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위에 나비가 앉았다.
아침에 된장국을 먹었다. 된장을 진하게 풀어 넣고 풋마늘 대를 썰었다. 그리고 양파도 넣고, 풋고추도 뚝뚝 꺾어 넣었다. 지난 번 가져온 무공해라는 채소를 빠짐없이 넣고 끓였다. 된장 맛이 진하면서도, 얼큰한 풋고추 맛이 톡하고 미각을 건드린다. 사실 이렇게 맵도록 쏘는 맛은 나도 싫어한다. 그래도 양파나 마늘 대가 우러나서 또 다른 맛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이런 복잡한 맛을 즐겨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 집 아이들은 된장이 주재료로 들어간 음식은 아예 먹으려들지 않는다. 지금은 성인이 되었건만 이런 것이 음식문화의 변화인가 싶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밥 위에 나비가 앉았다. 손으로 내 저어도 날아가지 않는다. 유리 상자 저 안쪽에 앉아 있기 때문에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모양이다. 식당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저어보고 불어보아도 날아가지 않는다. 어쩌면 영양사의 허락을 받고 왔으니 영양사가 쫓아야만 날아 갈 모양이다.
오늘도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유독 오늘만 나비가 날아왔을까. 간단히 생각해서는 잘 모르겠다. 쉬운 문제를 어렵게 풀고 싶지 않아서 영양사에게 물어보았다. 오늘은 나비가 날아 올 만큼 맛있는 밥이라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답한다.
그런데 내가 따져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재료도 중앙 공급소에서 단체로 구입하고, 요리도 거기에서 해 온 것인데 어제와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여기서는 단지 조리만 할 뿐이고 새로 밥만 한 것에 불과한데... 그래서 나비가 밥에만 앉아 있는 것일까?
남자들만 생활하는 중량물 기계공장에서, 영양사가 보는 점심시간은 위험한 업무의 연장이었나 보다. 툭하고 식탁에 놓이는 식판소리와 플라스틱 식판을 긁는 수저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또 다른 스트레스였는지도 모르겠다.
저 아득한 어느 날 야외에 나가 도시락을 까먹을 때, 지나가는 비행기 꼬리를 물고 흔들어대던 산비둘기를 상기시켜주고 싶었는가. 둘둘 말린 김밥위로 부옇게 떨어지던 송홧가루를 피해 달아나던 그 기억을 돌려주고 싶었는가.
슬금슬금 내 바지위로 기어 올라오던 송충이에 놀라 먹던 음료수를 엎어버린 추억을 꺼내주고 싶었던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도시락이지만, 같이 모아놓고 먹다보면 누구나 똑같이 나누어 먹던 그 시절의 우정을 일깨우고 싶었던가.
영양사는 분명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면 식당에 들고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밥은 그냥 있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해서 먹는 것이라고. 밥을 같이 먹는 것은 그냥 넘기면 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나누는 것이며, 서로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라고. 내가 오늘 밥을 먹는 것은 누구를 위하여 먹는 것이며 누구 때문에 먹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라고.
식당의 업주가 바뀌고 나서 식당에 음악이 흘러 나왔다. 최근에 유행하는 장년층 선호의 가요가 나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젊은이들의 음악이 나오기도 하였다. 가끔은 장식물이 붙기도 하고, 월드컵 때는 예상 스코어를 알아 맞추는 깜짝 퀴즈도 등장했었다. 그렇다고 전과 비교하여 식사시간이 더 즐거워 졌다는 피부 감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문화에 조금씩 길들여지고 있었다. 내가 느끼지 못해도 변화는 오고 있었다. 그럴 즈음 드디어 밥 위에 나비가 앉고 말았다. 날개에서 더 떨어질 가루도 없는 나비는 그렇게 앉아 우리를 한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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