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72. 남궁찬묘석상

꿈꾸는 세상살이 2011. 5. 4. 20:29

72. 남궁찬묘석상

 
묘는 다른 사람들의 묘와 다를 바가 없다. 보통은 석등이 옆에 비껴서 있으나 조금은 투박하다 싶을 석등이 바로 앞 그것도 중앙에 서있어 답답하기는 하지만 시중을 드는 느낌이 든다.

성당면 갈산리 산70번지의 함열남궁씨종회 소유 석인상(石人像) 2기로 함라산 북쪽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1999년 11월 20일 지정된 시도유형문화재 제176호이다. 지방도 711번 도로에서 성당중학교 입구로 내려와, 개울 건너의 장전마을 표지석을 보고 개울가 좌측길로 들어서면 된다.

남궁찬(南宮璨) 묘는 산을 향하면서 개울 우측의 야산능선에 있으며, 묘지입구에는 최근에 만든 묘비명석(墓碑銘石)과 신도비가 있다. 또 커다란 배롱나무 곁에서는 오래된 정려각이 세월을 견디다 못해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이는 남궁관효자정려각으로 정면1칸 측면1칸으로 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남궁관(南宮寬)은 남궁찬의 후손으로 남궁순(南宮淳)의 아들이다. 정려각은 생가에 세웠었지만 생가가 매각되면서 1980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였다. 비신은 높이 1.2m, 폭30cm, 두께 12cm 이다. 옆에는 제실도 갖추고 있다.

남궁찬묘에서 보면 좌측의 소나무숲을 지나 논으로 연결된다. 물론 이 논이 넓은 평야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바로 건너에 다시 낮은 야산들이 이어진다. 전형적인 농산촌의 모습이다. 이 묘의 전면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석인상으로 큰 머리와 툭 튀어나온 눈, 코, 옷의 형태 등이 기존에 우리가 보아온 문인석상(文人石像)이나 무인석상(武人石像)과 다른 특이한 형태를 보여 이국적인 정취를 풍긴다. 어찌보면 허리굽힌 돌하르방과도 닮은 점이 있다.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당시 남궁 찬의 이름은 중국의 명나라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남궁 찬이 죽은 후 명나라 조정에서 묘 앞에 장식용으로 세우는 인문석상을 조각한 석물을 보냈는데, 오는 도중에 그 배가 풍랑을 만아 침몰되고 말았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며칠이나 지난 후에 석물(石物)을 실은 배가 묘소부근의 바닷가에 닿았다. 이런 이야기는 석인상이 중국의 인문석과 비슷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장군석(將軍石) 역시 호남지방의 돌장승이나 제주지방의 돌하루방과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좌우 석상의 규모는 좌측상 높이 250cm, 우측상 높이 260cm, 머리의 높이는 65㎝와 70㎝, 어깨 폭은 모두 81㎝로 거의 같은 크기이다.

석상 2구의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없으나, 묘의 설치와 비슷한 조선 중종 대(代)인 16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문인석으로 세웠다고 판단되나, 석상 자체의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양식에 있어서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조각수법도 뛰어나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다.

이 석상은 묘 앞의 석등과 함께 화강암으로 설치되어있으며, 남쪽과 북쪽으로 떨어져 놓여있다. 묘의 보호석은 화강암으로 둥근모양을 내기 위한 10각이나 12각이 아닌 4각형을 이루며 둘려있다. 석상은 몸체에 비해 비교적 머리가 큰 편이나 각이 졌고, 좌우에 연주장식이 붙은 모자를 착용하였다. 툭 튀어나온 눈과 두툼한 코, 앞으로 내민 턱은 여타 석상과 다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옷은 얇게 양각하였는데 마치 도포를 걸친 것과 같으며 2조의 허리띠를 매어 늘어뜨렸고, 양 손은 소맷자락 속에 넣어 배에 대고 있다. 묘소에는 바로 옆에 묘비도 있다.

