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익산쌍릉 (益山雙陵)

꿈꾸는 세상살이 2009. 5. 9. 12:04

익산쌍릉 (益山雙陵)  


구분 : 사적 제87호

위치 : 전북 익산시 석왕동 산 55, 56

규모 : 2기


익산시 석왕동에 두 기의 커다란 봉토분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쌍릉이라고 부른다. 내부 구조는 백제 말기의 굴식 돌방무덤이라 불리는 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봉분이나 석실의 크기로 보아 상대적으로 큰 북쪽의 것을 대왕묘, 남쪽의 작은 것은 소왕묘라고 부른다. 이 무덤은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도 대형급에 속하는 동상총(東上塚)이나 중하총(中下塚)보다도 크다.
크기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원래는 두 기 모두 원형의 봉토분으로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었는데, 최근에 석상(石床), 장명등(長明燈), 석수(石獸) 등을 봉토 앞쪽에 설치하였다.

이 고분은 일찍이 1916년에 일인(日人) 야쓰이(谷井濟一)에 의해 내부가 조사되었다. 당시의 조사에 의하면 대왕묘는 봉토가 지름 30m, 높이 5m, 소왕묘는 지름 24m, 높이 3.5m의 원분(圓墳)이다.

두 무덤 모두 내부는 판석조(板石造)의 굴식 돌방무덤인데, 대왕묘는 길이 3.8m, 너비 1.78m, 높이 2.27m이며, 소왕묘는 길이 3.2m, 너비 1.3m, 높이 1.7m의 크기다. 이런 장방형 현실은 부여 능산리고분의 형식과 거의 같다.

널길(羨道)은 남벽의 중앙에 마련되어 있으며, 대왕묘의 경우 널길의 규모는 너비 1m, 높이 1.5m, 길이는 1m 정도이다. 널문(羨門)과 널길의 입구는 판석(板石)을 세워 막고 있다. 네 벽면과 바닥, 그리고 천정은 모두 다듬은 판석(板石)으로 축조하고 있는데, 특히 양 측벽과 천정 사이에는 장대석을 안으로 기울어지게 끼워 단면 6각형의 괴임식 구조 형태를 하고 있다.

바닥의 중앙에는 바닥면보다 한 단 높은 널받침(棺臺)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 널받침은 한 장의 판석으로 된 것으로, 길이 2.71m, 너비 0.85m의 크기이다.

조사 당시 고분은 이미 도굴되었는데, 다행히 대왕묘 안에서 부식(腐蝕)된 목관을 수습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복원 결과 목관은 바닥면보다 위쪽 면이 약간 넓고, 뚜껑의 상부 단면이 둥근 호형(弧形)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 목관에는 관못과 관고리가 달려 있으며, 관고리에는 8엽 연화문의 좌금구(座金具)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다. 복원된 목관의 크기는 보고자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데, 길이 2.4m, 너비 0.76m, 높이 0.7m 정도의 크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쌍릉은 내부구조나 호화로운 목관 구조, 부여의 무덤과 비슷한 연대의 축조 등으로 보아 백제 말기의 무왕(武王)과 그 왕비(王妃)인 선화공주(善化公主)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기준왕릉과 그의 왕비릉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 증거가 희박하다. 백제 의자왕은 부친 무왕이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하였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무왕 35년 634년에 궁남지를 파고 향락에 빠지는 등 실의에 찬 선왕의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익산에 장사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 권24에 의하면 황극원년 642년에 의자왕의 모후가 돌아가신 것을 기록하고 있으니 이는 의자왕 2년에 해당하며 부왕 사후 바로 다음해이다. 인근에 미륵사지(彌勒寺地)가 있어 이를 뒷받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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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릉(무왕릉)을 알리는 표지판

 

 

 대왕묘 앞 안내판

 

  

 소왕묘원경

 

 소왕묘

 

 대왕묘

 

 대왕묘에서 소왕묘로 가는 오솔길

 

 

 우측은 대왕묘, 좌측은 소왕묘로 가는 경내의 삼거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