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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로 보는 한수 이남의 지역적 특색

꿈꾸는 세상살이 2007. 1. 7. 16:12
 

택리지. 

  이중환지음. 이익성 옮김.

  을유문화사. 초판 1993년, 개정판 2002년

  범위 : 67쪽부터 109쪽까지

 

1. 택리지의 일부 요약


경상도.

 

지리가 가장 아름다운 경상도는 강원도의 남쪽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닿아있다. 북쪽은 태백산이 감싸고 있어 하늘에 치솟는 수성형국이다.

태백산의 왼쪽에서 뻗은 큰 지맥은 소백산, 주흘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 등을 거쳐 남해에 이른다. 산봉의 천연 못 황지에서 솟아난 물은 안동, 상주를 거쳐 김해에 이르고, 이 강물이 상주의 동쪽에 있다하여 낙동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낙동강이 경상도의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강의 동쪽을 좌도, 서쪽을 우도라 부르고 있다.

두 개의 큰 지맥 중간에 있는 경상도는 기름진 들판이 천리에 이른다. 두 지맥은 김해에서 합쳐지는데, 그 안에 있는 70개 고을의 물이 하나의 수구를 만들어 빠져나가니 큰 형국을 이루고 있다. 

 

신라는 작은 국가들을 통일하고 경상도에서 천년을 누렸다. 말엽에는 여왕이 즉위하면서 정치적 명령이 시행되지 않았고, 불도를 너무 숭상하여 골짜기마다 사찰이 생겨났다. 그러자 백성들이 앞다퉈 중이 되었고, 혼란한 때를 이용하여 견훤과 궁예가 일정지역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경주의 관아 터는 서북쪽을 향하고 물은 동쪽으로 흐르는 회령고조형이다. 어쩌면 견훤과 궁예가 신라의 천년사직을 뒤돌아보게 하는 것은, 경주가 회령고조형이라서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조의 다시 천년 세월에 이르기까지 장상이나 공경, 문장과 덕행이 있는 선비나 공을 세운 사람, 절의를 세운사람, 도에 능통한 사람들이 많이 나와 경상도를 인재의 광이라 부른다. 그러나 인조에 이르러 어지러운 정국을 진정시킨 후부터 경성에 사는 사대부에 치우쳐 등용하게 되니, 그 뒤로는 영남사람으로서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은 겨우 고을 수령정도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선배들의 풍습과 혜택으로 아직도 과거에 많이 합격하기로는 으뜸이다.

 

대체로 좌도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군색하게 살아가면서도 문학하는 선비가 많으며, 우도는 땅이 기름지고 백성들은 부유하나 호사하기를 좋아하고 게을러서 문학에 힘쓰지 않아 훌륭하게 된 사람이 적은 편이다. 그렇더라도 실제로는 땅의 기름지고 메마름이 섞여있고, 인재 또한 좌도와 우도에 섞여서 배출되었다.

 

경상도 전체에서 칠곡 관아가 있는 성만이 높이가 만 길이나 되는 산위에 있어 남북으로 통하는 길을 가로지르는 요해처이다. 대구는 사방이 높은 산으로 막혀있고 큰 들이 있으며, 금호강이 흐르는데 낙동강에서 합류한다. 대구는 경상도의 한 복판에 위치하며, 지형 또한 훌륭한 도회지이다.

왜국과 경상도 사이에 대마도가 있는데 이는 원래 두 나라의 어디에도 딸린 것이 아니었고, 무역을 하며 필요시 요긴하게 이로움을 취하는 무리였다. 우리가 대마도를 토벌한 적이 있었으나, 큰 이득이 없어 다시 돌려주기도 하였다. 

바다에서 난 산물이 내륙에까지 잘 전달되어 생활하기에 좋은 고장이 많으며, 지역마다 각각 적당한 농산물이 생산되었다. 샘물에 장기가 있어 풍토병이 있거나, 살기가 있는 지역도 있으나 사람이 어쩌지 못하는 것은 이 책의 지형적 특징 풀이이다.

 

이러한 경상도의 좌도에는 벼슬한 집이 많고, 우도에는 부자가 많으며, 천년이나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있는 마을이 있다고 한다. 이는 경성에서부터 거리가 멀고 사세로 보아, 이 지방출신 사대부가 아닌 사람들은 쉽게 옮겨가 살만한 조건이 안 되는 지역이었다.


