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27. 무왕이 살았던 왕궁성의 왕궁리 유적들

꿈꾸는 세상살이 2010. 4. 6. 10:59

왕궁리유적(王宮里遺蹟)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 80-1번지의 성터에서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아직 발굴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유적과 유물이 있는 216,862m²일대에 대하여 1998년 9월 17일 사적 제408호로 지정하였다. 이곳은 사유지로 김준룡 외 여러 명의 소유로 되어있다.

 

‘왕궁리성지(王宮里城址)’라고도 부르는 왕궁평성(王宮坪城)과 관련된 유적이다. 왕궁면 왕궁리 탑마을의 왕궁성지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사서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관세음응험기’에 제석사와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면서, 백제 ‘무광왕’이 이곳 ‘지모밀지(枳慕密地)’에 천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백제말기의 무왕 때 익산천도설 또는 별도설(別都說)을 주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 유적이다.

 

왕궁리유적 중앙에 국보 제289호인 왕궁리 5층석탑이 있고, 주변의 반경 5km 내외에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백제유적이 집중분포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이러한 백제시대의 다양한 유적분포는 단순한 단일성격을 가진 성곽만 존재하거나, 사찰(寺刹)유적만 분포된 것이 아닌 성곽(城郭)과 사찰(寺刹), 토기요지(土器窯址)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분포되어 있다는 데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적은 그 위상에 있어서도, 지금까지 조사된 공주나 부여 등 백제도성(百濟都城)에서 출토된 유물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거나 그 이상의 우수한 것들이다.

우선 이러한 증거가 되는 백제유적을 살펴보면, 왕궁유적에서 북편으로 보이는 오금산에 익산토성이 자리하고, 그 앞에 오금사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익산토성의 동편에는 미륵산으로 통하는 도로 건너에 금마도토성이 있으며, 왕궁리유적 동편으로는 1.3km가량 떨어진 지점에 제석사지가 있다. 미륵사와 사자암도 당시의 불교신앙을 증명하는 유적이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는 무왕과 선화비의 무덤인 쌍릉도 존재한다.

 

왕궁리유적지의 유구로는 궁성관련시설이 있는데, 성벽과 문지, 수구, 암거, 동서석축배수로, 석축, 와적기단 건물지 등이다. 또 사찰관련시설로는 5층석탑, 금당지, 강당지, 건물지, 와요지 등이 있다. 평면 직사각형의 성벽 내부는 경사면을 이용하여 단(段)이 지도록 석축을 쌓아 평탄대지를 조성하였고, 와적기단(瓦積基壇) 건물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건물을 축조하여 궁성관련시설로 활용되었다.

내부에 있는 왕궁탑은 1965년과 1966년에 걸쳐 조사 및 복원공사가 이루어졌고, 1976년부터 1977년까지 시굴조사가 있었다. 유적지에 대해서는 1989년부터 2009년 지금까지도 5개년 단위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유물로는 인장와, 명문와, 연화문 와당, 중국제 청자편, 도가니, 금제영락, 유리구슬 등 총 3,000여점이 출토되었다. 발견된 명문와(銘紋瓦)로는 ‘금마저’, ‘관’, ‘왕궁사’, ‘관궁사’, ‘상부’, ‘전부갑와’, ‘미륵사’ 등이 있다.

미륵사명 기와는 미륵사 창건시 쓰고 남은 것을 가져다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부여 사비성안의 궁궐이나 절터에서 발견된 것들과 유사하며, 성의 판축법 역시 사비도성과 같은 양식이어서 왕궁성이 백제의 경영에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는 통일신라, 후백제, 고려시대의 방식으로 추정되지만, 견훤(甄萱, 867~936)이 백제의 후예임을 자청하였으니 그 형태를 많이 따랐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1989년 9월 1일 발굴조사를 위한 개토제(開土祭)부터 1990년 5월까지는 국립문화재연구소, 1990년 5월부터 현재까지는 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사찰관련유적 및 성곽유구임을 확인하였다.

조사결과를 살펴보면 국보 제289호인 현존 5층 석탑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1금당 형식의 관궁사(官宮寺) 유구가 확인되었다. 석탑 하부에서 선대 유구인 건물지와 목탑지가 확인되어 이 유적 내에서는 적어도 백제말기와 후백제,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 유적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적지 내의 2006년 조사와 2007년 조사에서 백제의 정원 양식이 발견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 조경의 실체인데, 성곽 절반의 남쪽은 궁궐로 북쪽은 정원으로 사용한 예다. 화려한 괴석과 자갈돌로 장식하고, 정각(亭閣)까지 갖추고 있었다. 초목에 물을 대는 석조시설, 물을 받아내는 집수시설과 배수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인근 금마초등학교 정원에 비치되어 있는 괴석 25개를 왕궁리 왕궁의 정원에 있었던 괴석으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이 괴석들은 일반 괴석과 달리 형태가 특이하며, 석질 역시 인근에서 생산되는 화강암이 아니라 현무암이나 대리석 기타 보기 드문 재질임이 그런 추측을 낳게 한다.

