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권세
우리나라 인구는 2011년 말 기준 대략 49,779천 명이다. 이중에서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서울은 10,026천명이며, 여기에 경기 11,788천명과 인천 2,750천명을 합치면 24,564천명이 된다. 이 숫자는 인구대비 약 49.35%로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경인지역에 모여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수도권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숫자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온 현상이다.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가진 지역은 영남권으로 2007년 12,861천명에 26.46%였다가 2011년 12,916천명에 25.95%를 차지하고 있다. 이 숫자 역시 전체 인구의 약 1/4을 점유하는 비율이다.
그러면 이에 비교되는 호남권은 어떤가. 2007년 5,052천명에 10.40%, 2011년 5,080천명에 10.21%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숫자는 약 10% 수준으로 어떤 일을 다수결에 의해 결정하는 데는 그다지 큰 변수로 작용하지 못하는 정도이다. 따라서 수도권 인구 약 2,500만 명의 구성을 경인지역과 영남, 그리고 호남권의 성향 비율이 고르다고 가정한다면, 모든 일은 다수를 점하는 영남의 의견으로 결정지어진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이때 변수로 등장하는 것이 충청권인데 2011년 5,170천명에 10.39%이 호남권 성향과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21%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충청에 호남이 더해지더라도 영남에 비해서는 약 267만 명이 모자란다는 계산이다. 여기에 2011년 강원의 인구 1,496천명을 보태더라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사안에 대하여 영남과 호남의 대결로 몰아가는 경향이 많은데,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영남권이 출발선부터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시작한다는 말이 된다. 가장 기본적인 교통인프라를 포함하여 먹고 살아갈 생계수단의 일자리가 그렇다. 먹고 사는 것을 떠나서 관광서비스까지도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치는 실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결정의 편중을 초래한다. 인구가 많으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있겠으나,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다수의 의견으로만 결정하여 가져오는 폐해가 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이지만 다수의 횡포로 소수가 죽는 다는 말도 생겨나지 않았던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남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며, 호남권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생각하여 결정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물론 사람은 아전인수식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판단을 하겠지만, 그래도 대의를 생각하고 민의를 헤아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만약 내 집 앞에 저수지를 판다면 그 공사를 하는 동안은 일자리가 생겨서 먹고 살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공사를 끝내고 나면 짙은 안개로 인한 건강상의 문제를 들어 다시 메워야 한다면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 이때도 다시 메우는 공사로 인하여 벌어먹고 살 수 있다고 하여 환영할 일일까. 따라서 우리가 결정하는 모든 것은 국가적으로 혹은 범국민적으로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비록 나에게 조금은 이익이 덜 오더라도 기본적인 조치가 이루어진다면 나머지는 대승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 지도자의 덕목이다.
그러나 작금의 실태는 그렇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본류는 홍수의 위험성이 전혀 없어 필요치 않는 4대강 사업이 그렇고 현재의 공항만으로도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신공항을 추진한다는 것이 그렇다. 국가의 영공을 통제하는 비행기의 안전을 위하여 최고 높이를 제한한 건축물에 대하여 비행기가 돌아가면 된다며 고도제한을 풀어주는 것은 어떤가. 또 장관까지 나서서 토지주택공사의 토지부문과 주택부문은 처음 계획대로 분산배치를 원칙으로 한다고 천명하다가 나중에는 슬그머니 경남으로 일괄배치를 하는 것 등도 마찬가지다. 이때 국가의 지도자를 믿고 처분만 바라던 국민들은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은 해봤는가.
모든 선출직은 확연하게 검증되지 않은 이상 학연과 지연 그리고 혈연을 포함하여 결정되어 지게 마련이다. 누구는 이런 현상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결정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자기 지역을 위하여 자기와 연관된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울여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치는 판단을 막기 위하여 균형잡힌 구조를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수도권 발전규제를 통해 지역발전을 꾀하고, 집중배치보다는 분산배치를 하는 것들이 그런 맥락이다. 그런가 하면 국회의원 분포를 고르게 하는 것과, 의견을 결정하는 고위직 공무원의 출신을 고르게 하는 것도 그렇다. 각 지역을 잇는 교통망도 그렇고, 새로운 사업의 투자처도 그렇다.
가진 자가 독식하기 위하여 ‘우리가 남이가’ 하고 선동할 때 가진 것도 없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1961년부터 1998년까지 같은 당의 영남권인사가 국가지도자로 있었다가 김대중과 노무현시절에 바뀐 10년 정권을 두고 잃어버린 10년 운운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38년을 군림하다가 놓쳐버린 겨우 10년을 잃어버린 기간이라고 말하였다. 아직도 지금도 더 오랫동안 계속하여 집권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아깝게 잃어버렸다는 인식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소아병적 근시안에 틀림없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회사의 경영이 어려워도 빚을 내어 잘 먹고 살았지만, 아버지가 화병으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빚잔치를 한 후 내핍생활을 하자는 어머니를 욕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이 집안이 다시 일어서려면 고통이 따르고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보다 어머니는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판단을 하지 않고 미시적인 결과만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정확한 판단을 위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이분법의 논리만 펴는 사고가 의심스럽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아끼던 물건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면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잃어버린 연필, 잃어버린 신발주머니 등이 그런 예이다. 그러면 국가의 흥망을 결정하는 정권은 어떤가, 국가의 안위는 어느 개인이 가지고 있다가 싫증나면 넘겨주고 호기심이 생기면 다시 찾아오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최소한 옛 부족국가나 씨족국가가 아니라면 말이다. 더 양보를 하여 왕조만 아니어도 그렇다. 물론 현재라 하더라도 필리핀, 쿠바와 북한, 이집트 등 장기 집권 독재국가에 해당하는 일인데, 만약 우리도 그런 나라의 대열에 서고 싶다면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현상을 타파하기 위하여 들고 일어나서 똘똘 뭉쳐 나가자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가 국가의 지도자가 되더라도 국민과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의 아전인수보다는 전체적으로 보고 옳고 그름을 따져 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이익보다 해야 될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는 동화하나가 생각난다. 승객을 가득 태운 버스 운전자가 내리막길을 달리던 중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을 알았다. 그는 승객들을 향하여 안전에 유의하라고 말한 뒤 길을 건너던 아이를 치고 말았다. 승객들은 버스 기사가 경적을 울리며 핸들을 조금만 틀었더라면 사람을 쳐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죽은 아이는 버스 기사의 청각장애 아들이었으며, 경적을 울렸더라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리막길에서 탄력을 받은 버스의 방향을 트는 것은 모든 승객에게 위험을 안겨 준다는 것을 직감한 버스기사의 판단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가르치면서 정작 어른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아무리 좁은 식견으로 생각해도 단순히 5년 혹은 10년의 권세가 내 손에서 떠났다고 하여 애통해할 일은 아닌 것이다. 자칫하면 잃어버린 5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50년 아니 500년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혹여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싹이 뭉게지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짧은 순간에 내 아들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많은 승객들을 살릴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국가의 지도자라면 그의 판단에 따라 국민과 국가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선출하는 혜안도 있어야 한다.
'내 것들 > 산문, 수필,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투표가 가지는 의미 (0) | 2014.09.15 |
---|---|
득(得)과 실(失)의 허상 (0) | 2014.09.15 |
익산아리랑 (0) | 2014.02.28 |
전북출신 인사의 등용은 필요악인가 (0) | 2013.11.12 |
자긍심보다 더 중요한 것 (0) | 2013.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