전라도.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던 본거지이다. 견훤은 고려 태조와 여러 번 싸워 아주 위태롭게까지 만들었던 적이 있다. 고려 태조가 평정한 뒤, 백제 사람들을 미워하였고 차령이남 사람을 등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는 차령 이남의 물은 모두 산세와 어울리지 않고, 엇갈리게 흐르는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실 금강은 전라도 동부에서 발원하여 북상한다. 그리고 충청도의 공주를 기점으로 다시 서해로 향하여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지만, 이것이 북고남저의 지형적 이론에 반한다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전라도는 따뜻하고 땅이 기름지며, 서남쪽이 바다에 임해있어 생선, 소금, 벼, 목화, 모시, 닥, 대나무, 귤, 유자 등 많은 산물이 생산된다.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풍성하기 때문에 가무를 즐기며, 사치하고, 사람이 경박하고 간사하여 문학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 그러므로 학문에 힘써 자신을 이름나게 하는 사람은 적으니 과거에 올라 훌륭하게 된 사람의 수가 경상도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인걸은 인간의 노력뿐 아니라 땅의 영기로 태어나는 것이므로, 전라도가 배출한 인걸 또한 적지 않다. 기대승, 이항, 김인후 같은 도학자와 김천일, 윤선도, 고경명 등 절의로 이름이 높은 사람이 있었다. 장군 정지와 정충신, 재상으로는 오겸, 이상진이 있었다. 문학과 도교에서도 뛰어난 인물이 많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얽매임 없는 기개와 뛰어난 재주로 후세에까지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다.

덕유산의 서남쪽으로 뻗은 줄기는 순창과 정읍의 노령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남쪽으로 통하는 큰 길이 된다. 노령에서 갈라진 산맥은 영광, 무안, 변산, 담양, 광주에 이르러 여러 산을 만들었다.

 

전주는 감사가 머무는 곳인데 위봉산성, 기린봉과 건지산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목조의 능이 있다는 건지산은 한 맥이 덕지가 되었으며, 다시 밋밋한 둔덕이 되어 큰 들판을 빙 돌았으니 지극히 아름답고 참으로 살만한 곳이다.

전주 경계에 이르는 고산현의 물은 여러 고을에 걸쳐 관개를 하니 땅이 기름지고 벼, 생선, 생강, 토란, 대나무, 감 등의 생산으로 인근 모든 고을의 주민들이 먹고 살만큼의 많은 물건들을 고루 갖추었다. 서쪽으로는 소금과 생선을 실은 배가 통하고, 관아가 있는 곳은 인구가 조밀하고 물자가 쌓여 있어 서울과 다름이 없는 큰 도회지이다. 노령의 북쪽 10 고을에는 모두 장기가 있으나, 전주만이 장기가 없어 맑고 서늘하니 가장 살만한 곳이다.

주흘산의 북쪽 한 가지가 서쪽으로 뻗어 내려 탄현, 용화산이 된 다음 옥구에서 멈췄다. 용화산 중턱에는 옛날 기준이 도읍하였던 성과 궁궐터가 있다. 이곳은 지금의 익산에 해당하며, 기준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새롭게 인식되는 백제문화의 한 축이다.

 

나주는 노령 아래에 있는 한 도회로 산과 강에 닿아 있고, 고을 관아의 판세가 한양과 흡사하여 예부터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다. 나주의 서남쪽은 영암인데 월출산은 깨끗하고 수려하여 화성이 하늘에 오르는 산세이며, 남쪽은 서해와 남해에 맞닿아 있다. 신라에서 당나라에 조공을 떠날 때 모두 여기에서 배를 타고 떠났으며, 남송이 고려와 통행할 때에 정해현 바닷가에서 배를 출발시켜 7일 만에 고려 경계에 이르렀다는 곳도 바로 이곳으로 해상교통의 요지이다.

 

순창의 부흥산(복흥산) 남쪽 줄기가 담양, 창평을 거쳐 무등산이 되었는데, 광주는 풍토와 기후가 통창하고 경치가 훌륭하며 벼슬을 지낸 사람도 많았다. 해남현 삼주원에서 돌맥이 바다를 건너니 진도군이 되었다. 돌맥의 위용은 물길로 30리 이며, 다리와 같은 모양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바다물이 항상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며 폭포같이 쏟아지고 물살 또한 매우 빠르다.

