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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과 모내기

꿈꾸는 세상살이 2007. 6. 17. 16:53

 

현충일과 모내기

 

예전에는 현충일 전후로 모내기가 이루어졌었다. 늦은 경우는 그 때 보리를 베기도 하고, 모내기는 어느 정도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한때는 바쁜 일손을 도우라는 뜻으로 현충일을 정했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현충일 이른 아침, 태극기를 내려달고 이것저것 정리를 하다가 충혼탑으로 가곤 하였다. 그곳에는 산자락에 위치한 아주 멋있게 꾸며진 충혼탑이 있었다. 그 탑은 경사진 비탈을 깎아 몇 개의 단을 만들고, 각 단은 정교하게 석축으로 쌓았으며, 그 중앙에 만든 돌계단을 통하여 올라가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사각 기둥모양의 탑도 높다란 돌기단위에 올려져 있었다.

 

봄이면 탑 주위는 온통 벚꽃으로 뒤덮여 화사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지금처럼 일부러 벚꽃구경을 하러 다니지야 않았지만, 학교가 끝나고 그 앞으로 지나오는 경우는 우수수 떨어지는 꽃비 속에서 마냥 즐거워하던 기억도 떠오른다. 단 위에는 아주 오래된 벚나무들이 즐비하니 서 있어 온 세상이 꽃 속에 파묻힌 듯 보이기도 하였다. 여름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고, 가을에는 밤을 주우러 갔다가 잠시 들러서 쉬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겨울이면 구슬치기며 자치기를 하던 기억도 새롭다.

 

돌로 된 충혼탑 뒤에는 작은 쇠문이 있고, 그 속에는 종이가 한 장 들어있었다. 모두 한자로 되어있었는데 아마도 전사자들의 이름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아무나 쉽게 열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채워 놓았겠으나, 우리들이 보았을 때에는 자물쇠가 없어 언제든지 그냥 열어 볼 수 있었다. 

충혼탑은 당시 익산군 전체를 관장하는 탑으로, 기념식을 거창하게 치루고 있었다. 탑 앞에 여러 개의 접이식 의자를 갖다 놓았고, 잔치 날에 쓰던 그늘용 채알도 쳤었다. 의자에는 대개가 공무원들이 앉아 있었고, 더러는 소복을 입은 여인도 하나 둘 눈에 띄었었다. 우리들은 탑을 두르고 있던 가장 높은 단 위 비탈에 쪼그리고 앉아 내려다보곤 하였다.

황등 지서에서 열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주위는 숙연해졌다. 그 전부터 장내를 관장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 시각이 되면 모든 동작이 멈추고 드디어 식이 거행되었다. 하얀 장갑을 낀 사람의 지휘에 맞춰 멋있는 악대가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드디어 길고 긴 연설이 시작되면 구경하던 우리들도 지루하기 한이 없었다. 뙤약볕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지만, 제복을 입은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견디다 못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발사! 하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소리가 산허리를 진동시켰다. 깜짝 놀라 움츠리고 다시 자세를 가다듬으면, 또 다시 총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언제까지, 왜 쏘는지도 모르는 채로 한동안 귀를 막고 쳐다만 보았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는데 소복을 입은 여인들은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애써 속으로만 삭이는지 어깨가 들썩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리 내어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 총소리에 놀란 가슴은 지아비를 잃은 슬픔,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한을 들추어내고 말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얀 장갑들은 여기저기서 소복을 입은 여인들을 부축하기도 하고, 소리 내어 우는 여인을 달래느라 분주하였었다.

 

누가 쏘라고 하여 총을 쏘았으며, 어째서 총을 쏘아 조용하던 산비탈을 울음으로 젖게 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잔잔하던 호수에 돌을 던지듯, 애써 잊고 살았던, 뼈저리게 슬픈 기억을 어쩌자고 상기시켜주는지 모를 일이다.

 

총소리가 들리는 충혼탑 주위는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저 멀리 들녘에서는 모를 심는 농부들의 손놀림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손길은 먹고 살아야 하는 식량을 가꾸는 일이니 우리네 목숨을 지키는 것과도 진배없을 것이다. 우리가 다리를 뻗고 지탱하여야 할 국가를 지키는 일과, 우리의 목숨을 연장시키는 일은 그 우열을 다투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현충일의 해는 그렇게 중천을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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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위에 있는 것이 벚나무다. 둘이서 손을 마주해야 닿았던 크기가 옛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무던히도 올라가고 못살게 굴었었는데 용케도 버텨 살아왔다.

 

신사당이었던 것을 알리는 것으로 이렇게 큰 벚나무가 온통 천지를 덮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달랑 두 그루가 있어 옛 기억을 흔들고 있다.

 

 

 

 

애석하게도 충혼탑이 있었던 곳은 일제시대의 신사가 있었던 곳이다. 우리는 그곳을 신사당이라고 불렀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어른들이 부르던 것을 따라 부른 것이었다. 그것을 지금 생각해보니 일본이 강요하던 신사참배의 요람인 신사당이었던 것이다. 그곳에 우리 조상의 얼을 기리는 충혼탑을 만들다니 참으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 예산을 절약하기 위하여 신사만 부숴내고 석축같은 구축물은 그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점도 있겠다.

하지만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둥그렇게 기둥자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우리의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진다. 철저히 없애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보관하면서 교훈을 삼든지, 아니면 그대로 보존하면서 교훈을 삼을 일이지 어정쩡하게 부숴내면서 흔적을 남기는 것은 무슨 뜻이란 말인가.

 신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기둥받침 흔적이 역력하다.  마치 절에 들어가려면 저 멀리서부터 몸을 추스리라던 당간지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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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파 후 땅맛을 아는 모

 

못줄도 없이 손으로 심는 모.     줄은 삐뚤빼뚤해도 튼실하게만 자라다오~~

 

 줄 맞춰 이앙기로 심은 논의 모습/ 기계가 돌아가지 못하는 모서리 부분은 손으로 심어야 한다.

 

모내기를 기다리는 모판/ 이것을 이앙기로 옮겨 싣고 심는다.

 

모판의 모는 예전 손으로 심던 것보다 훨씬 키가 작다.

 

직파를 하기 전의 논.

 

이앙기로 모를 심은 직후의 모습. 

 

직파 직후의 모습.

 

이제 땅맛을 알아 뿌리를 내린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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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모내기를 한 후 모가 자라는 모습.  2007.07.06~07

직파한 논

 

이앙기로 모를 낸 후의 자라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