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사(神社)의 설립과 참배강요 1910년 8월 29일 국치일을 통하여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조선통감부를 확대하여 조선총독부를 세웠고, 민족정신말살의 수단으로 신사정책(神社政策)을 수립했다. 이는 혹시 있을지 모를 반항의식을 미리 차단하고, 그들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기 위해서였다.
강점기의 대표적인 신사는 남산에 있었던 조선신사였다. 일제는 조선신사건립을 위하여 1912년부터 3년간이나 조사하고 준비하였으며 필요한 예산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5월 27일 지진제(地鎭祭)를 시작으로, 1925년 10월에 이르러 완공하는 대역사를 마무리하였다.
여기에 투입된 비용은 무려 156만 4,852엔이었다. 물론 이 돈이 조선총독부의 예산이라고 말하지만 일본정부에서 가져온 돈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공사가 채 끝나기도 전인 1925년 6월 27일 명칭을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바꾸며, 10월 15일 진좌제(鎭座祭)를 열고 일본에서 가져온 상징물을 배치하였다.
조선신궁은 돌계단 384개에 건물 15개를 가졌으며, 총면적은 12만 7,900여 평에 달했다. 강점기때 국민의 생활과 생명을 관장하던 조선총독부의 부지면적이 2만 9,500평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문화와 정신 그리고 영혼을 말살하는데 가히 의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신궁의 위치는 현재의 식물원과 남산도서관, 분수대, 동물원, 서울과학교육관, 안중근의사기념관 등이 있는 곳이다. 신궁이 생기기 전에는 조선태조 이성계가 세운 국사당(國師堂)이 있었다. 당시 국사당에는 단군왕검과 천산수(天山水)의 삼신, 태조 이성계, 무학대사를 위시한 여러 제신(祭神)을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런 국사당을 인왕산 기슭으로 옮겨버리고 그곳에 신궁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신궁에는 일본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최초로 하늘을 지배했다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천조대신(天照大神), 한일합방의 원흉인 메이지가 죽은 8년 후 신으로 승격시켜 만들어낸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을 안치하였다. 그리고는 한일합방 때와 마찬가지로 신사참배를 해야 하는 이유로 메이지가 조선백성들에게 은덕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선신궁이 세워진 후 신사규칙을 만들고 1936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인의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조선신궁 외에도 서울에 경성신사, 부산에 용두산신사, 대구신사, 평양신사, 광주신사, 강원신사, 함흥신사, 전주신사를 짓고 1939년에는 부여신궁을 짓기도 하였다. 부여신궁을 지을 때는 기독교 전북노회의 목사 및 장로들이 1941년 10월 30일에 노력봉사를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고 1937.07.07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각 교회에게 7월7일 기념주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바로 천황과 천황군을 위한 기도를 하라는 것이며, 대한제국을 부정하고 신앙마저 강요하는 다시 말하면 민족혼 말살정책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때 각 지역의 면마다 신사를 세웠고, 매월 1일을 흥아봉공일(興亞奉公日)이라 하여 일본국기(히노마루)를 게양하고 일본국가(기미가요)를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1937년 10월부터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辭)를 봉창하게 하였다. 이는 일제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충성하며 목숨까지도 바치는 신하의 도리를 맹세한다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그리고 노력봉사 등을 강요하였다.
이때 각 학교의 교실마다 일본궁성 사진을 걸어 의식화시켰으며, 무슨 행사만 하려해도 멀리있는 궁성을 향하여 절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궁성요배(宮城遙拜)다. 정오에는 경찰서나 주재소에서 사이렌이나 종을 쳐서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고, 그에 맞추어 천황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묵도(默禱)를 하도록 하였었다. 이 두 가지도 신사참배와 똑같은 민족말살 정책의 하나였다.
