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75. 익산향교대성전

꿈꾸는 세상살이 2011. 5. 4. 20:41

75. 익산향교대성전

 
▲ 익산향교대성전 
익산향교의 대성전으로 약 800여 평의 대지에 높이 2.3m의 잡석 축대를 쌓았고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맞배지붕을 하였다. 동무와 서무, 교직사, 동재, 제기고 등을 포함한다. 계단은 대성전 3칸에 맞춰져있고, 계단 하나의 폭도 웅장하여 흡사 궁궐같은 분위기를 전해준다.

익산향교는 금마면 동고도리 389-1번지 금마산 아래 교동마을에 있다. 이 익산향교의 대성전은 1985년 8월 16일 시도유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태조7년 1398년에 창건된 것으로서,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다. 1983년 중수시에 발견된 기록으로 인조 6년 1628년 다시 말하면 숭정 2년 3월에 대성전이 중건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인근의 용안향교가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익산향교도 고려시대에 처음 건립된 것은 아닌지 생각도 들게 한다.

향교정문 앞에는 과거 익산 동헌자리에 있었던 관리들의 공덕비(功德碑)와 선정비(善政卑) 등 비석 17기가 옮겨져 있다. 이들 비석은 마치 도열한 병사와도 같고, 진시황의 병마갱과도 같다. 하나의 향교 앞에 이렇게 많은 비석이 있는 곳도 아마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중 특이한 것은 함열현감의 비석이 4기나 이전되어 있어 정작 함열향교에는 비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종 7년 1870년부터 고종 9년 1872년까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낸 이호준(李鎬俊)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卑)가 있다. 이렇게 많은 비석들이 모여 있는 것은 역시 금마가 가진 익산의 위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옛 마한의 도읍지였으며 백제시대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익산군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친일 매국의 중심이었던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1898년 3월 전라도관찰사에 부임한 적이 있는데, 이때 자신의 양부인 이호준(李鎬俊)의 비석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완용은 죽어서 미륵산자락 북편 낭산에 묻혔었는데, 1979년 증손자 이석형은 이를 파묘하여 화장한 후 뿌렸다고 전한다. 또 명정 대신 직접 관에 글씨를 썼던 뚜껑은 원광대학교박물관에 보관중인 것을 후손들이 찾아다가 불살라버렸다. 그러데 이완용의 묘가 익산에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다른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혹시 이완용 역시 익산인근의 관리를 지냈다든지 하는 연유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본다.

이러한 사실이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향교의 뜰에는 약 4~500년쯤 되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어 금마의 모든 역사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완용의 후손이 13년 동안이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다는 것은 정말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를 사용한 우리정부, 넓게는 우리 국민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하면 다음 후손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하였고, 다른 후손은 국립대학교의 총장을 한다고 하니 좀 심하다는 얘기를 들을 만도 하다. 인물이야 그런 그릇이 되는지는 내 알바가 아니나, 그를 논하기 이전에 해방 후 역적 친일파들이 어떻게 득세를 하였는가가 문제라는 얘기다. 익산향교 대성전에는 중국의 오성(五聖)과 십철(十哲), 육현(六賢)을 배향하고, 동무(東?)와 서무(西?)에는 우리나라의 18현을 양쪽으로 나누어 배향하고 있다. 따라서 년 2회 춘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제(釋奠祭)를 봉행하며, 매월 2회 삭망(朔望) 분향제(焚香祭)를 올리고 있다. 본래 익산 향교에는 상당수의 서적과 문서가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유실되었고,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 50여 점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향교에서 근무하는 교육관은 모두 중앙에서 파견하였다. 이는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강화하고 일사분란한 체제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사용된 것이다. 당시 주된 이론인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충성과 효를 강조하던 부산물이기도 하며, 중앙의 통제에 호응하는 인물을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직접선발하고 양성한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했던 것이다.

향교의 학생수는 행정단위의 크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부나 대도호부, 또는 목에서는 90명, 도호부는 70명, 군에서는 50명, 현에서는 30명으로 제한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13세 이하인 어린이에게는 이 학생수 제한을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한편 향교의 직원으로는 주나 부 그리고 목에서는 교수 1명이, 군이나 현에서는 교수 대신 훈도 1명이 파견되었고 학장과 기타 여러 직원이 있었다. 500호 미만의 작은 고을에서는 학장이 교수나 훈도 등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학장의 일도 보았다. 그리고 이들 직원은 지방의 감찰사가 관리하던 방식이었다. 각 향교에는 교장, 제장, 장의, 색장, 유사, 재임, 교노방자를 두었으니 생각보다 많은 수의 관리자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들 숫자는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줄어들었고, 강점기에는 아주 소수의 인원으로 운영하기도 하였으니, 전체적인 인원 구성을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런 향교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라는 호칭을 받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또한 지방의 향교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되어 중앙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원래 향교가 국가에서 운영하는 방식이었기에 재정도 국가에서 책임지는 것이 통상적으로, 학전(學田) 5∼7결을 지급하면서 수확이나 그 소작료 등으로 비용에 충당케 하였다. 그러나 향교를 운영하기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 일반 백성으로부터 별도징수를 하거나 또는 많은 토지를 운용하면서 얻어지는 수익금으로 지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익산향교 대성전은 약 800여 평의 대지에 높이 2.3m의 잡석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맞배지붕으로 된 겹처마를 이루었다. 양박공머리에는 방풍판도 달았다. 또한 다포집으로 공포의 내외가 모두 1출목(出目)이며, 중앙은 간격이 넓어 공간포(空間包)를 두 개 받쳤다. 외부출목(外部出目)에는 각각 3개씩의 앙설형(仰舌形)의 쇠서(牛舌)가 달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들보에는 측면의 기둥으로 형량(衡樑)을 걸었으며,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되어 있다. 형량 위에는 합각 밑이 가려지도록 자그마한 우물천정을 가설하였다. 이 밖에 동무와 서무는 각각 3칸, 교직사(校直舍) 4칸, 동재(東齋) 3칸, 제기고(祭器庫) 3칸 건물 및 솟을대문인 내외삼문,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다. 명문당의 동쪽 아래에 동재가 있어 양반들의 자제가 기숙하였고, 대성전 아래 서쪽에 서재를 두어 일반서민의 자제들을 기숙시켰다.

대성전의 앞마당에서 올라가는 계단은 3개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들은 대성전 3칸에 맞춰져있다. 축대의 높이가 낮은 것도 아니고, 하나의 계단 폭이 좁은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올려다보는 익산향교대성전은 흡사 궁궐의 우람한 분위기를 전해준다. 그래서일까! 익산향교의 문은 항상 닫혀있어 거리감을 준다.

익산의 서동공원으로 들어서는 진입로와 연계하여 나란히 위치한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 당도하게 되는 곳이다. 입구의 향교가 있음을 알리는 향교안2길이라는 안내판도 있다. 익산향교역시 여타 향교와 마찬가지로 외삼문마저 닫혀있다.

평상시 향교로 통하는 문은 외삼문이 아니라, 옆에 있는 관리사를 통하여 담벽에 작은 문을 내어 통하고 있다. 이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향교를 관리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많고 많은 문화재를 모두 별도의 관리인을 두고 관리할 수는 없겠지만, 필요시 방문하여 감상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 것들 > 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76. 백운사보현전  (0) 2011.05.04
77.수덕정  (0) 2011.05.04
74. 조해영가옥  (0) 2011.05.04
73. 여산동헌의 느티나무  (0) 2011.05.04
72. 남궁찬묘석상  (0) 2011.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