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 쓰던 날
두 번째 사직서를 썼다. 처음에 쓴 것은 지난 금융대란 때로 일괄 사표를 쓴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회사의 모든 간부가 사직서를 썼던 것은 아니다. 그때는 내가 속해있는 부문만 실적이 좋지 않았고, 따라서 거기에 속해있던 직원들 중 간부들만 사직서를 제출하였었다. 이유는 회사의 실적이 좋지 못한데 대한 책임이었으며, 언제까지 근무한다는 기한이 없이 그냥 빈칸으로 되어있는 이른바 백지 사직서였다. 말하자면 사직서를 언제든지 수리해도 좋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는 적어도 내 잘못이 아닌 이유로 사직을 하는, 국가적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사직을 한다는 생각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면 남아있는 사원들이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능력이나 재능을 따지는 기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회적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분위기였었다. 물론 회사마다 성장에 대한 기여도나 개인의 능력, 그리고 가능성을 왜 안 따졌겠는가마는, 그래도 다들 이해하고 인정해주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써낸 일괄 사직서는 수리되지 않았고, 다들 힘을 합쳐 열심히 일해 보자는 분위기로 반전되었다. 어차피 사직서까지 써 낸 마당에 이보다 더 나빠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들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실적이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해부터는 흑자로 돌아서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익도 제법 나서 모두가 고무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적 호전에 대한 특별 보너스로 일괄 제출한 사직서를 반려한다든가, 찢어 없앴다는 얘기는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얼마가 지난 후 이번에 다시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이제는 일괄 사직이 아니고 개인 사직이다. 따라서 지난번처럼 모두 한마음으로 일해 보자는 그런 분위기와는 다르다. 다만 느낄 수 있는 것은 너무 오랫동안 한 직장을 다녔다는 그런 생각들이다. 하긴 내가 공무원도 아닌데 처음 직장을 잡아 근무하기 시작한 이후로 단 한 군데도 옮기지 않았으니 뭐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들기는 한다.
내가 처음 입사하던 때는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아직도 혈기왕성하던 나이였었다. 아직 사회의 물정도 모르고, 물불을 구분하지도 못하던 때 입사하였는데 이제는 어느덧 반백을 넘기고 말았다. 이태토록 마냥 회사와 집을 오가는 단순한 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시간이 된 것이다. 드디어 나도 세상의 진정한 맛을 느끼러 가는 순간이다.
내가 비록 회사를 떠나기는 하지만 초창기부터 같이 웃고 같이 울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찌 여한이 없을까. 내가 지금껏 여기에서 일하고 그로 인하여 가족들이 생활하던 곳인데 어찌 여운이 없겠는가. 한편 그렇게 긴 시간동안 보고 지냈으면 이제는 지겹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한 가닥 미련이야 남겨두지 않았으랴.
요즘 IMF때보다 더 어렵다고들 하는 때에 나는 사직서를 썼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고, 다른 사람들이야 뭐라고 말도 많겠지만 결과는 단 하나다. 나는 이제 사직서를 썼고, 마치 분신과도 같았던 회사를 떠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라는 게 있다면 후배사원들이 더욱 알찬 회사로 가꾸어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바라는 전부일 수는 없으며, 하나 더 원한다면 좀더 베풀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내가 다 이루지 못했던 짐을 떠넘기면서 사직서를 쓰는 내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 옴을 느낀다. 2006.03.31
'내 것들 > 산문, 수필,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것들 (0) | 2007.04.30 |
---|---|
내가 잘리기 전에 너를 세워 두어야 겠다. (0) | 2007.04.28 |
토마토가 채소라고 우기는 사람들 (0) | 2007.04.19 |
공작 꽁지내리다 (0) | 2007.04.16 |
까치집! 이렇게 지어졌다. (0) | 2007.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