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의 유언을 다 들어드릴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먼저 간 자식을 생각하면 서럽기 한이 없었습니다. 꼬물꼬물 제비새끼 같은 아이들을 놓고, 그것도 한창 꽃다운 나이인 서른다섯에 가버린 아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오로지 가정과 자식들을 위하여 노력해온 것에 비하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슬퍼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손자손녀를 아들삼아 길러야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농촌에서 별다른 수익이 없이 오로지 농사에 의존하여 이끌어 온 가정이기에 책임감은 한층 더했습니다. 불면 날아갈세라 놓으면 꺼질세라 애지중지하는 손자들이었기에 항상 끼고 살았습니다. 잘 때면 자장가로 잠을 재우고 동네에 마실을 갈 때면 업고 걸리고 동행하였습니다. 눈만 뜨면 물어보고 답하며 말을 걸어 자극하고 항상 옷소매에 달고 살았습니다.
며느리가 있다고 해도 어린 철부지로 보일뿐이며 세상물정을 모르는 여리고 착한 새아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곡간의 열쇠는 할아버지께서 관리하고 계시면서 엄하고 절도있게 통제하셨습니다. 아이들 교육문제도 모두 할아버지의 책임이었습니다.
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은 모든 것에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았습니다. 며느리는 정해진 비용으로 정해진 방식대로 살림을 할 뿐입니다. 멀리 떨어져있는 읍내 오일장에도 할아버지께서 다녀오시고 제수용품도 직접 골라오셨습니다. 10리 밖의 장이었지만 무더운 여름날이라고 시원한 막걸리 한 잔 걸치신 일도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보다도 가족들, 그리고 자식의 몫까지 합하여 손자들에게 정을 쏟아 붓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는 유언을 하셨습니다.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독자이던 아들도 먼저 간 마당에 혼자 사는 며느리에게 지엄한 유언을 하신 것입니다. 나 죽기 전에 마당 앞 텃논은 큰 아들주고, 철둑건너 논은 둘째에게 준다고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며느리에게 주실 것도 잊지 않으시고 지목해 두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들을 이끌고 가야하니 가장 좋고 가장 많은 몫을 며느리에게 묶어주신 것입니다. 나중에 생활이 어려워져서 가진 재산을 모두 없애기라도 한다면, 시골에서 며느리 혼자 고생할 것이 염려되어 따로 떼어 주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며느리도 한없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시아버님의 유언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하였고, 어떠한 유혹에도 아이들을 버리지 않고 잘 키우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유언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병에 들어 고치기가 어려운 형편이 되었으니 반드시 자신의 유언을 따르라고 다짐하고 다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진단을 받아보니 고치기가 쉽지 않고 사람만 고생하게 생겼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이제부터는 병을 고치려고 약을 쓰지 말라는 지시였습니다. 약을 쓰거나 쓰지 않거나 병은 고치지도 못할 뿐아니라, 그나마 조금 가지고 있던 재산도 모두 날리게 될 것이니 당신 모르게라도 절대로 치료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기침도 심하게 잦아졌고, 거동하기가 매우 불편해지셨습니다. 안채에서 사랑채로 거처를 옮기시고 다시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자신을 간호하기 위하여 들락거리는 며느리가 불쌍하고 애처로워 내리신 유언이었습니다. 잠도 못 이루고 끙끙대는 할아버지의 신음소리가 온 식구의 생활리듬을 깰까하는 걱정도 없앨 겸, 하루세끼 음식 외에는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만약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도 절대로 초상을 크게 치르지 마라는 부탁도 하셨습니다. 원래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많아도 정작 본인이 죽으면 문상 올 사람도 없다는 말을 강조하셨습니다. 부인도 없는데다 외아들이 먼저 죽었는데 자신의 초상에 누가 오겠느냐는 것입니다.
초상에 쓰일 음식도 최대한 줄이고 간략하게 00분만 준비하라고 구체적인 지시를 하셨습니다. 혹시 문상객이 오더라도 밤을 지세지야 않겠지만, 그들을 위하여 추위를 쫒을 장작까지도 자신의 손으로 패서 쌓았습니다. 한 집안에 힘쓰는 일을 할 남자가 자기밖에 없으니 모든 책임감 위에 서신 분이셨습니다.
자신의 체면도 상관하지 않고 며느리와 손주들만을 생각하고 걱정하시는 시아버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며느리는 그런 유언을 모두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날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수없는 항의를 하였습니다. 장작불에 의한 재티가 날아 온 동네가 지저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이 비록 절약은 하셨지만, 옳고 그른 것은 분명히 따지신 분이라서 모두들 좋게 평을 하셨습니다. 동네에서 그 분의 명복을 빌기 위한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며느리는 어쩔 수 없이 유언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장작을 사용하라는 지시도 어겼고, 돼지 뒷다리 하나로 때우라던 유언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며느리는 꿈에라도 나타나 꾸지람을 하실 시아버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래도 동네 분들이 그분의 명복을 빌어 주신다는 데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비록 저승에 가신 분이 살아 돌아와서 나무라신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며느리도 그 유언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이라도 하듯이 자꾸만 주문을 외웠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순전히 시아버님의 평소 덕행 때문에 유언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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