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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목련

꿈꾸는 세상살이 2006. 5. 16.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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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목련

                                                                  한 호철

4월이 돌아왔습니다. 작년에 왔다 간 뒤로 1년 만에 찾아왔습니다. 나는 사월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월은 왜 자주 찾아오지 않는지 마음 아팠습니다. 그런 나의 애절한 마음을 아는지 사월은 혼자서 오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풍성한 목련과 함께 왔습니다. 하얀 목련과 함께 찾아온 사월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련 밑에서 편지를 읽는다지만, 나는 편지를 읽을 수는 없어도 목련꽃 밑에 다가가 봅니다. 탐스런 봉오리들이 앞 다퉈 기지개를 켭니다. 사실 목련은 활짝 핀 꽃보다도 아직 못다 핀 봉오리가 더 예쁩니다. 아마 다른 꽃들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4월 첫날에 핀 목련도 아직 덜 핀 상태라서 그런지 더욱 탐스럽습니다. 하얀 속살을 내놓을 듯 말듯하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숨겨진 몸을 보이는 수치스러움보다도, 그것으로 인하여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양보할 모양입니다. 그런 모습이 너무 다정스러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길이 향하고 있습니다.

봄은 차가운 얼음장 밑에 살다가 때가 되면 찾아온다고 하였습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서 얼음 층이 갈수록 두꺼워져도 용케 버티고 견뎌냈습니다. 봄은 그렇게 질긴 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강인한 봄도 지난 해 여름이 오자 힘없이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자리를 빼앗긴 봄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절취부심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봄은 이렇게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난 후, 자신의 위치를 되찾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웅크린 우리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때 봄은 여인의 옷자락을 타고 온다고 하였습니다. 여인의 옷자락은 노랑, 분홍, 하양, 초록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꽃 색깔들입니다. 한 나무에서도 잎이 먼저냐 꽃이 먼저냐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매 한가지입니다. 그러고 보니 봄은 여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목련도 작년 봄 진달래에 밀려난 이후, 아무도 모르게 힘을 길렀습니다. 지난 가을 목련의 낙엽을 본 나는 아쉬움을 이기지 못한 채 목련 곁에 머물렀습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목련은 나를 기쁘게 합니다.

이파리가 떨어져 나간 바로 그 자리에서 꽃망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추워지고 메마른 계절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인데도 묵묵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비록 떠나지만 후세를 위하여 예비하는, 자신의 할 일을 수행하는 목련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자 마침내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런 목련이 좋습니다. 살다보면 힘이 다하여 뭔가에 밀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낙망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어떤 놈은 나에게 자랑이라도 하려는지, 평상심을 잃고 먼저 문을 연 놈도 있습니다.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성질대로 행동하는 놈입니다. 이놈들은 항상 호된 매를 맞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바람에 부대끼다가 제풀에 나가떨어지곤 합니다. 겨우 버티고는 있다고 하더라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립니다.

자리에서 일찍 일어난 것이 무슨 잘못은 아닌데도, 그놈들이 겪는 과정은 너무나 힘이 듭니다. 이것은 겨우 목숨만 유지할 뿐입니다. 날 자리 들 자리를 모르고 나선 대가가 너무나 혹독합니다. 만물은 이렇게 모두 자기 자리가 있나 봅니다.

그러나 게으른 듯하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자신을 알아 합당한 행동을 한 꽃들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오가는 여러 사람들이 귀여워해줍니다. 고개를 들고 우러러봅니다. 그리고도 모자라서 한참씩 서서 머물다 갑니다. 때에 따라서는 거름도 주고 주변의 장애물도 치워줍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 나온 놈들은 꽃잎을 치우는 일에 더욱 부담만 줄 뿐입니다. 이런 놈들은 같은 꽃이면서도 원성을 듣습니다. 나무를 통째로 흔들어 빨리 내려오라고도 합니다. 이 얼마나 서러운 일입니까. 한 나무에서 태어났어도 어떤 놈은 얼어 죽고, 어떤 놈은 흔들려서 떨어지고 참으로 복잡한 세상입니다. 아름다운 목련에게도 이런 어려움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추운 겨울날 눈보라를 맞을 때 서로서로를 위로하며, 같이 의지하여 참고 견뎌 온 꽃눈이지만 서로 다른 운명을 맞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변에는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이 유혹을 이기고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는 많은 구렁도 있습니다. 이 구렁에 빠지지 않고 건너는 것도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더 사랑스러운 목련인지도 모릅니다.

바람막이도 없이 차가운 바람을 모두 맞으면서 견뎌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포근한 모습입니다. 풍상을 이겨냈지만 모질지도 못합니다. 말없이 인자한 모습을 전해줍니다. 꽃잎은 마치 흰나비 날개가 포개져 늘어서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형상입니다. 그것은 막손이의 볼만큼이나 부드러운 것입니다.

또한 목련은 멀리서 보아도 눈이 번쩍 뜨이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질리지 않는 청순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스러운 목련이 지금 내 앞에 있습니다.

목련 한그루로 인하여 온 마당은 봄으로 가득합니다.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봉오리로 집안이 화원이 되었습니다. 나무 밑에서는 파란 새싹들이 굳은 땅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답답한 장막을 거두고 밝은 세상으로 솟아 나오려나 봅니다. 이러한 생명력도 목련만은 못합니다. 목련은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바로 실천에 옮기고 맙니다. 그래서 봄에 피는 꽃 중에서도 일찍 피는 꽃입니다.

나는 목련을 좋아합니다. 목련은 마치 나를 닮은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세상의 험한 풍파와 맞닥뜨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들어도 꿋꿋이 버텨나가고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목련은 찔레와 같은 창도 없고, 때죽나무와 같은 갑옷도 입지 않았지만 자기 극복의 개척정신이 잘 나타나는 나무입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나도 목련처럼 수줍은 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그 꽃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흔하지 않은 꽃이 될 것입니다. 순박하지만 천하지도 않은 그런 꽃을 피우리라 기대합니다. 수수하면서도 선한 꽃을 만들 거라고 다짐도 해봅니다. 마치 목련과 같은 그런 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목련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목련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해 놓아야 할 것입니다. 목련을 나의 가슴 깊은 곳에 심어 놓아야겠습니다. 나는 목련을 좋아합니다. 내가 목련을 사랑하고 있는 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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