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행복할 조건

꿈꾸는 세상살이 2015. 5. 13. 20:47

행복할 조건

오늘은 퇴근길에 미용실에 들렀다. 머리를 다듬기 위하여 간 길이었지만 평소 토요일이나 수요일에 가던 것과 비교하면 평일에 간 것 자체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대략 두 달 만에 가는 것으로 여느 때보다 한 달 이상 더 걸린 셈이었다. 퇴근 후에 가면 미용실이 영업을 마감한 시간일지 몰라 망설였었는데, 오늘은 그냥 돌아올 셈 치고 허실삼아 갔던 것이다. 어쩌면 그럴 만큼 머리가 길어 불편하였다고 하면 맞다.

사실 평소에는 비교적 짧게 깎는 편이었지만 결혼식에서 신부의 손을 잡고 가는 혼주치고는 머리가 너무 짧다는 의견에 따라, 조금은 길러 보자고 했던 것이 오늘의 결과로 이어졌다, 계절은 겨울을 넘어 봄으로 이어졌고, 게다가 덥수룩한 머리가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지던 것을 참아가며 시간적 여유를 만들기에는 불편함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늦은 시간의 미용실은 손님이 없었다. 어찌 보면 주인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였다. 그나마 훤하게 밝혀놓은 불빛이 분위기를 다듬고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긴 소파에 올라 두 다리를 뻗고 앉아있는 주인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다 저녁에는 손님이 오지 않으니 어서 문 닫을 시간이 되기만 기다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즈음 내가 들어간 것은 한줄기 반가움이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파머손님이 아니니 크게 반가울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한가한 시간에는 나 같은 사람도 손님 축에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우리도 영업을 하고 있다고, 우리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반가운 사람인 것이 확실하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리움인지 반가움인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서는데, 나는 안 보아도 될 것을 보고 말았다. 주인 겸 미용사는 스커트를 입고 스타킹을 신었는데, 하루 종일 서 있는 관계로 다리에 피가 몰리니 잠시 다리를 펴고 쉬는 중이었으며, 해 저문 오후 아무도 없는 실내의 서늘함을 느껴 다리에 담요를 덮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사람이 다리가 아파도 마음대로 쉴 수도 없는 것에 비하면, 나는 손님 눈치 안 보며 임의대로 다리 운동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봄이라고는 해도 아침저녁으로는 아직도 낮은 기온에 감기 환자가 속출하는 이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스커트를 안 입어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거기다가 추워도 춥다고 말도 못하고 다리에 담요를 덮는 것도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애초에 남 눈치 볼 것 없이 두꺼운 바지를 입고, 그래도 추우면 내 맘대로 내복을 입어도 되니 얼마나 편한가.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길을 가다가도 내가 행복함을 느끼고, 밥을 먹으면서도 내가 행복함을 느낀다.

비록 식은 밥을 먹더라도 배고플 때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니 산해진미가 아니라고 내가 원하는 음식이 아니라고 투정을 부리거나 불평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이 나에게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그런 조건만 아니라면 거기에 따라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다.

월 사용 한도 1억 원짜리 직불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낯선 곳에 홀로 떨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주변에는 1천 원짜리 지폐를 사용하는 자판기 외에 아무 것도 없을 때, 1억 원보다 1천 원이 더 소중하게 사용된다. 따라서 천 원짜리 지폐는 그 나름대로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천 원짜리 지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스스로 행복한 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1억 원짜리 카드도 중요하지만 작은 동전 하나의 가치도 소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행복의 조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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