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금강에 배 띄우면 세월을 낚을 수 있을까

꿈꾸는 세상살이 2013. 11. 12. 10:11

금강에 배 띄우면 세월을 낚을 수 있을까

 

우리 익산을 포근히 둘러싸고 앉은 산이 함라산이며, 그 병풍의 중심에 점을 찍으면 미륵산이 된다. 그러기에 함라산과 미륵산을 빼고는 익산을 말할 수 없다. 그런 함라산의 북쪽에 금강이 흘러 다가오는 무리들을 막아주는 천연 방패막이가 되었다.

그런데 금강은, 그 이름도 아름다운 비단강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천년고도 익산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혹시 금강에서 타임캡슐이라도 낚을 수만 있다면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세월을 거꾸로 돌려 타고 낚싯줄을 던져보자. 혹시 천년 묵은 책사, 거북이가 걸리기를 희망하면서...

시내에서 금강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레가 있다. 함라를 거쳐 웅포로 가는 길이 있으며, 함열을 거쳐 성당이나 용안으로 가는 길도 있다. 그런가하면 망성에서 강경으로 찾아가는 수도 있다. 그 중 함라면사무소를 감싸고 있는 함라산에 오르면 웅포와 금강이 내려다보인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잔잔한 물결 속에서 어쩌다 한 번씩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지상낙원 익산으로 가자! 어서 저 강을 건너 풍요로운 땅으로 가자!’

옛 부족국가의 수장이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척박한 토양과 추위를 피해 남하하여 찾다가 찾다가 정착한 곳이 이곳 익산 아니었던가. 그리고는 새로운 부족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지켜보고 있었을 곳이 바로 함라산이다.

웅포의 입점리고분전시관(웅포면 입점리 산174번지)은 둘레길의 하나인 역사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예전 부족국가의 수장들이 모여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수습되어 보관중인 유물들을 살펴보면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수학여행에서 보고 신기해하던 금동제 신발이나 관모, 기타 왕가에서 사용하던 장신구가 이곳에서 발굴되었으니, 연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옛적에 이곳이 한 국가의 왕이 살았던 곳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천년 고도 익산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공식적인 해석을 보면 입점리고분은 5세기 백제 귀족의 무덤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당시 백제의 귀족은 복속되기 전 마한시대의 왕족들이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의 입점리 귀족들을 마한의 왕족과 겹쳐서 바라보며 동일선상에서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그러나 아무리 궁금하다 한들 왕이 묻힌 무덤에 들어가 물어볼 수는 없으니, 왕이 머물던 성터에 가서 물어보면 역사의 한 조각이라도 알려줄지 일말의 기대감이 돈다. 전시관의 남서쪽 금강변을 바라보는 곳에 어래산이 있다. 높이야 겨우 170미터에 불과하지만, 구릉에서 금강을 바라보며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기에는 충분한 산이다. 임금님이 왔었다는 어래산의 동쪽은 칠목재와 닿아있어, 웅포와 함라에 걸쳐 솟아난 산이다.

비록 완벽한 상세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옛 마한시절에 익산은 건마국, 여래비리국, 아림국, 불사분야국 등 작은 부족국가가 있었던 곳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들 중 어떤 임금이 어래산에서 금강을 굽어보며 호령하였을지는 알지 못한다. 한편, 인근에 여러 산성이 있어 이와 같이 백제시대에 축조된 토성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한때는 웅장하였을 어래산성(웅포면 입점리 산 136-1)도 긴 세월 속에 몸을 맡겼으니, 이제는 겨우 흔적을 찾아 더듬어 볼뿐이다. 요즘 같았으면 쓸고 닦고 임금님 맞을 준비를 하였겠지만, 당시의 토성을 싸리비로 쓸고 걸레로 닦을 수는 없었을 것이니 아마도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떨어져나간 토벽을 덧바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내가 어래산성(御來山城)에 서서 금강을 내려다본다. 부릅뜬 눈은 보다 많을 곳을 보기 위하여 한껏 힘을 주니 핏발이 서고, 두 귀는 소리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쫑긋거리니 당나귀 귀가 된다. 그 때의 임금님은 침입자를 감시하기 위하여 물소리 바람소리를 비집고 넘나드는 시선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나무와 구름 속에 묻혀 흩어지는 소리를 듣기 위하여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들릴듯 말듯 바람소리에 묻어오는 사연을 꿰어보니 한 줌의 보배가 되었다. 입점리고분은 이 어래산의 북쪽에 있다. 즉 금강변을 비스듬히 사이에 두고 있는 무덤들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영혼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백제 멸망의 한을 품은 영혼들이 엉겨 붙어 부여의 고란초가 되었다면, 그 이전에 있었던 마한의 영혼들이 모여 성당포구의 고란초가 되었을 것이다.

