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방에 고추 몇 개가 널려 있었다. 남들처럼 한 바구니를 딴 것도 아니고, 한 푸대를 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붉은 고추 몇개가 널려 있을 뿐이었다.
고추농사를 하지 않았는데 웬 고추인지 물어보았다. 옆집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란다. 볕이 잘 드는 그러면서도 비가 와도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골라서 널어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집 며느리는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한다. 자기 밭의 고추가 아니고 남의 밭에 있는 고추를 따 왔다는 것이다. 며느리에게 꾸지람을 듣다보니, 아무도 모르게 남의 마당에 널리는 고추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마당의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널고 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며칠 전에는 그 집의 며느리가 커다란 옹기단지 뚜껑을 들고 왔었다. 오자마자 장독대로 가서 가져온 뚜껑을 놓고 자기 집 항아리 뚜껑을 찾아 갔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 와서 일을 만들어주고 가시는 분이 계신다. 젊어서 험한 일은 안 하셨지만,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자식들 뒷바라지에 많은 고생을 하셨다. 그러다보니 살림도 넉넉하지는 못한 편이었다. 그래도 자식들은 부지런하여 다들 제 몫은 하고 산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일을 벌이시니 여간 곤역이 아닌 모양이다.
왜 남의 고추를 따 왔느냐고 물으니 온 들판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아마도 주인없는 고추라고 생각하였다고 하신다. 누구 말대로 이제 먹고 살만하니까 이런 일이 생기냐고 하듯이,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이 많은 듯하다. 애써 고생 고생 하신 분들은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다.
혹시 세상의 모든 슬픈 기억을 잊고, 오로지 즐거운 생각만 하라고 기억을 없애준 것이라면 그것은 싫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과분하게는 말고 조금만 편히 쉬었다 갈 수 있으면 족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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