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중앙동 구삼산의원(益山中央洞 舊三山醫院)
전라북도 익산시 중앙동 3가 114-2번지에 양옥의 형태를 가진 일식건물이 있다. 연면적 289.2m²에 건축면적 158.02m²인 2층짜리 벽돌조 건물 1동은 정봉교소유로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당시 삼산의원(三山醫院)으로 1922년 김병수(1898~1951)가 개원하였으며, 해방 후 한국무진회사로 사용되다가 국민은행이 인수하였다. 국민은행은 여기에 33.45m²의 금고를 증축하였었으나, 지금은 신축건물로 이전하였다. 최근에는 음식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그나마 영업을 중지한 상태다.
1931년 조사에서는 익산에 총 8개의 의원이 있었으나, 그 중 절반만 한국 사람이 운영하였다고 한다. 삼산의원은 해방되던 해 화재가 발생하여 내부가 전소되었으며, 외관도 수리한 흔적이 남아있다.
김병수(金炳洙)의 호가 삼산(三山)이며, 김제 백구출신으로 군산 영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졸업을 1년 앞둔 삼일운동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3개월을 복역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이리읍이 이리부로 승격하자 초대 부윤으로 취임하였으며, 한국전쟁시에는 제5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삼산의원의 외관은 전체적으로 르네상스 팔라죠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작은 부분도 매우 섬세하며, 정면은 대칭인데 출입구 상부에 바로크 양식의 곡선을 채택하였다. 중앙부의 2층은 3개의 작은 창을 합쳐 상부에 위치시키고, 양측에 1개씩 낮은 창을 두었다. 1층은 아치로 된 출입구가 돌출되어 있고, 정면의 좌측과 우측에는 각각 3개의 트레이 서리창을 두었다. 측면에는 각각 4개의 트레이 서리창이 있으며 높게 올린 굴뚝이 남아있다. 처마홈통 밑에 그려진 동그란 부조형 장식은 언뜻 보아도 일장기의 원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중앙에 벽 없는 돌출 현관인 포치를 두었으며, 좌측의 계단실을 통해 2층으로 출입하도록 되어있다. 2층은 중복도형식이다.
지붕은 우진각형이며 슬레이트로 마감하였고, 지붕의 상부 코니스는 3단의 몰딩으로 처리하였다. 몰딩의 상하부에는 꽃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지붕의 하부에는 함석으로 된 물받이와 낙수통이 설치되어 있다.
김병수의 아들 김신기는 산부인과 의사인 그의 아내 손신실과 함께 중앙동에 삼산의원을 개원하기도 하였다. 훗날 그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다.
구삼산의원을 찾는 길은 의외로 쉽다. 중앙동의 국민은행사거리에서 우체국방향으로 난 우체국길 133에 위치하고 있다. 예전에는 우체국에 간다고 하면서 자주 지나가던 길이었지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건물이었다. 형태가 특이하여 눈여겨 볼만도 하였겠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지나치려 해도 눈에 밟히는 건물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는 이런 일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어느 누군가가 말하기를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는 것처럼, 모든 것은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웃도시 군산에도 일본과 관련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여럿 있다. 여기에는 일제의 흔적이 묻어나는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구군산세관, 히로쓰가옥, 구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강점기의 지배자들이 사용하던 건물이거나 이와 관련되어있으며 익산의 삼산의원처럼 우리나라 사람의 건물은 따로 있다.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00호인 이영춘가옥(李永春家屋)이 바로 그것이다. 이영춘은 당시 의사였으며, 현재 전북 군산시의 학교법인 경암학원을 연 교육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할 때 군산은 일제의 수탈을 많이 받은 도시로서 여러 종류의 근대문화재가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쌀을 실어가던 역사적 아픔으로 그와 관련된 유적지가 많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지역 보다 많은 여러 잔재가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군산과 익산을 비교해볼 때 군산보다 익산의 등록문화재가 더 많은 것을 언뜻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지고 보면 당시 군산은 항구와 금융가를 중심으로 하는 집약적인 수탈의 현장이었고, 익산은 넓은 지역을 전체로 하여 농업과 수리시설, 그리고 생활방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겪었던 현장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더 적합한 해석일지 모르겠다.
강점기의 먹고 살기 힘들었던 일상에서, 말하고 듣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못했던 지친 일상에서, 익산에 김병수와 같은 사람이 있었고 군산에 이영춘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청량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억압받고 학대받는 것도 억울한데 몸마저 아프다면 그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생활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얼마나 많은 동포들에게 무상으로 치료를 해주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같은 동포의사가 있어 마음놓고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비록 나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거나 어떤 혜택을 준 것은 아니지만, 지금 돌아보는 역사에서 과거 그의 행적을 볼 때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익산의 김병수는 군산영명중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예수병원을 거친 후 1922년에 개인병원을 연 의사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의술이 곧 인술이라는 말과 같이 의사가 아픈 상처만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픈 마음까지도 보듬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아픈 사람이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약을 먹을 때 그 약으로 인하여 다른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역시 의술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인술을 바탕으로 한다.
김병수는 삼일만세운동을 적극 주동한 사람이다. 그때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학생으로,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으로부터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받아 군산과 익산으로 전달하였다. 익산은 문용기와 다수가, 군산에서는 김병수와 관련된 사람들이 삼일만세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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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10.08.04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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