1937년 8월, 일본군만으로는 힘이 부족하여지자 우리 국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으로 지원병제도를 만들었다. 육군 지원병제도의 시행은 1938년 2월, 전투 외 노력봉사를 위해 국민징병령은 1939년 7월, 해군 지원병제도는 1943년 5월, 막바지전투에 필요한 강제 징병령은 1943년 8월에 시행하게 된다. 그리고는 각 교회에서 이를 홍보하고 유도하라고 강요하였다. 결국은 서울의 중심지 승동교회에서 1942년 5월 11일 지원병 입대기회부여 감사예배를 진행하였다는 내용이 기독교신문 5월 13일자에 게재되었다.
이러한 온갖 회유와 강압으로 신사에 참배한 수는 1936년에 100만 명, 1940년에 215만 명, 1942년에 265만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공직자를 강요하였으나, 곧 학생과 전 국민들을 동원하였다. 심지어 기독교재단의 학교에서 참배를 반대를 하면 바로 폐교시키는 방법도 택했다. 결국 기독교에서도 당회에서 신사 참배를 결정하기에 이르니, 일제의 강요는 악랄함을 넘어 목숨의 생사권(生死權)을 흔드는 그 자체였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가르치는 대로 배우는 학생은 물론이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권(事業權)을 잃지 않기 위하여, 부(富)를 가진 사람들은 재산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난한 백성들은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심지어 종교계에서마저 해체당하지 않기 위하여 참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쯤 되면 전국토의 전 국민이 신사에 참배하게 되는 상황에 달한다. 일제는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기에 앞서, 한국 내 모든 외국인들에게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따라서 많은 선교사들이 1940년에 철수하게 되고, 일제는 무자비한 신사참배 강요와 전쟁 준비를 계획대로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신사참배에 어느 정도의 강압적 자세였는가 하는 것은 당시 이리농림학교 역사박물관의 당시 사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 익산지역의 신사 2005.04.28 광복60주년기념 문화사업추진위원회가 조사한 일제하 신사 및 신궁현황에 의하면, 전국에는 모두 71개의 신사(神社)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 전북은 11개, 전남이 9개, 충남이 7개로 많은 수였다. 그러나 1941년 일본인이 쓴 ‘대륙신사대관’에는 조선의 지방 면단위까지 세워졌던 소규모 신사를 합하면 546개라고 하였다.
또 규모가 작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던 신사를 계산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수였을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전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것이 확실해진다. 소규모 신사수인 546개 속에는 전라북도가 17개의 신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면 대규모 신사는 왜 전북에 많이 있었느냐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일본인의 주거 인구에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리의 일본인 유입을 보면 1906년 군산에 살던 전중부차랑(田中富次郞)이 이리에 이사를 왔고, 1907년에는 주현동에서 대교농장을 가졌던 대교여시가 지신원길을 파견하여 토지를 매수하도록 하고 있다. 또 1908년 선미조(扇米助)는 군산에서 이리로 옮겨와 터를 잡게 된다. 이들 3가구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호남선 철도의 측량이 시작되자 5가구 16명으로, 1911년 철도공사가 시작되면서는 66가구 224명이 되었다.
1912년 철도개통이후에는 270가구 946명, 그리고 1925년에 887가구 3,947명에 달한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1916년 익산군 전체의 인구는 24,123명에 6,432가구였다고 한다. 이때의 익산군은 춘포와 왕궁, 금마, 오산과 구 이리지역을 포함하는 구역이다. 참고로 용안군은 6,356명, 함열군은 9,563명, 여산군은 15,327명으로 조사되었다. 1916년은 이미 1914년 3월에 군지역 통합작업이 끝난 상태임으로 용안과 함열 그리고 여산이 익산군에 포함되어있었지만, 일반 내용을 아직 분리하여 기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전북은 곡창지대로 농업이 발달하였고, 이의 저장과 운송, 가공, 수출에 이르기까지 모든 산업이 활발하였다. 따라서 이런 지역에 많은 일본인이 정착하면서 그들 생업의 무사태평을 기원하고, 소작농이나 종업원들에게는 자신들의 요구에 순응하는 정신교육이 필요하였으리라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전북은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으로 꼽히기도 하였는데, 이는 쌀 수탈의 현장이었다는 반증이다. 그런 농경밀집지역을 제외하면 나머지 산간어촌은 인구분포도가 낮았기에 상대적으로 소규모 신사가 적었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리신사(裡里神社)는 1917년 10월 29일에 건립하였으며, 천조대신을 제신(祭神)으로 두었었다. 한편 1917년 12월 15일에 세워진 대장신사(大場神社)는 대장촌에 있었는데, 천조대신 외에도 7명의 다른 신을 더 두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장농장(大場農場)의 주인은 호소가와(細川)였는데 자기 가문의 영웅 호소가와 후지타카(細川藤孝)를 신의 반열에 올렸다는 점이다. 이것으로 대장신사가 개인의 요구에 따라 제신을 결정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반증된다. 그만큼 넓은 농장에다가 많은 수의 소작인을 두고 수탈하였음이 확실하다.
