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쪽밤이 주는 의미

꿈꾸는 세상살이 2006. 5. 16.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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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밤이 주는 의미

가을이 되면 들로 산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초가을이면 검붉은 햇밤이, 늦가을에는 노란 감이 있기 때문이다. 경사진 언덕이나 비탈을 가리지 않으며, 밭둑과 빈터 등 어디에서든지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제대로 된 밤을 주워본 기억이 없다. 탐스런 알밤이려니 기대하지만 항상 쪽밤이었고 원래 이런가 보다 하고 다른 나무를 찾아가도 결과는 비슷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심은 나무도 아니며 가뭄에 물 한바가지 떠나 준적도 없다. 그런데도 좋은 열매를 얻으려 하니 가슴한곳에 미안함이든다. 게다가 쪽밤을 줍는 것도 모자라서 감히 알밤을 딴다면 그것은 더더욱 안 될 말이다.
어떤 때는 허락 없이 밤을 따면 엄한 벌에 처하겠다는 경고문도 만난다. 그렇다고 주인이 할 일 없이 비탈의 밤나무 몇 그루를 지키고 있을리 만무하지만 그 말조차 무시한다면 선량한 시민의 행동은 아니다.
지금 이 나무가 울밖에 서 있고, 적령기를 지나 비록 탐스런 밤은 생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엄연한 소속은 있는 것이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 해걸이를 하며, 밑거름을 주지 않아 많이 쇠약해진 탓에 이제는 뒷방차지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뼈대 있는 나무였을 것이다.
이 밤나무에서 아직도 알밤 몇 말은 실히 나오겠지만 주인의 사랑을 잊은 지 오래다. 자기가 애써 가꿔 온 나무의 밤조차 딸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린 농촌현실이다. 이제는 자신도 떨어진 밤만을 줍는 정도가 되고 말았다.
이쯤 되면 어릴 때부터 보아온 고향과 토종의 의미는 사란 진 뒤 오래다.
토사가 밀려오는 민둥산을 치료하겠다고 나무를 심고, 배고픔을 달래 보겠다고 유실수를 심던 때가 있었다. 그 때의 밤나무는 메아리가 있는 산을 만들었다. 또 좋은 꿀도 제공하며, 영양결핍이던 시절의 해결사 역할을 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나무였던가. 거기다가 밤송이와 줄기까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고마운 식물이었다.
그래도 나는 쇠약해진 밤나무 밑에서 알밤 몇 톨로 기쁨을 찾는다. 두 손 가득히 담아도 스무 남짓 되겠지만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순간이다. 이것은 오늘 들인 노력의 수고와 소용된 비용을 생각하면 분명히 밑지는 계산이다. 그래도 기분 좋은 건 웬일일까. 일상 생활 속에서 해방된 듯한 즐거움도 있을 것이고, 자연 속에서 재충전하는 기분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 밤나무만으로는 생계를 꾸려 갈 수는 없게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들의 생활 속에 기쁨을 주고, 활력을 줄 정도의 능력은 가지고 있다. 그러면 내가 풀 섶에서 주운 것은 기쁨이고 활력소이며, 작지만 소중한 가치인 것이다.
고목이 되고 군데군데 벌레 먹은 이 나무는 머지않아 잘려지고, 멋있는 국적불명의 조경수가 자리할 것이다. 그리고는 그 나무가 자손들의 생활터전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내가 망쳐놓은 시궁창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욕심이다.
까치밥마저 빼앗고 싶어도 나무에 올라갈 시간이 없어서 그냥 두는 바쁜 세상이지만, 그래도 알밤 몇 개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듯 정감 있는 토종이 남아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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