 

유구 중에 많은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 내측의 공간이 넓고 구들시설이 있는 방이 있어, 이는 단체가 회합을 하거나 공공적인 공간으로 사용되어 아마도 정청(政廳)과도 같은 용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부명(首府銘)이 새겨진 인장와는 부여 부소산에서 1점, 여기 왕궁에서 2점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왕궁평성(王宮坪城)이 왕성(王城)으로 조영되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석탑 동편 약 30m 지점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가마 2기가 발견되었다. 와요지는 거의 파손되었으며, 수습된 유물은 관궁사 사찰에서 출토된 유물과 거의 유사하다.

석탑을 에워싸고 있는 주변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통일신라 때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성곽유구가 확인되고 있다. 성곽 내·외부에는 폭 약 1m 가량으로 판석을 깔아 만든 부속시설이 발견되어 성곽사(城郭史)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성곽은 잘 다듬은 방형의 석재를 이용하여 쌓았으며, 내·외벽면의 사이에는 막돌과 흙을 혼합하여 채워 넣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성벽을 쌓기 위해 그 하부에는 6내지 12단으로, 높이 약 60cm에서 200cm 가량의 석축을 쌓아 기초시설을 하였고 그 내·외부를 토사로 보강하여 견고성을 보장하였다.

현재까지 성벽의 정확한 높이를 알려주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성벽의 두께 등으로 보아 적어도 어른의 키 높이에는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성곽의 웅대한 모습은 현재 발굴을 통하여 점점 명확해지고 있는데, 그 규모는 동벽 492.8m, 서벽 490.3m, 남벽 234.06m, 북벽 241.39m로 총연장이 1.5km에 달하는 직사각형의 평지성으로 밝혀지고 있다.

 

2003년~2004년의 최근 조사결과, 경사지고 낮은 땅을 수레바퀴를 이용하여 메운 대역사 토목공사로 만들어진 성이라고 밝혀졌다. 또 이곳 성문까지 배가 드나들었다는 것도 추정되고 있다. 기와와 토기류, 귀공품 등 1,000여 점과 백제시대 화장실, 서쪽 성벽암거의 발굴로 축조시기를 7세기인 백제 말로 결론지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수세식 화장실에 사용된 토관과 정화시설, 공동 화장실 등이 발견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분뇨에서는 곡식의 씨앗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발견됨으로써 당시 병균이나 생활습관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따를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유리제품은 금속막대에 찍어서 감아올리는 기법인 와인딩기법과, 유리를 잡아 늘려 관 형태로 만든 후 자르는 드로우잉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기법은 현재도 사용하고 있어, 당시 기술이 현재와 같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금제품도 순금보다는 합금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 당시의 주조법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수준의 시설이라면 당시 민가라고 보기보다는 왕이 기거하였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최고급의 정원이나 수세식 화장실 시설 등은 기술이나 재력이나 소유토지로 보아서도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왕이 천도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유물의 발견이라고 할 것이다.

익산 왕궁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학설이 있다.

 

마한의 기준도읍설은 『고려사 地理志』권57 금마군 편에 나오는 기준성(箕準城)을 근거로 기원전 2세기 초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피신하여 도읍한 곳이라는 학설이다.

 

또 안승도읍설은 김정호의 ‘대동지지’ 익산편에 언급된 것을 근거로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민심을 잠재우기 위하여 고구려의 왕족 안승을 보덕국이라 칭하는 소고구려국의 왕으로 삼아 정착시킨 곳이라는 설이다.

 

한편 백제무왕의 천도 및 별도설을 살펴보면, 600년에서 641년까지 통치한 금마 출신의 백제 제 30대 무왕(武王, 아명:薯童)이 백제의 수도를 현재의 부여인 사비성에서 익산으로 옮기고 왕궁성을 쌓았다는 학설이다. 이는 관세음응험기를 바탕으로 하며 실존하는 미륵사지, 사자사, 쌍릉 등에 근거를 둔다. 최근까지의 조사내용으로는 여기에 근거를 둔 백제의 유적으로 보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바로 옆에 2008.12.23 왕궁리유적전시관을 열어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보 289호인 왕궁리오층석탑의 과거를 볼 수도 있어 문화적으로 생활 풍습적으로 좋은 교육의 장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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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10.03.31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