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조해영가옥
함라면 함열리 473번지와 474번지 일대에 오래된 구한옥 1곽이 있는데, 이는 조해영가옥으로 1986년 9월 8일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하였다. 현재 이 주택의 소유주는 조해영의 막내아들 조인호이다. 조해영(趙海英) 가옥은 상량문에 따라 1918년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집은 한때 만석꾼의 집답게 ‘열두 대문집’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건물과 문이 있었다. 바로 앞에서 1917년에 이배원가옥이 지어진 것을 보면, 아마도 상당부분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조해영의 동생 조교영씨를 통해 확인된 내용으로는 건물은 이보다 훨씬 전부터 짓기 시작하였으니 이배원가옥을 모방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고조부는 동쪽채를, 증조부는 큰방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채와 양옥채는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새방채와 신당, 농장채는 조해영의 아버지가 지었다고 하니 시간대적으로 보아 이배원가옥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또 안채와 양옥채는 당시 궁궐을 짓던 당대 최고의 목수가 3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말에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상량문은 마지막 건물에 올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해영은 임천 조씨로 고조부 조한기(1903년 사망)에 이르러 3만석 거부(巨富)가 되었고, 증조부인 조준식(1926년 사망)은 구한말 중추원의관 벼슬을 했다. 장자인 조해영은 아버지 조용규(1882~1953)로부터 1만석지기를 상속받았다. 조해영가는 각종 가마를 보관하던 가마곳간이 따로 있었고, 매사냥을 하기위해 사람을 고용할 정도로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조해영도 5연발총을 가지고 사냥을 다녔으며,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의 규모가 100여 평에 달했다고 한다. 본시 12채의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본채, 새방채, 농장채, 소슬대문, 행랑채로 나머지 7채는 헐려서 자취를 감췄다. 해방 후 농지개혁으로 부의 편중을 견제 받았으나 정부의 정책에 적극 호응하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식솔들의 생계 때문에 건물을 분할매각하였다고 한다. 당시 논은 1백50만평, 대지 4천 평, 90칸짜리 저택에 살던 조해영일가는 40명이었고, 하인 10명을 합하면 모두 50명이 넘는 대가족이었다. 또한 소작인만도 7백여 명에 달하여 소작료 수입으로 쌀1만가마를 받는 이른바 만석지기 부호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건물이나 채권보다 더 귀한 것이 바로 식량이었으니 이들을 모두 헐값에 팔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해영가는 종가(宗家)에서 소유하던 농지개혁대상외의 토지 임야2만여 평만을 남기고 많은 재산을 잃고 말았다. 각 건물들은 담장과 부속사들로 구획되어 각각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본래의 대문 위치는 지금의 반대편에 있었다고 하며 최근에 복원하였다. 현재의 안채는 변형된 것으로 상량문에는 ‘대정(大正) 7년’ 1918년이라고 쓰여 있다. 전반적인 보존 상태는 불량하며, 편의로 통하는 대문을 문짝도 없이 드나들고 있다. 가옥의 정원 한 켠에서는 후손이 새로운 집을 짓고 생활하고 있음으로 일반인들의 방문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에 누(樓)마루가 더해진 乙자형이다. 장대석(長大石)으로 기단(基壇)을 쌓고 방주(方柱)를 세웠고, 도리밑에 작은 방형목을 받쳐서 장식한 소로수장(小?修粧)집을 꾸몄다. 방과 대청으로 칸들이 나뉘어있고, 각 실들은 툇마루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다. 평면 양쪽에는 넓은 대청이 있고, 동쪽으로 두 칸의 누마루가 돌출되어 있다. 사랑채는 평면의 구성과 구조에서 주거의 근대성을 볼 수 있다. 각 실은 모두 복도의 성격을 띠고 있는 툇마루에 의해 연결되며 마루 밑은 붉은 벽돌로 고막이를 하였다. 또한 주간(株間)의 치수를 일정하게 하여 계획의 합리성을 도모하였다. 서쪽 툇마루에 부설된 포치는 비를 피하면서도 3면이 트여있어 통풍이 좋고 넓은 경관을 볼 수 있는 전실(前室)로 근대한옥에서 보이는 새로운 경향이다. 부속채는 대청과 방, 광으로 이루어진 고패집이다. 회첨부(會?部)에 부엌이 있으며, 부엌의 안에 부엌방과 고방을 만들었다. 또한 부엌의 상부에는 다락을 설치하였다. 후원의 별채는 완전한 일식 2층 건물이다. 외관은 정면 4칸에 측면 2칸 크기이다. 내부는 외부 기둥 열과 관계없이 두리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방을 한 칸씩 구획하고, 주위에 툇마루가 돌려있는 평면 형태이다. 방과 마루방 주위는 미서기문을 설치하여 내외진을 구성하였고, 툇마루 주위도 마루 끝에 미서기문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주된 방을 중심으로 둘러싸는 일본식 건축의 양상이다. 지붕도 내진(內陣)의 지붕을 외진(外陣)보다 한 단 높게 하여 2중의 우진각 지붕을 함으로써 완전한 일식 건축법을 갖추었다. 조해영(趙海英)은 도의원을 지냈고, 선친 조용규(趙容奎, 1882~1953)는 참봉을 직수받았다. 증조부 조한기(趙漢箕 1836~1903)가 고종 37년 1900년에 사천군수와 고종 39년 1902년에 정읍군수를 지낸바 있어 현지에서는 조정읍댁으로 통한다. 태인 피향정에는 기근(饑饉)에 사재 500석을 들여 군민을 도왔다는 조한기의 송덕비가 있다. 인근에 이배원가옥과 김안균가옥이 있어 토석담장과 한옥기와지붕 등이 어우러져 전통적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2006년 6월 19일에 ‘익산함라마을 옛 담장’을 등록문화재 제263호로 지정한바 있다. 집의 입구에는 향토유적 제11호인 김육불망비(金堉不忘碑 1580~1658)가 있다. 이 비는 입구의 도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도로에서 정원쪽을 바라보며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집과 불망비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함라마을 옛 담장에서 개천을 따라 길게 늘어선 담장은 바로 이 조해영가옥의 담이다. 물론 이 담은 최근에 다시 쌓은 것이지만, 본 가옥의 규모로 보면 당시에도 그리 어려운 담장은 아니었던 듯하다. 길게 늘어진 담장 내부의 별채는 조해영씨의 아들이 주로 손님접대용으로 사용한 건물로 1937년에 지어졌다. 별채의 마당은 풀이 우거져서 볼품이 없지만, 그래도 옛 정원을 연상해보면 내가 다 흥겨워진다. 아직도 몇 그루의 나무들이 남아있는데, 만약 이런 수목들이 뜰을 가득 메웠다면 정말 멋있는 정원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현재 조해영가옥의 입구에는 바로 옆에 함라마을 옛담장을 알리는 간판석이 있다. 그러나 예전의 본래 입구는 김안균가옥을 바라보는 서북쪽으로 옛 대문을 복원하여 놓은 상태이지만 그곳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아도 누구든지 들어오라고 열어놓았다. 매번 건물의 앞모습만 보아왔는데 이번에는 뒷모습까지도 훑어보았다. 뒤로 난 북쪽의 현관은 돌출된 모양이며, 별도의 작은 지붕을 두어 호화스럽기까지 하다. 이 현관은 원래의 대문을 바라보면서 서북향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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