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
구분 : 사적 제150호 (1966.06.22)
위치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규모 : 일식 (13,384,699㎡)
익산 기양리에 있는 백제 때의 절터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백제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한 울타리 안에 가각 3개의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탑가람방식은 일본으로 전교(傳敎)되어 아스카시(飛鳥時代) 가람 건축양식의 원류가 되었다.
절의 배치는 동·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이것이 복도(회랑)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어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토기·금속·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전시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된 모형이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護國寺刹)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미륵사의 창건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고, 그 후의 조선시대 문헌 중 몇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武王條)에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는 길에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현출하여 왕비의 청에 의하여 이곳을 메우고 3곳에 법당과 탑 그리고 회랑 등을 세워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주기에 의하면 이 절 이름을 국사(國史)에는 왕흥사(王興寺)라고도 했다고 한다. 또 ‘조선불교 총서(朝鮮佛敎 叢書)’에 실린 고려 초 승려(僧侶) 혜거국사비문(惠居國師碑文)에 의하면 922년 후백제 견훤(甄萱) 때에 미륵사의 개탑(改塔)의 기사가 실려 있어, 이때 미륵사의 탑이 복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영조 때 강후진(康侯晋)이 지은 ‘와유록(臥遊錄)’에서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전자에서는 "석탑이 극대하여 그 높이가 수십 척으로 동방석탑 중 제일이다."고 하였고, 후자에서는 "밭둑 사이에 7층 석탑이 있는데 대단히 높고 크며… 세상에서 이르기를 동방석탑에서 제일이란 말이 거짓이 아니다. 백 년 전 벼락으로 인하여 그 반이 허물어졌고, … 밭둑 사이에 초석과 석조가 널리 있는데, 그 반이 노출되거나 전체가 노출되었고… 종각의 초석으로 보이는 것이 완연히 남아 있다…" 라고 하여 이때 이미 사찰이 폐허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미륵사는 백제 무왕 대에 창건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폐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부터 1995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 주도하에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었다.
미륵사는 사자사(獅子寺)가 있는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좌우능선을 두고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조사유구를 통해본 미륵사 원래의 가람은 남북자오선상(南北子午線上)의 서쪽으로 약 23° 기운, 중앙축선을 기준으로 남쪽에서부터 중문(中門), 탑(木塔)), 금당(金堂)을 배열한 중원(中院)과 이를 완전히 둘러싼 회랑(回廊)이 있다. 또 중원 양옆에 중원의 남북축선과 평행하고 중원의 각 건물과 같은 횡축열선상(橫軸列線上)에 놓인 중문(中門), 탑(石塔)), 금당(金堂)을 배치하여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을 대칭으로 놓은 것이다.
또 동·서원(東·西院)의 외곽 회랑터는 중원의 동·서 회랑터에 대응하는 위치에 남북 길이가 전자의 것보다 약간 짧게 북쪽으로 뻗다가 내곽 쪽으로 꺾여 금당터 북쪽에서 폭넓게 북으로 뻗은 동·서 승방터에 연결되고, 이 승방터의 북단에서 가람 중심축에 놓이는 강당터 좌우측과 연결되는 북회랑터와도 연결된다. 그러므로 중원 북회랑터 북쪽에는 중원 남북 중심축선상에 거대한 강당터가 놓이게 된다.
건물의 배치는 거의 평지상에 하였는데 남쪽의 중문과 연결되는 남회랑터 앞과 강당터 북쪽에 동서로 길게 놓인 북승방터 앞에 석축으로 이루어진 축단을 두고 있다. 즉 미륵사의 가람은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의 가람으로 동·서 및 중원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각 원에서는 중문과 탑·금당을 1동씩 두어 소위 일탑식 가람을 동서 축선상에 나란히 배치하고, 강당은 중원 북쪽에 하나만 두고 있다.
또 중원에는 목탑을 두고, 동·서원에는 석탑을 두어 3금당(金堂) 3탑식(塔式)을 이룬 것도 창건연기에 관한 삼국유사의 '…당(堂), 탑(塔), 랑(廊), 무(廡), 삼소창지(三所創之) …'란 기록과 일치하며, 우리나라 고대가람으로서는 특이하다.