이 돌맥은 임진년에 왜군이 남해를 거쳐 북쪽으로 올라가던 참에 이순신장군이 대승했던 곳이다. 쇠사슬을 걸쳐놓아 왜선을 모두 거꾸로 엎어뜨리자 급류에 휩싸인 500 여 척이 일시에 침몰되었다. 이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택리지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이 전공으로 명나라 장수가 상을 받기도 하고, 참소를 당하여 벌을 받은 장수도 있었으니 명의 상벌에 질서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도는 남쪽에 위치하여 지방 물산이 풍부하며, 산골까지도 관개 농을 하니 수확이 많았다. 바닷가도 신라 때부터 제방을 쌓아 관개하였는데 오히려 조선에 와서 그냥 버려둔 까닭에 그 기능을 잃게 되었다. 한 예로 나의 고향인 황등에도 백제때 세운 황등제가 있었고, 당시 국내 3대 제방에 속했으나 고려 때 토사에 의한 자연 매립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옛날 속수공이 민지방 사람을 교활하고 음흉하다 하였으나, 뜻을 가진 사람들이 같이 살면서 백성의 풍요함을 바탕으로 예의와 문행을 가르치니 주자 때에는 어진 사람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가진 자들이 성심을 다하여 가르친다면 살만한 지역이다. 산천이 기이하고 훌륭한데 크게 드러난 적이 없었으니 한 번쯤은 정기가 나타날 것이라 한다. 


충청도.

 

차령을 기준으로 남쪽 지방은 전라도와, 북쪽 지방은 경기도와 이웃하고 있다. 물산은 영남과 호남에 미치지 못하지만, 산천이 평평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 사대부들이 모여 들게 되었다. 사대부들은 여러 대를 살면서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 생활의 근간으로 삼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이고, 풍속에서도 서울과 큰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 만한 곳이다. 

 

충청도 감사는 공주에 머무는데 한양까지 300리 거리이며, 차령의 남쪽에 있고 금강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충청도 가야산 앞뒤의 열 고을을 내포라 하는데 이곳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 내포는 지세가 한 모퉁이로 멀리 떨어져있어 적군도 쳐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집이 많다.

그러나 바다 가까운 지방은 학질과 염병이 많으며, 전체적으로 산천이 비록 평평하고 넓으나 수려한 맛이 적다. 구릉과 원습 또한 곱고 아름답다고 하지만, 천석의 기이한 경치는 모자란다.

전라도 마이산의 맥이 뻗어와 북쪽을 향하다가 금강 남쪽에 끝을 맺으니 이곳이 계룡산이다. 한 가지가 내려와 판치가 되고 다시 솟아나니 월성산이고 공주의 진산이 되었다. 공주의 서남쪽은 부여로 백마강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백제의 옛 도읍터이다. 강가에 다다르면 암벽이 기이하고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 또 땅이 기름지고 부유한자가 많으나 도읍터로 논하자면 판국이 작고 비좁아 평양이나 경주보다 훨씬 못하다.

 

차령의 서쪽 줄기가 맺혀서 된 무성산이 있는데 토산이 빙 돌았고, 그 안에 마곡사와 유구역이 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대부나 백성들은 흉년을 모르며, 경제적으로 넉넉한 살림을 보전하여 이사 할 근심이 없는 낙토이다. 크고 작은 산위에 맺혀있으나 둔덕이 낮고, 험하거나 뾰쪽한 모습이 없으며, 산허리 위로는 돌이 하나도 없어 살기가 적다. 그러므로 남사고도 이곳을 피란할 만한 곳이라 하였다. 다만 산위에 정해진 터인 관계로 동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감이 있어 은은한 살기가 있다. 고려 말기의 정도전은 귀향 가있던 어진 사람 여러 명을 불러서 문초한 곳이며, 그 중에서 이숭인은 결국 죽음을 맞았다.

 

정유재란 당시 왜병이 공주까지 올라와 군세가 강했던 적이 있었는데, 명나라 군사가  차령 이북의 남북으로 통하는 길목에 진을 치고 적군을 맞아 크게 승리하였다. 이때 명나라 군사끼리 전공을 세운 장수를 모함하니, 조선의 왕이 사신을 보내 이를 바로잡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 기록에는 이를 바로 잡지 못하고 다시 반대로 기록하였으니 명나라의 제도나 성과가 허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충주는 한강 상류에 있어 물길로 왕래하기 편리하므로, 서울의 사대부들이 살 곳을 많이 정하였던 곳이다. 한양으로 가려면 경상좌도나 우도의 두 갈래 길이 이 곳 충주에서 만나게 된다. 충주는 한양으로 가는 물길과 육로의 요충지이며, 임진왜란 때 이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신립이 나가 싸웠으나 대패한 곳이다.

충주는 평상시에도 살기가 하늘을 찌르고 부유한 자가 적으며, 백성은 경박하여 살만한 곳이 못된다. 읍의 서북쪽에 탄금대가 있는데 여기서는 탄수 이연경의 자손이 10 대에 걸쳐 과거에서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자 좋은 터라하였다.