황등신사는 황등면 황등리 334-2번지에 가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은 높은 석축으로 경계를 하였기에 일반인들이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는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합되기 전까지는 익산군의 충혼탑이 있었기에 오래 보존 될 수 있었던 지역이다. 물론 지금은 터만 남아있고, 신사에 들어가는 일주문의 돌기둥을 잘라낸 흔적과 여기저기 커다란 벚나무가 남아있는 정도다. 그러나 한 눈에도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 황등리에서 자란 강용태옹(1933년생)은 당시 행사 때가 되면 일본인들과 초등학교학생들이 동원되어 참배하였다고 증언한다. 이때는 절을 하고 일본국가를 부르며 필요한 황국신민서사 등의 낭독과 같이 그때그때 필요한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황국신민서사는 소년용과 성인용으로 나누어 그들에게 맞는 3문장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지역 주민들이 몰려들어 신사를 부수고 돌기둥도 망치질로 잘라냈다고 회상하였다. 아쉬운 점은 현재 이곳을 경로당, 근린체육공원과 게이트볼장 등으로 활용하여 자칫 역사적 의미를 훼손할 것이 우려되는 바이다.
1960년대의 내가 어렸을 적에도 이곳을 신사당(神社堂)이라 부른 것과, 현충일 기념행사를 하였던 것도 역사의 혼란을 가져오는 대목이다.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전국적으로 보아도 이 정도나마 신사의 흔적을 가진 곳도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익산시는 경제 여건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곳에 경로당을 짓거나 마을 회관을 짓는 등으로 역사를 혼란시키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곳은 전국에서 모이는 역사가들과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후손들의 산 교육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신사는 대체로 일주문을 지나서 넓은 마당을 거친 후 신전을 지었다. 신전 앞에는 사찰의 당기처럼 일장기와 신사기도 세웠다. 신전에는 일본국이 정한 신과 어떤 연유에서 별도로 정한 신의 위패를 모셔놓는 형식이었다. 당시 일본의 신에 대한 개념은 보통의 개념과 달라서 지역이나 가문의 영광을 나타낸 사람도 신격화 하여 모시는 예가 많았다. 그러나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국가의 승낙을 받아야만 하였으니, 이른바 토착세력이나 귀족들이 그럴 수 있었다. 따라서 익산의 대장신사에 등장하는 호소가와 가문이 신격화(神格化)된 것은 그런 대표적인 사례다.
■ 신사참배와 기독교 일제는 국립학교는 물론 사립학교가 신사참배나 황군찬양에 협조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정식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 예로 평안남도는 1930년 만주사변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거행되는 1932년 평안남도 서기산의 일본 황군위령제에 동참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당시 전북에서는 1938년 4월 28일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전북노회에 상정하는 교회가 생겨났으며, 이때쯤에는 여러 교회가 동참하게 된다. 1938년 봄 평북노회가, 1938년 9월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교회 평양총회가 가결하였다. 이로써 기독교의 신사참배가 이루어지는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기독교계가 이런 결정을 하긴 하였지만 이것을 두고 나무라는 일반인은 없다. 상황으로 보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어쩔 수 없었기에 왈가왈부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탓하기로 한다면 힘이 없고 나약했던 국민 스스로 욕을 먹어야 하고, 그렇게 관리하고 지도한 지도자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었기에 교회에 대하여 직접적인 지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문제로 본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입장에서의 해석이 필요함으로 개인적으로는 언급하지 않겠다.