그리고 이 중심(中心) 사역(寺域) 외에 서편에는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 건물터가 있고, 북편에는 조선시대 가람터가 확인됨으로써 백제 이후 계속된 미륵사의 모습과 하한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역(寺域) 남측에는 거대한 동·서 연못지가 있었는데 산 흙으로 메워 터를 닦은 것임이 밝혀졌다. 그 공사의 규모와 조성방법 또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각 원의 금당(金堂)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중원의 금당이 동·서 금당보다 규모면에서 조금 크다. 특히 금당은 바닥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높이 1m 정도의 주춧돌을 마름모꼴로 놓았으며, 초석 위는 귀틀목을 걸친 흔적이 있어 금당 바닥에 빈 공간을 만들어 바닥마루의 습기(濕氣)에 대비한 것 같다. 또한 사지(寺地) 전역에 있는 고려·조선시대의 건물지에서 온돌시설(溫突施設)이 조사됨으로써 온돌의 발전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토된 유물은 기와와 토기가 주류를 이루나 금속, 목재, 석재, 유리 등 다양하다. 기와는 백제 기와로부터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까지 다양하게 출토되었으며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창건시기인 백제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인근에 공방지를 두어 조달하였을 것으로 알려졌다. 종류는 수막새, 암막새, 평기와와 서까래 끝에 붙이는 녹유연화문연목와(錄釉蓮花文椽木瓦), 용마루 끝을 장식하는 치미(鴟尾) 등이며 '미륵사(彌勒寺)', '금마저관(金馬渚官)', '묘봉원(妙奉院)', '연우사년(延祐四年)', '만력십오년(萬曆十五年)' 등의 문자를 새긴 기와도 전 기간에 걸쳐 다양하게 수습되었다.
사역에서 출토된 '만력십오년(萬曆十五年)(1587)'과 '만력십칠년(萬曆十七年)(1589)' 명(銘) 기와를 통해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절이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미륵사지 내에는 이들 건물지와 함께 서쪽 금당지 앞에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석탑 1기가 일부 파손된 채 남아 있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탑 중 건립연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원 석탑터 주변에서 출토된 부재로 동원(東院) 석탑의 복원 안(案)을 연구한 결과 9층임이 밝혀져 1993년 동탑을 복원하였다. 목탑 역시 복원 안이 마련되어 1997년 개관된 전시관에 그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동·서원의 남회랑 앞에는 당간지주가 각 한 기씩 모두 2기가 있는데, 이중 서쪽의 것은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당간지주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석(石) 당간이었음이 밝혀졌다.
한편 무왕은 왜 미륵사와 같은 커다란 사찰을 건립하고, 왕궁에 천도를 하거나 별도를 둘 정도로 익산에 공을 들였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당시 백제의 상황을 보면 선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침략 등에 많은 국력을 소비하였으며, 선왕인 위덕왕의 경우 정치적 입지가 아주 좁았던 상황이었다. 위덕왕 다음에 바로 창왕이나 법왕이 뒤를 이엇으나 단명하였고, 왕권은 일개 토후세력의 권력과도 같을 정도가 되었다. 그것은 위덕왕의 선대인 성왕의 무덤에 사용되었던 부재들의 재질에서도 확인된다. 이때 권력은 있으나 왕권을 차지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였던 지방 토후들은, 어느 정도 법통을 갖춘 서동을 찾아 옹위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일설에 서자라는 무왕 역시 수도가 아닌 변방에 숨어살다가 자신의 힘으로 즉위하기보다는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부합된 결과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
그 뒤 익산의 토후들은 무왕을 내세워 익산 천도설 또는 별도설을 계획하면서, 거기에 필요한 조건을 해결해 나갔을 것이다. 2009년 1월 14일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기는 미륵사 건립에 소요된 비용을 제공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적고 있는데, 이런 것이 그 중 한 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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