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
추운 겨울을 알리는 12월의 첫 날에 멕시코의 개 이야기가 나왔다. 길을 걷던 두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차에 치여 죽었다. 누렁이는 흰둥이를 보고 빨리 일어나라고 달래다가, 이내 움직이지 않자 질질 끌어서 길 가에 옮겨놓았다. 그리고는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를 도와주려 하였으나, 이미 흰둥이는 죽은 상태라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하였다.
하찮은 미물이라 여기던 개가 동료의 죽음을 두고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면, 인간으로서 배울 점이 있다. 코끼리가 가족에 대한 소속감이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코끼리 역시 강한 연민의 정을 느낀다. 아마도 감성이 풍부한 개체일수록 더욱 그런 현상이 강하게 나타날 것이다.
자타가 어리석다고 인정하는 새들에게서도 이런 현상을 접할 수 있다. 길가에서 먹이를 먹던 참새가 차에 치여 죽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료가 어서 가자고 조르는 모습이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죽은 새가 움직이지 않자 옆에 서서 기다렸고, 사람이 다가가면 잠시 자리를 떠났다가 다시 날아와서 동료를 지키는 모습이 소개된 것이다.
내가 키우는 닭에서도 그런 경험이 있다. 장닭은 덩치도 크고 쫄깃한 맛도 있어 암수의 비율을 고려하지 않고 임의로 입식하였다. 그러자 수탉끼리 싸우며 쫓고 쫓기는 광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성장하였기에 수탉의 수를 줄이기로 하였다. 울타리를 쳤다고는 하지만 넓은 동산에서 놀던 닭이라서 그런지 글자 그대로 날쌘돌이였다.
어렵사리 수탉 한 마리를 잡았을 때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복병을 만났다. 지금까지 서로 싸우고 감시하던 수탉들이 나에게 덤벼든 것이다. 날개를 펴서 한껏 덩치를 키운 후 꼬꼬꼬꼬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모습은 마치 풀밭에서 일어나는 작은 쓰나미와도 같았다. 내가 닭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은 확신하였지만, 만약 저 부리에 찍히면 아마도 큰 상처가 날 것이라는 공포가 순간적으로 엄습하였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를 휘두르고 쫓아가는 시늉을 하며 발을 힘차게 굴렀다. 그러자 내 기세에 눌린 수탉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이내 흩어지고 말았다.
만나기만 하면 쪼아대며 싸우던 닭들도 친구가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되면 분연히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벼슬이 오똑하니 잘 생긴 저 닭은 우정을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디서 배운 것일까. 알에서 부화하자마자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우리 집에 온 녀석들이니 자상하신 부모님한테서 배운 것도 아니며 훌륭하신 선생님한테서 배운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닭이란 존재가 성선설을 타고 나는 것일까. 그러면 지금까지 홰를 치고 쪼아대며 싸우던 모습은 왜였을까.
만약에 저 닭들이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고전이나 인문학을 배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최소한 위인전이라도 몇 권 읽었다면 어떤 닭이 되었을까.
우리는 사랑의 부모님과 훌륭한 선생님, 그리고 원로와 같은 선각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의 불행을 안타까워하기 보다는, 친구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등식을 만들어가고 있다. 어차피 먹어야 할 몫이 한정되었다면, 네가 아닌 내가 먹어야 한다는 논리를 당연시하고 있다. 우리의 목표가 정해졌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리와 도덕이 있는 것이다. 개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사람답게 사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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