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34. 여산동헌(礪山東軒)

꿈꾸는 세상살이 2009. 5. 8. 21:01

34. 여산동헌(礪山東軒) 

 
▲ 동헌 하경 
여산동헌의 모습으로 여름에 찍은 사진이다. 동헌마루에서 오른편 앞의 담장가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왼편 앞에는 대문이 있다. 부속건물인 내아는 동헌의 서쪽에 있었을 것이지만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여산면 여산리 445-2번지의 관아건물로 1980년 3월 8일 시도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었다. 여산동헌은 익산시 소유로 작은 마당을 가진 건물 1동이다. 여산은 조선시대 숙종 25년에 여산부(礪山府)로 승격된 지역으로, 동헌은 수령(守令)이 근무하던 관아건물이다.

일반적으로 동헌은 지방의 현감, 감사, 병사, 수사 등이 근무하던 곳을 말하는데, 정면은 6~7칸, 측면이 4칸이며 내아 등 부속건물이 따른다. 동헌은 수령이 기거하던 내아(內衙)의 동쪽에 있던 관계로 동헌(東軒)으로 불렸으며, 내아와는 담장 하나 혹은 행랑채로 구분한 후 작은 문을 내어 통행하였다.

동헌은 원칙적으로 관할읍성에서 것으로 객사(客舍)보다는 한 단계 낮은 관청이며, 다른 말로 아사(衙舍), 군아(軍衙), 현아(懸衙), 시사청(視事廳)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 전주에 객사가 있는 것은 당시 전주목 여산군의 행정구역으로 관리했던 것을 상기하면 이해가 될 일이다. 여산동헌은 근래에 여산우체국으로 이용하였으며, 최근에는 경로당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모두 정리하고 문화재로서 보호 중이다. 여산동헌은 조선 말기의 건물로 추정되는데,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전국적으로 남아있는 관아건축의 유구(遺構)가 드물어 귀중한 문화재로 꼽힌다. 여산 동헌의 경우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드는 공포를 짜지 않고 소박한 민도리로 처리하였다. 앞뒤에 퇴칸을 두고 몰익공양식(沒翼工樣式)을 이루고 있다. 여산동헌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의 옆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낮은 기단위에 앞면과 왼쪽에는 약 90㎝ 높이의 둥근 주춧돌을 놓고, 뒷면과 오른쪽은 경사지를 이용하여 낮은 주춧돌을 놓았다. 오른쪽 2칸은 온돌방이고 나머지는 대청마루로 되었으며, 온돌방이 있는 부분은 주춧돌이 높아 마루바닥 밑으로 사람이 들어가 군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벽체와 창호는 모두 유리창으로 개조되어 원형을 잃고 있다.

건물의 옆 마당에는 여산에서 근무하던 관리들의 선정비와 영세불망비, 여산초등학교 근처에서 옮겨온 척화비 등 9개의 비석이 있다. 마당의 왼쪽 앞뜰 끝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어 문화재로 보호 중이며, 담장 밖 인근에도 같은 크기의 여러 그루 노거수(老居樹) 느티나무가 있다.

오랜 객지생활을 마친 후 고향에 돌아와 아이들을 데리고 옛 건물을 보여주려고 찾아 나선 것이 여산동헌이었다. 물론 다른 건물들도 많이 있었지만, 종교적인 면이나 어느 정파에 속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관공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산동헌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어떤 분은 여기 뭐하려고 왔느냐는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마을의 정자나무 그늘이었고, 사랑방 대청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경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동헌을 찾아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경로당만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였던 기억도 있다. 훗날 확인한 자료에는 정식 경로당으로 사용하였던 적이 있다고 하였다.

당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보았던 고창군 무장면의 동헌은 그냥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었는데, 우리고장 익산에서는 동헌을 경로당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경로당으로 사용하다보니 매일같이 쓸고 닦으며 풀을 뽑아 정리정돈은 잘되고 있었지만, 그것이야 관리하는 방법상의 문제이니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인근 김제의 동헌은 관아, 내아와 함께 각기 다른 문화재로 등록되어있다. 이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존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럽기마저 하다. 옛 건물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각 건물의 배치에 대한 동선이 말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실감나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활양상을 추정하는데도 한 몫 하는 자료가 된다.

다시 찾은 여산동헌은 이제 원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비록 마당에는 잡초가 우거졌지만, 선정비도 모아놓았고 척화비도 옮겨놓았다. 옆에 있는 학교의 아이들이 몰려와 노는 장소도 아니고, 변변한 놀이터도 없는 시골에서 동네 놀이터가 된 것도 아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시로 드나들어 잡초라도 베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1문화재 1지킴이 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1지킴이는 해당 문화재를 가끔 둘러보기도 하고, 간단한 작업도 한다면 문화재 보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숭례문 방화사건 같은 것도 조금은 방지가 되지 않을까 사려된다. 그러면서 나처럼 뭔가가 보고 싶거나, 궁금한 사항이 있어 확인하고 싶을 때에는 언제든지 연락하여 방문할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산 동헌은 마당에 척화비와 느티나무를 다른 문화재로 가지고 있다. 척화비는 쇄국정책시대에 서양의 문물도입을 반대하던 비이지만 실제로는 개혁파와 실용파를 차단하는 목적으로도 사용되었었다. 노거수 느티나무는 동헌의 역사와 함께하는 오래된 나무로 동헌의 담장가에 심어져 있으며, 동헌 울밖에도 몇 그루의 나무가 더 있다. 이들 나무는 아마도 모두 같은 시기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당시에는 현재의 울밖 노거수가 있는 곳까지 동헌의 울타리가 쳐져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내아와 관아가 그곳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는 동헌 한 채만이 남아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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