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 꽁지내리다

 

공작 꽁지내리다.

 

거울을 보았다. 그 속에는 좀 야윈듯한 남자가 있었다. 매일같이 쳐다보던 거울이건만 오늘따라 새삼스럽다. 평소보다 두 배나 더 길게 거울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쳐다보니 예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모습들이 하나 둘 어른거린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그 속에 비친 남자의 얼굴에 칼을 들이대고 면도를 해주었건만 오늘은 칼을 잡지 않았다. 거울 속 남자는 눈이 휑하니 며칠 굶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 없이 보아 눈에 익은 얼굴이지만 그래도 어딘지 불쌍해 보였다. 비누 거품을 뒤집어쓰고 바로 머리를 들이대던 다른 날과 달리 그냥 그렇게 쳐다보는 거울은 신기하기만 하였다.

바라보는 거울은 새로운 막이 시작되었다고 북을 치고 있었다. 그것은 내 기억에서 지워진 추억을 하나하나 되살려 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흐릿해진 거울에 비쳐지는 광경은 눈에 설기만 하다. 다시금 찬물을 얹어 거울을 닦아보았다. 그래도 보이는 것은 여전히 초췌한 남자뿐이다. 다른 뭔가를 찾기 위하여 여기저기 두리번거렸지만 찾을 수가 없다.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당신은 누구요?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오?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 막상 대답을 하려하니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얼버무리고 있는 사이 그 남자는 다시 물어온다. 여기는 뭐 하러 왔소?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요? 대답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답이 궁하다. 또 그냥 머뭇거리다가 만다.

북소리의 메아리가 다 끝나기 전에 과거 속으로의 시간여행을 재촉해본다. 흐릿한 거울 속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거기에는 내가 찾는 앳된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찬물을 끼얹고 닦으면 닦을수록 뚜렷해지는 것은 나이든 중년의 모습뿐이다. 면도도 하지 않아 덥수룩한 얼굴에 눈가에는 제법 주름도 자리하고 있었다. 볼 살이 훌쭉해진 것이 마치 밤잠을 못자고 고민한 흔적처럼 보인다. 귀밑에는 흰머리도 보인다. 게다가 소갈머리는 텅 비어 있고, 머리카락도 배추뿌리와 같아 보인다.

그럼 그렇지 어디서 이런 얼굴을 해가지고서는 감히 나하고 해보자는 거야 뭐야? 모처럼 나는 거들먹거려보았다. 아직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라는 확신이 서자 말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여긴 뭐 하러왔어?

그 남자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기만 한다. 그 사이 다음 막을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똑똑똑, 아빠! 아직 멀었어요?

응? 아니다. 다 됐다. 이번에는 거울 속의 남자가 대답을 한다. 대충 씻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 남자가 째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 쓴 웃음을 웃고 고개를 돌려보는데 그도 그렇게 웃고 있었다. 혹시 내키지는 않지만 화해를 하자는 것일까? 아니지, 누가 싸웠나?

거울 속 사내의 얼굴이 거무스레하다. 화해라도 하려든 듯 내민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내 손이 까칠까칠하다. 면도는 해서 뭐해. 오늘부터 출근도 하지 않을텐데. 이제는 매일 아침 시간에 쫒기면서도 치장을 하고 나서던 모습이 아니었다.

비록 우리 안에 갇혀 있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주위를 돌아가며 유세하던 공작이었다. 틈만 나면 꼬리를 활짝 펴고 나보란 듯이 돌던 공작은 그만 꽁지를 내리고 말았다. 따뜻하던 어느 봄날 철망 옆에서 꼬리를 펴고 우쭐대다가 그만 관람객에게 깃털을 뽑히고 만 것이다. 그러나 공작의 깃털은 아직도 영롱하기만 하다. 지금은 이빨 빠진 깃털이 되어 조금은 허술하게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