그냥 갖다 붙인 이야기이지만 살아생전 죽어 사후에도 백성을 위하는 고귀한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혼자만 편하게 잘 살자는 위치에 궁터를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궁동(宮洞)마을 역시 어래산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신할 수 있다. 문득 요즘의 정치인들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한 나라의 지도자들은 올바른 지도자의 덕목을 갖추기 위하여 이곳 어래산성에 와서 교육을 받아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본분을 시행하기 전에 익산에 와서 교육연수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익산이 예전부터 충절과 효의 고장이라는 말도 그냥 지어낸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래산의 위민의식(爲民意識)을 증명하는 곳은 따로 있으니, 금마면 신용리 구룡마을 임553-1번지 일대의 대나무숲이 그곳이다. 구룡마을의 대나무숲은 전체면적이 약 5만 제곱미터 규모로 남한지역에서 가장 넓은 대나무군락지로 알려져 있다. 원래 대나무가 따뜻한 곳에서 잘 자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북한에서는 거의 기대할 수 없으므로, 우리나라 최대의 군락지라고 할 수 있다. 자연스런 대숲 덕분에 요즘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입점리고분의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깟 영화촬영쯤은 별 것도 아니다. 한여름 모두가 뜨거운 햇볕을 피해 숨어들면 나타나는 소리가 있으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는 말이다.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목이 쉬도록 외쳐댔으니 이제는 지칠 만도 하겠지만 아직도 쉼 없이 들려오는 소리다. 다만 천년의 세월 속에 기가 쇠하였는지 주의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정도가 되고 말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 사각거리는 소리에 몸을 숨기고 누군가가 찾아오면 드러내는 소리가 되었다.

압록강 이북에 있었던 고조선의 준왕(準王)은 선대(先代)왕인 ‘부(否)’의 뒤를 이은 마지막 왕으로, 위만에게 패하여 한족(韓族)의 땅을 찾아 익산에 정착하였다. 이에 앞서 중국의 진(秦)이 망하면서 한(漢)이 통일을 하였으며, 한은 포로로 얽매인 노관(虜綰)을 속국 연(燕)나라의 왕으로 책봉하였다, 얼마 후 노관이 흉노에게 망명하자, 그의 부하인 위만(衛滿)은 고조선에 와서 살기를 간청하였다. 준왕이 이를 가엽게 여겨 허락하였으나, 내부 세력을 키운 위만이 훗날 고조선을 침략하고 만다.

유추해보면 위만의 나이로 따져 고조선에 온 때가 기원전 207년경부터 150년경 사이이다. 이후 약 10년 동안 세력을 키운 시기로 보면, 준왕이 남하한 시기는 기원전 190년경부터 140년 정도로 역산할 수 있다.

여기서 알아둘 것은 한의 통일이 기원전 206년이며, 준왕이 고조선에 남겨두고 온 자손들은 한(韓)씨 성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비롯한 역사의 정사(正史)에 속하며, 기원후 3세기에 후손이 끊어졌다고 전한다. 지금 따져보아도 후손이 끊어지려면 최소한 100년 이상 200년은 걸리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기원전 200년에서 150년 사이에 준왕이 머물었던 거처는 어디였을까. 준왕의 아들 태(胎)가 묻혔다는 삼기면의 태봉산 근처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마한성의 부근인 낭산 혹은 기준성의 부근인 금마였을 수도 있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입점리 어래산의 주인공은 아니었을까.

어래산은 임금이 왔다는 산이며, 여기에 있는 산성이 어래산성이다. 요즘 해석으로 보아도 임금이 자기 국토의 변방을 방문하면 임금이 왔다는 표현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같은 뜻일 수도 있겠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임금이 왔다는 것과 임금이 방문하였다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낭산면의 낭산산성(郎山山城)을 마한성(馬韓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비록 토성이기는 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가 아닌 마한 시대에 축조된 성이라는 뜻이다. 저지(低地)에는 기자조선의 기준왕이 노닐던 곳이라는 석천대도 있어 부연설명이 가능하다. 또한 미륵산의 정상에 있는 기준성은 고조선의 준왕이 남하하여 세웠다는 석성(石城)이다. 우리가 말하는 백제의 건국이 기원전 18년이므로 위와 같은 내용을 종합해보면 그보다 훨씬 이전의 것들로 해석할 수 있다.

어래산성과 기준성, 그리고 마한성과 태봉산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익산의 역사다. 비록 세인(世人)의 발자국에 묻혀버린 역사일지라도, 혹은 안타까운 현실이더라도 조상의 숨결이다. 역사길을 걸으면서 명상에 잠기면 혹시 그 때의 임금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따뜻한 이 봄 금강에 낚싯대 드리우면 대(代) 끊긴 우어가 준왕의 후손인 양 소식 전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