반면 일제의 강요가 강하면 강할수록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저항세력도 생겨났고, 크고 작은 마찰은 도처에서 끊이지 않았다. 설사 기독교의 당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였어도 신도가 이를 거부하는 예마저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기선 목사와 채정민 목사를 비롯하여 교직자 20여 명은 반대를 하다가 붙잡혀 평양감옥에서 7~8년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도 신앙을 지켜왔다고 한다.
가까운 전주 서문교회의 배은희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쫓겨 가고 후임에 김세열목사가 부임한다. 그러더니 김세열목사는 처음부터 친일행각에 앞장서 나섬으로 서문교회가 일제를 적극 옹호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1937년 9월초 개학이 되면서 먼저 전주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공문이 왔으나 이를 거부하자, 학교 폐쇄와 신사참배 중 하나를 택하라는 최후통첩이 날아왔다. 결국 호남에서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군산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목포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광주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순천 매산학교와 여학교 등 10여 개의 학교가 강제 폐교당하거나 자진 폐교하기에 이른다.
우리 익산에서는 고현교회의 젊은 집사 이상태(1915.04.03~1943.08.10)가 그런 예였다.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이상태는 이를 거부한 채 혼자 배산에 올라가 기도로 밤을 지센 적이 많았다. 이 일로 경찰서 조사를 받은 후 고향을 떠나게 되었으며, 서울에 가서도 신사참배는 곧 죄악이라고 역설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고문으로 얼룩진 투옥 중에 폐결핵을 얻으니, 몸이 허약하여 더 이상 어쩌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일제는 그를 출감시켰다. 출옥한 이상태집사가 익산군 이리읍 고현정(古縣町) 167번지 자택에서 끝내 숨을 거두니 그때 나이가 29세였다. 이상태의 둘째형 이상해 전도사도 한국전쟁 때 망성면 무형리의 무형교회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순교자가족이다. 이상태의 아들 이성수(1941.07.09출생)는 군산 구암교회의 장로이며 부친이 사용하던 성경, 교인들 초상화, 스케치북, 사진 등을 군산지역 삼일운동기념관이 완공되면 기증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 서두교회의 설립자 김성환장로와 박병렬장로도 이와 비슷하다. 박병렬장로는 삼일운동을 하다가 1년간 옥고를 치른 경력도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자, 기독교인으로서 제1계명에 위배된다하여 적극반대하고 나섰다. 체포령이 떨어진 김성환장로는 이교회 저교회로 옮겨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때 교인 150여 명이 이리경찰서로 잡혀가서 모진 고문과 협박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승복하였으나 이때도 박병렬장로만은 굽히지 않았다.
조사를 받던 중 일제가 의자를 던지자 그의 다리가 부러졌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주장하는 박장로를 보면서, 혹시 옥사(獄死)라도 하게 된다면 이리경찰서가 겪게 될 파장을 고려하여 긴급 출소시켜 집앞에 버리고 갔다. 그리하여 집에 돌아와 부인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지만 당시 가정에서 행하는 민방요법으로는 치료에 한계가 있었다. 그는 결국 1940년 9월 22일 세상을 뜨니 서두교회장으로 치러졌으며, 후손들과 교회는 1986년 7월 17일 순교비를 고쳐 세웠다.