우리나라의 석상(石像) 중 부처나 보살이 아닌 기타 석상으로 문화재에 등록된 석상은 남궁찬묘 석상 외에도 보물 제661호 상주석각천인상, 보물 제1427호 괘릉석상 및 석주일괄, 시도유형문화재 경남 제296호 창녕 대동리금현묘석상, 시도민속자료 제주 제2호 돌하르방, 강원 제4호 태백산장승, 전남 제23호 총지사지석장승, 전남 제24호 법천사석장승, 전남 제25호 무안성남리석장승, 경남 제14호 지리산성모상이 있다. 또 전남 문화재자료 제187호 강진사문안석조상, 경남 문화재자료 제404호 진주검암리운수당하윤묘석상도 있다.

묘앞에 있는 석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 가 없다. 그러나 생긴 모양은 보통의 석등과도 판이하게 다르다. 보통은 땅에 닿는 부분인 지대석이 얇게 깔려있고, 상부로 연결되는 하대석이 지대석보다 조금 두꺼운 정도다. 그런데 여기 석등은 지대석이 아주 커다란 주춧돌모양으로 되어있고, 하대석은 그 위에 조금 모양만 갖추었다. 또 중대석은 기둥과도 같은 것으로 보통 두세 자를 이루나 여기서는 겨우 이름만 있을 뿐 한 자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화사석을 받치는 상대석도 이름만 있는 정도인데 화사석은 지대석고 같은 사각기둥 모양으로 아주 커다랗게 자리한다. 전체적인 느낌은 장구통 모양을 이루나 사각진 모양이 투박하게 보이며 날렵하고 화려한 다른 석상에 비해 무겁고 짧아 보인다. 불을 밝히는 등을 보관하는 화사석의 위는 지붕이나 처마역할을 하는 옥개석이 있으며, 그 위에 첨탑모양을 하는 보주도 있어 일반적인 형식은 갖추어져 있다. 남궁 찬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함열이며 호는 호은(壺隱)이다. 개국원종 궁신(宮臣)이며 충청병사였던 계(啓)의 증손이고, 이조참판 순(順)의 아들이다. 성종 8년인 1472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성종 20년 1489년 대과(大科)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라도와 함경도, 강원도의 관찰사, 제주목사와 부제학을 지냈다.

중종14년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관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용안 호항(壺項)에 유배되어 살면서 스스로 호은(壺隱)이라 칭하였다. 유배가 풀린 후 대제학과 이조판서에 봉해졌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았으며, 관직은 사후(死後)에 추증되었다. 이조판서는 좌참찬, 우참찬과 함께 정2품의 벼슬이며 현직으로 비교하면 장관이나 차관에 해당한다.

호젓한 시골길에다가 아무도 없는 묘역에서 위엄을 갖춘 석인상은 아직도 주변을 감시하고 있는듯했다. 부라린 눈과 8척도 넘는 장신에 커다란 체구는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였다. 당시에 남궁찬의 묘소를 지키는 석인상은 자신을 둘러싼 선산 모두를 지키는 특명을 띠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기에 단 둘이서 여러 사람의 몫을 하려다보니 자연히 거칠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런데 그 기개가 어찌나 용맹스러운지 지금까지도 위엄을 잃지 않고 있는 듯하다. 막 모내기를 끝낸 논에서는 아직 땅맛도 알아채지 못한 모들이 나풀거린다. 바쁘게 모를 때우는 아낙의 손길에 남궁찬묘의 위치를 알려주는 수고를 더할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냥 논을 가로질러 가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니 그곳에 바로 묘역이 있었다. 묘앞 길 건너에는 잘 익은 버찌가 검은 옷을 입고 손님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익다못해 농져 터진 버찌들이다. 어느 누군가의 손이 탓을 법도 하건만 지나는 길손은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바쁜 농번기에 버찌쯤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한입 가득 넣자 시커먼 먹물이 입안에 퍼진다. 이정도 먹물이면 남궁찬은 물론이며 효자 남궁관의 일대기까지 써도 충분할 분량이었다. 그런데 이런 몰골로 남궁찬묘 석상과 효자정려각을 둘러보아도 될는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