2.요약 부분에 대한 의견.


현대에서 지역적 갈등을 겪고 있는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가 어떤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을지,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저자 이중환은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정쟁에 휩싸여 형을 받고 귀향을 갔다가 풀려났는데, 다시 먼 곳으로 귀향을 가게 된다. 실학은 사물을 보되 사실대로 보고, 이를 현실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것이니, 지역마다 강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론이라 하겠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를 비교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지형적으로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경상도는 커다란 산맥이 북쪽에 있어 북풍을 막아 줄지는 모르지만, 그것도 한 지역만의 일이고 전체적으로는 강과 산이 있으며, 들과 바다가 있어 세부 지역적인 삶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지역이 풍수지리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각 지역에서도 지하자원이 많이 매장된 곳과 염기가 많은 곳은 장기가 있어 몸에 해로운 물이 있고, 산세가 험하고 계곡이 깊어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음습한 곳에서는 지형적인 살기가 서린 곳이 있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백성들이 부유하면 게을러지고, 산물이 부족하면 이를 저장보관하고 통용시키는 방법 등이 발달하는 것도 모든 지역에서 고루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는 산물적으로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으로 보면 더 세분화하여 산물을 구분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경제 셈법으로는 모두 같은 산물이 등장한다. 산에서는 초목이나 약초, 평야지대에서는 곡식, 바닷가 지역에서는 소금과 생선이 주류를 이루고, 이 들은 당시 먹고사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거론되는데 경상, 전라, 충청도 모두 같은 산물들이다. 지금의 특산물을 보더라도 곡식이나 생선, 약초의 종류에 따른 이름만 다를 뿐 자연생산적인 것들은 각 지역에서 고루 산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공업화에 따른 인위적인 생산품인 경우는 별도로 생각할 문제이다.


셋째는 학문적인 비교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그들이 가지는 특권은 많은 부분에서 적용되었을 것이고, 고려가 등장한 후에도 차령 이남을 차별한 것은 이어지는 정책의 하나였다고 보여 진다. 거기다가 당시 산업은 주가 곡식 농사였으므로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던 전라도 사람들은 풍류와 가무를 즐기는 것이 더 많았을 것도 짐작이 간다. 아마도 이것은 남도창을 탄생시켰고 훗날 판소리문화로 이어진다고 본다. 때문에 학문으로 입신하여 먹고살기를 노력하는 경상도 사람들이 더 많은 관직에 오른 것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이것을 두고 원래 천성이 게으르다든지 무식하다든지 하는 평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 원인이 다른 곳에 있으니 대책 또한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넷째는 위정자들의 역할이다.

 

어느 한 곳이 어떤 영향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약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강점으로 승화시키는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산이 높아 교통이 불편했던 곳이 관광지가 되며, 장기가 있어 살지 못하던 곳을 광산으로 개발하는 것이 그 예이다. 이처럼 전체적으로는 같더라도 세부적으로는 다른 여러 곳이 있는데 이들을 잘 살펴 그 약점을 이용하여 강점으로 만드는 정책이 필요하다.

 

지금의 동서간에 터널이나 도로를 뚫어 왕래가 있었다면 경상과 전라의 갈등은 아예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경제적 타당성 논리에 의해 지연되었고, 결국 지역간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는 국민적 갈등으로서 경제적 투자에 비교할 수 없는 감정적 갈등이 되었고, 국가의 커다란 손실을 초래하였다. 지금도 이런 문제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여전히 경제적 논리로만 미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미약한 부분을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부족한 부분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을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같은 나라, 같은 지형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너무 모르며 그냥 일방적인 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임과 동시에 자신에게도 피해가 온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따라서 균형있는 국토의 발전이 곧 모든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전에 풍수지리에 관한 내용을 정식으로 수학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이론을 배우며, 들과 산에 나가 직접 지형을 보고 지기를 체험하기도 하였다. 그 때의 기분으로 이 책을 접하게 되었지만, 그에 비하면 이 책은 경제 전문지와 같은 느낌이 든다. 전국 모든 지역의 형태와 지형, 산물과 거래, 교통과 군사적 작전, 의학적 취약점,  풍습과 민심, 지역민들의 성격에 이르기까지 모두 망라한 국민백서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내가 배웠던 풍수지리나 여기에서의 지리역시 결국은 같은 내용이며, 사람이 살아가는데 이러한 지리적 특색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없는 강점으로 육성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 것을 상쇄시키는 국가 정책과, 개인들의 노력이라고 매듭지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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