이밖에도 창씨개명에 열을 올리던 시절에 서두교회의 당회록이 한자와 한글로 적혀있다는 것은 당시 서두교인들의 믿음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기독교를 조종하고자 하는 일제는 조선 장로교 총회 내에 국민총연맹 기구를 조직해 놓고, 노회에 수시로 이런 저런 지시를 내렸다. 1941년 6월 26일에도 군산노회 국민총연맹 이사장 명의로 각 교회는 중일전쟁 4주년 기념행사를 갖도록 지시하였었다.
세부내용을 보면 각 가정마다 국기를 게양하고 정오에 싸이렌을 맞추어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1분간 묵도로 국위선양의 위해 출정한 장병의 무운장구를 빌며 호국영령에 대한 감사의 뜻을 신명께 기도하라고 하였다. 또 출정 군인의 유가족의 위적(慰籍) 및 전상병자의 위문과 출정 장병에 대한 위문문 발송에 관하여 적당한 방법을 강구하라고도 하라는 것 등이었다.
어떤 지시문에는 전쟁에 필요한 자금과 물자의 조달을 위하여 헌납하라는 것도 있었으며, 이것은 황제와 국가에 바치는 것이니 바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라는 궤변으로 일관하였다.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에게 이런 짓을 할 정도였다면 행정기관이나 일반 시민들에게는 어떻게 하였을지 묻지 않아도 상상이 된다.
천주교에서도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학교가 폐쇄당하는 사태가 있었다. 화산천주교회에서는 1908년 9월 15일 베르모렐 신부를 위시하여 계명학교(啓明學校)를 세웠다. 이 학교는 개교 1년 만에 학생수가 50여 명에 이르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견디지 못한 카닥스 신부가 1924년 거부투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925년 10월 15일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계명학교까지 신사참배의 강요를 받으니, 교회측은 신앙심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으로 1926년부터 3년간 자진 폐교한 일도 있었다.
고현교회에서 분립한 이리제일교회는 처음에 지역명을 따서 후리교회라 불렀다가, 1935년 5월 9일 이리제일교회라 고쳐 불렀다. 후리교회는 1921년도에 설립되었으나 초기 당회록이 없어 정확한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설립연도가 1922년으로 추정되는 광희여숙이 1928년 3월 폐쇄되고 만다. 광희여학교(光熙女學校)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점과 독립운동의 주역이었던 김병수가 재정지원을 하는 학교라는 이유로 심한 경계의 대상이었고, 그런 중에 결국은 압박을 이기지 못한 채 문을 닫았다.
연무읍 황화정3리의 황화정교회도 아픈 과거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오래 전에 익산군에 속했던 곳으로 초기 익산권내 기독교의 모습을 공유하고 있다. 1905년부터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다고 하지만 노회에 가입된 기록은 1907년이며, 1910년 4월에는 교인이 8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교회 역시 확실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 못하여, 여러 자료를 토대로 교회의 역사를 재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강점기의 막바지인 1945년 황화정교회의 김종원, 김종군씨 등 교인 20여 명이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이리경찰서로 호출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고문으로 초죽음이 된 뒤 어찌어찌하여 풀려난 교인들에게 핍박이 더해졌는데, 이른바 전방위적(全方位的) 경제제재였다.
돈을 빌려주거나 일을 도와주지도 못하게 하며, 먹을 식량조차 도와주지 못하게 하여 철저히 소외당하는 고문을 주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예수를 믿으면, 그들은 곧 죽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이는 생명 부지를 위한 최소한의 본능마저 제한하는 행위며, 동족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을 조장하는 악행이었다.
박임선 은퇴권사님은 지금도 가정예배시에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내신다. 당시 곁에서 지켜보았던 부친의 쓰라린 몸부림이 떠오르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편한 세상에서 신앙을 지킬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리라. 그러면서도 한사코 과거사(過去事) 밝히기를 꺼려하신다. 무엇이 마음의 문을 닫게 하였을까.
