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가을 산의 대화

꿈꾸는 세상살이 2007. 1. 5. 10:54
 

가을 산의 대화

 

가을 산을 걷다가 잠시 길가 좌우를 살펴보았다. 소나무가 있고 바위도 있고, 개울도 있다. 그 사이 사이에는 크고 작은 수목과 들풀이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이들은 내가 이 산을 알기 전부터 터를 잡고 살아왔을 것이다. 아마도 훨씬 전부터 대를 물려 살아 온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산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숲이 보기에는 우스운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하루살이들의 대화로써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음 공해쯤으로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은 자연 속에서 겸허해져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된다. 숲 속에서  한참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하나의 작은 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그 수명은 찰나에 더도 아니다.

 

산을 정복하겠다고 세계의 높은 봉우리들을 올라본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만약 산이 거부를 하게 되면 산에 오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전문 산악인들은 산을 정복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봉우리에 올랐을 뿐이라는 뜻으로 등정했다는 말을 한다. 이는 산으로부터 눈 밖에 나지 않고, 다음 등산 때에도 나를 거부하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소망의 표현일 것이다. 높은 산에 등산하기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적당한 핑계거리가 있어 마음이 편한 문구이다.

 

이러한 높은 산들에 관해서라면 셀파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특정부분의 노력만 기울이면 그 어느 전문 산악인들보다도 더 높고 더 거친 산들을 쉽게 오른다. 그러나 이들은 산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 때문에, 누가 산을 험담이라도 할라치면 경계한다. 그들은 산을 무서워한다. 산에서 나서 산을 바라보며 자란 그들이, 그 변덕스러운 공포의 산 품안에서 산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것들을 연결지어 보면 역시 우리는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이 베푸는 덕을 얻는다고 하는 말이 맞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산이 잠시 한눈팔고 졸리는 눈을 비비는 사이에 슬그머니 금줄을 넘어서버린 이방인처럼, 무임승차에 대한 노여움이 잦아들기를 바랄뿐이다. 바로 산에서 인간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자연속의 인간은 어떠할까 상상이 간다.

 

지난봄에 낮은 산에 오르면서 취나물을 뽑았던 적이 있다. 아내의 개인지도를 받아가며 잎은 어떻고, 줄기는 어떻고 열심히 외우면서 취나물을 찾았다. 이렇게 힘들게 뽑았건만 몇 개 되지도 않는 것들을 보고 지나던 손이 한마디 던졌다. 그 첫마디는 이것이 취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달랑 몇 뿌리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문 산채 꾼이 아닌 것은 확실하고, 그나마 그냥 잡풀임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들인 공을 아내로부터 보상받고 싶어 새로운 스승을 모시고 싶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신의 무지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스승을 배반한 것을 벌하려는 듯, 취에 대한 전문 강의 대신 일반적인 자연 교육만을 늘어놓았다.

취란 것이 원래 우리 인간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고, 병충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자손을 잘 번식시키기 위하여 씁쓸한 맛을 띠고 있어 면역성이 강하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취 대하기를 마치 텃밭의 배추 대하듯 하면 아니 되며, 줄기만 뚝 따서 다음 해에 번식할 뿌리를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 같이 취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인지, 이제는 취를 쉽게 찾을 수조차 없는 정도가 되어 버렸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한 수 배워 아내에게 큰소리 쳐 주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지고, 들고 있는 잡풀의 물기가 마르기 전에 어서 심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행동이 바빠졌다. 벌써 탈진상태가 되어버린 풀들이 다시 소생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면서도, 그래도 지금 심어주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나의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후끈 달아올랐던 얼굴도 땀이 식으면서 그제서야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가을이 되어 다시 찾은 이 산은 지금도 나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다람쥐도 왔다갔다 분주하고, 나무들은 이제 좀 쉬어야겠다고 무거운 옷들을 벗어 놓았다. 그리고는 추운 겨울날 얼어 죽지 않으려는 듯 벗어 놓은 옷들을 자기 발 뿌리에 모으기 시작했다. 가을 숲 속에 들어서니 마치 지난봄에 심어준 풀들이 보답이라도 하는 듯 모든 것이 풍성하다.

 

자신에게 베푼 호의를 알아차리고 객을 대접할 줄 아는 산을 우리 인간들은 한시도 편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자신이 혼자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인줄도 모른 채, 여름날 땀을 식히는 그늘을 만들어 주려고 잎이 무성한 줄 안다. 예쁜 색도화지를 만들어 연애편지 쓰라고 단풍드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도 고마운 줄을 모르고 밭을 일구기 위하여 등산객을 시켜 산불까지 내게 한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행동인가.

 

산은 자기 혼자서 살아가기 위한 준비가 다 되어있다. 자연은 상처 난 곳까지도 혼자서 치료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거기에 더하여 아는 척하고 그들을 치료해 준다고 하면서 그들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스스로를 잘했다고 칭찬하며 만족했다. 순전히 내 입장에서만 말이다. 

지금 내가 한 이 말조차 나무가 생각할 때 다른 나라말로 들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산이 생각할 때 혹시나 소음이 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오고가며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것보다 자연 속에서 나는 어떤 가를 생각하면서, 산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산으로부터 도움 받고 오는 것이 마땅한 일일 것이다.

 

이번 가을 산행은 자연과 마음의 대화를 나눈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내년 봄에는 진짜 취를 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그냥 있는 그대로 두고 보는 게 도와주는 것임을 새삼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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