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법을 못 따라간다.
얼마 전에 평이나 근, 그리고 돈이라는 계량단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만약 사용하는 것이 적발되면 벌금을 내야하고, 정부는 이런 저런 재제조치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수차례 미리 예고된 것으로 기존에 사용해 오던 단위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현재 통용되고 있는 단위 중에 미터법에 의한 규정이 있으나, 전래 단위를 계속 사용함으로서 이중 단위로 인한 혼선을 야기하고 국제적인 통용에서 문제가 된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법이 시행되면서 실제로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많은 국민들이 아직도 기존의 단위를 그냥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 국민에게 벌금을 물린다든지, 어떤 구속을 집행한다든지 하는 것 외에 해결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전 국민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거기에 재제를 가하며, 모든 국민을 범법자로 만들고 형벌을 받게 하겠다는 것과 진배없다.
그런데 전격적인 시행 날짜를 두고 갑자기 사용을 규제하는 범위가 축소되었다. 금은과 같은 귀중품의 소중량을 나타내는 돈이나, 식용 육류의 무게를 나타내는 근의 사용을 규제하는가 하면, 면적을 나타내는 평은 당분간 지켜보자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용하여야 할 국민들의 마음의 준비가 아직 덜 된 것을 너무도 성급히 강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규제에 대하여 국민들이 사용하고 안 하고는 결정하고 시행하기 나름이지만, 그래도 공감대라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 공감대가 형성되어야만 빠르고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제는 우체국에 들러 축전을 띄웠다. 문학에의 장에 새로 등단한 작가에게 보내는 축하 전보였다. 우체국에서 축하 전보 발신용 메모지를 받아들고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주소며 축전의 문구를 미리 준비하여 적어간 종이쪽지가 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받는 사람은 서울의 배꽃길 모처에 사는 사람이고, 보내는 사람은 익산시 복받음길 모처에 사는 나였다. 모든 것을 순조롭게 적고나서 요금까지 치렀다. 담당 직원의 잘 가라는 인사와 더불어 수고하시라는 답변도 하였다.
사무실로 돌아온 얼마 후 전화가 왔는데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받긴 하였는데 우체국에서 확인하는 전화였다. 새로 부여 받은 길 단위의 주소는 아직 우편번호가 안 되어 있어서 구 주소 체제인 번지수로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새로운 길 단위 주소와 구 주소인 번지를 같이 적어 주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길 단위 주소만 적어주었더니 금방새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정부에서 만들어 준 주소를 사용하는데 왜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새 주소에 구 주소의 우편번호를 써야하는 모순이 여기서 생긴 것이다.
번호 자체야 상호 호환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를 대조시키는 작업을 하지 않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은 뻔하다. 이제는 우편물을 보내는 사람이 자기집 우편번호를 위우고 다녀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새로운 주소로 부여 받은 우편번호가 아직 준비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신 주소에다가 구 주소의 우편번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주소를 부여한 의미를 퇴색하게 하는 것이다. 하물며 구 주소의 우편번호를 발신자가 모두 외워서 적어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 물어 무엇하랴.
우체국에서 전화를 걸어 온 이유는 구 주소와 신 주소를 서로 연결시키는 것은 본인 외에는 그 아무도 할 수 없는 데서 문제가 기인한 것이다. 그래도 국가는 새로운 길 단위의 주소 체계를 사용하라고 얘기하고 있다. 아직 전 국토의 새로운 길 단위 주소가 모두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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