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은 칼보다 강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이는 서양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로 언론의 힘이 무력보다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우리나라 말로 바꾸면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억압으로 물리적인 육체는 강요할 수 있으나 사상적인 영혼을 지배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거 우리가 겪었던 일을 돌아보면 무력 앞에 굴복하지 않은 언론이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다보면 언젠가는 언론 역시 무력에 굴복하고 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물론 이 속담은 나이가 들면 건장하던 육체도 결국에는 시들어진다는 표현이지만, 많은 세월을 인고로 버티다 보면 한계에 다다라서 본의 아니게 굴종하게 된다는 것을 비유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면 그렇게 굴종한 언론은 좋다는 말인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언론은 역시 언론다워야 하고, 고발자는 역시 고발자다워야 하는 것이다.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무력에 굴종한 후 석방되어서 한 말은‘그래도 지구는 돈다.’였다. 이런 경우 실망한 나머지 붓을 꺾었다든가 그런 꼴을 보지 않으려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는 다는 뜻으로 절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것 역시 옳은 방법은 아닌 것이다.
논어 아홉 번 째인「자한(子罕)」편에‘삼군 가탈수야 필부 불가탈지야(三軍 可奪帥也 匹夫 不可奪志也)’라는 말이 있다. 삼군을 호령하는 맹장을 사로잡아 올 수는 있어도 평범한 한 사람의 마음은 빼앗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지만 그 사람의 마음까지 얻는 것은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비유해보면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며, 언론은 권력보다 강하다는 말이다.
내가 쓰는 이 한 편의 글이 칼보다 강해지기를 바란다. 무딘 붓이라 하더라도 비록 몸은 따라 갔어도 마음조차 따라 갈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바란다.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옳은 길이면 당당하게 걸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요즈음의 시민들은 붓이 무딘지 아니면 날카로운지 금방 알아차린다. 무력에 굴종하는 펜인지 아니면 정도를 말하는 펜인지 금방 알아차린다. 하다못해‘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조차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꾸며냈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목숨 걸고 하는 말인지 금방 알아차린다.
짧은 글 한 줄에 진심이 어리면 삼군을 빼앗는 힘이라도 그 진심은 어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언론의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송곳은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그 형체를 알아본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진실을 감추려 해도, 사실이라는 다른 매체를 앞 세워도, 아무리 감추려 해도 본의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한 편의 글을 쓴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나는 내 생각을 쓴다. 그러나 그 생각은 누가 보아도 이유가 있는 글이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한 편의 짧은 글을 쓰는데도 많은 생각을 한다. 내가 비록 역사에 남을 그런 위인은 아니더라도, 내 생각조차 그렇게 하찮게 버려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삼군을 빼앗는 권력도 어쩌지 못하는 내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금 비록 인기가 없고 박수를 쳐주지 않더라도, 돌아서서 생각해보니 역시 그 말이 옳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누군가가 우연히 읽었더라도 그 때 그 말이 옳았었다는 회상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된다. 이것이 바로 칼보다 강한 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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