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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환자중심의 병원은 요원한가

꿈꾸는 세상살이 2011. 12. 27. 21:51

뭔가에 얻어맞은 듯 갑자기 어지럽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 비척비척하더니 결국은 쓰러지고 말았다. 게다가 오심까지 있어 죽음으로 가는 길이 이런 것인가 했었다. 한참을 지나니 정신이 들고 안정이 되었기에 대형병원의 외래 접수를 거쳐 2층의 정신과 병동으로 갔다. 그러나 진료는 11시나 되어야 가능하다는 말에 외래접수를 취소하고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 직원도 아주 잘 왔다며 그렇게 빨리 와야만 후유증을 줄일 수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네 번째 설명을 하는데 혹시나 보이는 증상을 포착이라도 하려는 듯 열심히 듣고 있었다. 노련한 간호사는 팔목에 굵은 바늘을 꽂고 커다란 수액 비닐 팩과 연결하는데, 그러는 와중에 채혈을 하고 체온과 혈압도 측정하였다. 손끝으로 살펴보는 근육운동, 눈으로 측정하는 좌우 공간개념, 중심을 잡는 똑바로 걷기, ET와 인사나누기도 빼놓지 않았다. 이어지는 CT 촬영, X레이 촬영, 심전도 검사까지 모두 마쳐도 10시 30분이 채 안되었다. 사실 환자는 아프기만 할 뿐인데,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주는 병원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는 다 마쳤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었다. 궁금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응급실 벽에서만 70명의 직원 사진이 붙어있다. 얼마 후에 응급실의 팀장인 듯한 의사선생님이 뇌에는 이상이 없고, 출혈의 흔적도 없으며 심장에도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간혹 부교감신경계의 작용으로 그런 현상이 있을 수 있단다. 그러면 지금 퇴원해도 되느냐고 물으니 그것은 담당 선생님의 사진 판독 후에 결정하자고 하였다.
 점심시간도 지났다. 그러나 응급실 환자들은 아무것도 먹지 말고 심지어 물도 마셔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아까는 점심을 같이 하자는 전화도 왔었고, 오후 들어서는 회사에 급한 일이 있다는 연락도 왔다. 생각 같아서는 아파도 내가 아플 것이니 그냥 퇴원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테네의 병사가 승전보를 가져다주길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지루한 일이고, 그것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를 따라온 보호자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쓴지 오래다. 이제는 생사람이 환자 되기에 충분하였다.
오후 4시가 지나자 아무리 늦어도 퇴근 전에는 끝날 것이라는 생각에 포기가 되었다. 안 아픈 내가 참기로 한 것이다.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아무 이상이 없으니 퇴원시켜 드리겠다는 연락이 왔다. 담당 선생님이 사진을 보시고 그런 결론을 내리셨단다.
 이제 가도 좋다는 말을 듣는 순간 속이 메스꺼워졌다. 정작 나는 그분의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상담 한 번 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분의 잘 가라는 인사를 받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싶었다. 만약 응급실의 사진판독이 잘못되었고, 정신과의 판독 중 이상이 있다고 한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나는 증상 후 세 시간 이내에 왔는데, 병원에서는 11시간 후에 처치되는 것이니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그러나 나는 내 할 도리가 있어 간호사실을 찾아갔다. 그들은 나 같은 환자 때문에 존재하지만, 오히려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하였다. 그리고 말을 예쁘고 부드럽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환자중심의 병원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하면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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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1 게재

출처 : 한국문예연구문학회
글쓴이 : 창암( 한호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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