신학교는 운영권 일체를 1938.02.27 계문학교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1944년 정식 폐교하였다.
◇서두교회 정정보가 1898년 11월 삼기면 서두리에 기도처를 마련하면서부터 시작된 서두교회는, 1903년 10월 10일 3칸의 예배소를 만들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공의회로부터 교회설립인가를 받았다. 1934년 5월 6일 김성환씨가 초대장로로 장립되므로 당회가 구성되었고, 날로 발전하면서 용기교회와 세광교회가 분립하여 나갔다. 또 1954년에는 삼기교회도 분립하였다.
익산 4·4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두교회에서는 박병렬(1881.03.05~1940.09.22)이 앞장섰다. 미록 적은 수였지만 애국심에 불타는 교인들은 그의 뒤를 따랐으며, 당일 체포된 박병렬을 위하여 밤낮으로 기도하였다. 사역자 마로덕은 이리경찰서로 찾아가서 박병렬을 면회하고 위로하였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자주 드나들며 박병렬을 면회하자 일제는 이를 고깝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힘의 질서를 내세우는 그들로써는 다른 도리가 없었기에 박병렬을 석방하기에 이른다. 1935년 5월 7일 박병렬은 서두교회의 장로로 장립된다.
그러던 중 1937년 중일전쟁이 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자, 기독교인으로서 제1계명에 위배된다하여 적극반대하고 나서니 바로 박병렬장로였다. 박장로는 이리경찰서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 상처를 입은 채 출소되었으나,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채 사망하였다. 그의 순교비가 엘리사기도원에 세워져있었는데, 후손들과 교인들이 힘을 모아 1986년 7월 17일 순교비를 고쳐 세웠다.
◇용산교회 용산교회의 역사에서는 삼일만세운동에 관한 기록이 없다. 이러한 것은 당시 용산주민들의 만세운동은 이리가 아닌 인근의 황등이나 함열지역에 국한하여 참여하였기에, 외부로 알려진 사항이 없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이는 용산교회 교인들의 신사참배에 얽힌 내용처럼, 일상사가 인근 거점지역이었던 황등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대장교회와 무형교회 춘포면 춘포리 32번지의 대장교회는 만세운동에 관한 기록이 없다. 인근의 교회사나 관련 자료에서도 대장교회에 관한 내용은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대장교회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얘기다. 당시 춘포에는 호소가와(細川)농장이 1904년 2월에 문을 열었고, 이어서 금촌(今村)농장과 전판(田坂)농장이 설립되어 우리의 식량을 수탈하였던 곳이다. 또 1917년 10월 29일의 이리신사에 이어, 1917년 12월 15일 대장신사(大場神社)가 설립된 지역이다. 이런 곳에서 대장교회의 역할이 상당부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망성면 무형리 520번지 무형교회의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 처음에는 지명(地名)인 선리교회로 출발하였으며, 그 동안의 기록이 최근 화재로 소실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거기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지역사회에 기여한 바가 크리라고 생각된다. 고현교회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한 이상태집사의 둘째 형 이상해씨가, 6·25때 무형교회에서 순교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함라면의 함라교회와 신등교회 그리고 여산교회 및 금마복음교회 이들 교회에 대해서 담임목사님께 확인하였으나 구체적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의 상황이기에 좀더 시간을 가지고 조사를 하면 어떤 역할이 발견될 지도 모를 일이다. 금마면 동고도리 771번지 금마복음교회는 처음 설립당시 금마교회로 출발하였다가 이름이 변경된 경우다.
◇웅포면의 제석교회와 웅포교회 제석교회는 웅포면 대붕암리 467-2번지에서 1906년 건립당시에는 대붕암교회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지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이는 농촌인구의 분산(分散)과 도시편중(都市偏重) 등으로 인하여 역할이 축소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908년 4월 10일 하위렴 선교사가 직접 제석교회 내에 학교를 세우니 부용학교라 불렀다. 삼일만세운동이 벌어지자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였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시절에도 어느 누구 하나 참배하는 교인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설립자 강두희 장로의 아들인 21세 강인성과 20세였던 강관성은 군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구암교회와 구암병원 직원들이 주도한 가운데 활동하다 체포된 21명에 포함되었고, 강인성은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소된 후 요양을 하였으나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또 설립자 엄주환장로의 아들인 엄창섭은 강경 청포리에서 영명학교를 다니던 강금옥으로부터 독립운동의 주도를 요청받고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3월 30일 10시 강경 봉오재에서 가마니에 넣어온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만세를 불렀다. 이때 투옥되니 28세였으며,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 거사에는 강경 창렴학교 교사였던 고상준, 추병갑이 도왔으며, 김종갑, 추승배, 강세형, 운동만, 정기섭, 서삼종, 한기섭 등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웅포면 웅포리 624번지 웅포교회의 경우는 1906년 설립된 이후 삼일운동 당시의 당회록이 누락되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다. 1983년 12월부터 현재까지 시무중인 박재용목사님도 삼일만세운동에 관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출석교인이 150여 명인 시골교회지만 몽골에 선교사를 파견할 정도로 열성인 것을 감안하면, 그 옛날에도 열성적인 믿음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기는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