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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을 멸하다.

꿈꾸는 세상살이 2012. 9. 12. 07:44

삼족을 멸하다.


우리나라 중세와 근세에는 삼족(三族)을 멸(滅)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때의 삼족이란 부계(父系)와 모계(母系) 그리고 처계(妻系)이며, 이들의 친척들이 모두 멸망하는 형벌이다. 이런 형벌을 받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중차대한 죄를 범했던 사람들일까.

이들은 대체로 왕권을 넘보는 자이거나 나라를 뒤바꿀 음모를 꾸민 역도들로 당대의 권력자 입장에서는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리하여 훗날 원수를 갚으려 하는 자가 없게 하며, 행여라도 연루자가 있다면 모두 없앤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물론 타인에 대한 본보기가 되는 엄한 처형을 하였던 것이다. 

원래 삼족은 삼대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교통이 편리하여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식견이 넓어진 근세에 와서는 3가문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야 완전히 제거하는 발본색원(拔本塞源)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친족의 4대와 외족의 3대, 처족의 2대를 합하여 구족(九族)이라 부르며, 구족을 멸하는 형벌을 가했던 때도 있었다. 이들의 죄는 역시 역모였다. 나아가 중국에서는 선후배와 친구, 문하생까지를 포함하여 10족이라는 명목을 걸어 멸하는 형벌을 시행한 적도 있었다.


지금 우리 시대에 삼족을 멸하는 극악무도한 형벌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을까.

요즘 고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아들이 부친에 대한 의문사는 실족사가 아닌 타살일 가능성이 짙다고 말한 것이 이슈가 되고 있다. 시신을 수습했던 사람도 타살의 가능성을 지목하였으며, 증거로 제시된 사진은 누가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혹간에서는 정치적인 이용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반대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부친을 떠나보낸 자식의 심정은 어떠할 것인지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 아들이 정확한 진상을 알고 싶다는데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여기서 덧붙일 것은 본인인 장호권씨가 아직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려면 방해가 들어오고 취직을 하면 어김없이 해고되는 과정을 반복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극악한 형벌은 없을 것이라는 우리의 상상을 깨고, 지금도 그에 버금가는 형벌이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1살 많았던 박정희와 반대의 삶을 살아온 장준하선생은 어떤 죄를 범해서 이토록 잔인한 형벌을 받게 되었을까. 장준하는 기독교인으로 1918년에 태어난 정치가이며 언론가였다. 또 사상계를 펴낸 사상가로도 유명하다. 1944년 6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배치되었다가 곧 탈영하였으며, 1945년 1월 광복군 대위가 되었다. 1945년 8월 미육군 군사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다가 8·15해방을 맞이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행원, 김구 비서, 53년 4월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여 자유, 민주, 통일, 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상 수상, 1967년 4월 국가원수모독죄로 3개월간 투옥되었으며 그해 6월 옥중출마로 국회의원 당선,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협심증에 의한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해 다시 박정희정권과 맞섰고, 민주회복을 위한 범민주세력의 단합 촉구, 재야세력의 확고한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우리는 장준하선생의 아들 장호권씨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봉건독재의 삼족을 멸하는 형이 지금도 집행되고 있다는 말이 되며, 그의 말이 거짓이라면독립유공자의 가족에 대한 예우가 부족하다는 결론에 닿는다. 그렇다면 어느 누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고초를 당할 것이며, 자손 대대로 고생할 것을 알면서 희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럼, 긴급조치 1호는 무엇일까.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1974년에 내린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부정ㆍ반대ㆍ왜곡ㆍ비방하는 일체의 행위, 유신헌법의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사람과 긴급조치를 비방한 사람은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으로, 장준하와 백기완을 잡아들이기 위한 특별법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유신정권에 반하여 어떤 의견도 개진하지 말라는 것,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독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말하면 한 것도 안 한 것이 되는 세상, 말로만 뼈저리게 느끼고 실행이 없는 세상, 동생이 아니라고 말했다면 그 말이 정답이라는 세상, 정의와 자유를 말하면 반대파로 몰아가는 세상, 의견이 다르면 반역자라는 세상,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면 빨갱이로 몰아가는 세상, 야당 입장에서는 안 한 것도 한 것이 되는 세상이다. 그럼 이런 것들을 위반하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죽음뿐이다. 지금 우리는 긴급조치 1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항상 약자에게만 존재하는 긴급조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