민족에게 소외당하다가 돌아가신 부친에 이어, 이분마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우리 현실이 멀게만 느껴진다. 이 부분은 다음기회에 자세히 살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황화정교회는 교인들의 희생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 1945년 어쩔 수 없이 폐지하였다가 한국동란 휴전 후인 1953년 11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당시는 일제의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던 때라,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고 보이는 데로 말하던 시절이었다. 1945년 7월 19일에는 기독교계 장로교 대표 27명, 감리교 대표 21명, 구세군 대표 6명, 그리고 군소교단 대표 5명 등 총 59명을 끌어들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에 강제 통합시키던 무리들로, 시골교회의 촌로쯤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황등면 용산리의 용산교회는 당시 마을의 유지였던 허성일과 방탕자 박공업을 포함하여 이성중이 1907년 동련교회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비롯된다. 이들은 3월 3일 용산리에서 처음 예배를 보게 되었다. 박공업의 변화는 방탕자가 새사람이 된 것이었으니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고, 그 수가 날로 증가하였다.
용산교회는 복음전파는 물론 야학을 운영하여 계화에도 힘썼다. 한창 신사참배가 강요되던 때에는 이를 거부하여 화도 입었다. 박공업장로는 황등주재소에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당하고 골병든 상태로 돌아오기도 하였었다. 일제는 초기교회의 찬송가를 회수하여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글귀에다가 까만 먹물을 칠한 후 돌려주었다. 그런다고 신사참배에 따를 기독교인들이 아니었지만,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억압하였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낭산면 용기리의 용기교회에서는 김연호집사가 익산경찰서에 끌려가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며칠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죄목은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교인으로서 면회를 갔었던 김창옥집사도 며칠이 지난 후에는 낭산주재소에 끌려가서 심한 구타와 폭언을 들었다고 한다.
웅포면 웅포리 624번지의 웅포교회 당회록에서도 일제의 신사참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정해진 신사에 찾아가서 참배를 한 것은 아니지만, 예배 전에 먼저 인사를 하고 암송을 한 후에 예배를 보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당회록은 상당부분 생략되고 특별한 경우에만 적고 있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삼일운동 당시의 웅포지역 상황을 떠올려보면 일제에 항거하는 사람들 즉, 삼일만세운동을 주동했다거나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내용들이 상당부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런 사실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 신사 철거 드디어 해방이 되자 일제가 물러가면서 맨 처음 행한 것은 신사를 거둬들이는 작업이었다. 조선신궁에 있어서도 1945년 8월 16일 승신식(昇神式)을 가진 후 본전(本殿)에 불을 질러 소각하였다. 국민들의 응어리진 원한이 자신들의 신전을 파괴하고 부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들의 신은 자신들이 보호해야한다는 의무감이 따랐던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태극기를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민족 혼으로 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위의 예에서 보았듯이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남은 신사가 있었다고 해도 우리국민들이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었겠지만, 일제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1945년 9월 9일 승전국 하지 장군의 한국내 일본인거주 통치(統治) 허용에 힘입어 자신들의 과오(過誤)지우기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후 우리 역사는 일제 강점기의 기득권자들이, 독립한 후에도 계속하여 지도자의 자리에 남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이는 정치권력의 잘못된 집행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의 왜곡과 문화의 상처를 돌이키기 힘든 지경으로 만들고 말았다.
일본! 그들과는 정녕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인가. 역사를 왜곡하고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과, 개인을 위하여 나라를 팔아먹고도 반성하지 않는 무리들은 닮은꼴이다. 자신들의 신앙과 믿음 그리고 자신의 신념과 정서는 잘 챙기면서, 남의 신앙과 민족혼은 짓밟아도 된다는 무식하면서도 얄팍한 사고(思考)가 가증스럽다.
『삼일절 특집기고를 마치며』
지금까지 정리된 내용 중에는 구전되는 것도 있으며, 일부는 약간의 과정이 필요한 기록들도 있다. 만에 하나 당시 상황으로 보아 아무리 그럴만하다 하여도, 충분하지 않은 것을 과대포장하거나 미화한 내용이 있었다면 그것은 선대(先代)를 욕되게 하는 일로 후손으로서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