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18. 왕과 왕실을 위한 사찰 익산제석사지(益山帝釋寺址)

꿈꾸는 세상살이 2010. 1. 27. 11:17

익산제석사지(益山帝釋寺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247-1번지 외 인근 일대 24,665㎡가 오래된 백제의 사찰지로서 1998년 5월 12일 사적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제석사지는 일부 국유의 토지와 일부 사유지로 구분되어있으나 마을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서 절터는 많이 훼손된 상태다.

 

백제 무왕이 수도를 왕궁평으로 옮기려고 지은 왕궁면 왕궁리의 궁궐 근처에,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중심불상으로 모신 절이 있던 자리를 말한다. 이 지역은 1913년까지 제석면(帝釋面)이라 불릴 정도로 유래가 깊은 곳이다. 1942년 탑터로 생각되는 지역에서 ‘제석사(帝釋寺)’라고 적힌 기와조각과, 인동문와당(忍冬紋瓦當)이 발견됨으로써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여기에서 암막새, 수막새, 인각와, 명문와 및 평기와 조각 등 7세기 전반부터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들과 석기류가 다량 출토되었다.

또 정역사명(丁易寺銘)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통일신라의 전형이며, 제석사명(帝釋寺銘) 기와는 고려시대의 전형이다. 그러나 백제의 제석신앙과 아울러 미륵사지, 왕궁평성 등에 비추어보면 백제시대 왕실의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가 멸망한 후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는 동안 기와를 새로 얹거나 가람을 보수하는 등 의 작업이 있었음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백제시대의 사찰이라하더라도 미륵사는 미륵하생신앙을 바탕으로 3원3가람의 일반사찰이었으며, 제석사는 1원1가람으로 출토된 관궁사명 기와로 보면 왕과 왕실에서 섬겼을 사찰로 보는 견해도 있다.

특히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암막새가 있었는데, 이 드림새의 중앙에 도식화된 귀면문(鬼面紋)이 있고 좌우 양단을 향해 인동당초문이 유려하게 뻗어있었다. 당초는 줄기가 꺾이는 곳마다 오엽(五葉)의 인동화(忍冬花)가 활짝 피어있으며, 중앙의 귀면문(鬼面紋)은 커다란 눈과 코 그리고 크게 벌린 입을 보여주면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놓고 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1965년 백제 무왕의 궁터라고 전하는 왕궁평 성안의 석탑에서 발견한 유물과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제석사지는 몇 개 남아있지 않은 백제사찰지라는 중요성과 함께,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라는 문헌기록에 그 이름이 남아있다. 백제 무왕이 왕궁리 성지에 천도한 후 세운 사찰이며, 무왕 40년(貞觀13년) 639년 겨울인 11월에 벼락으로 불당과 칠급부도(七級浮屠), 낭방(廊房) 하나가 전소되면서 폐사되었다. 그러나 제석사 목탑 아래의 심초석에 넣어두었던 불사리 수정병과, 동판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넣은 옻칠상자는 무사하여 다시 사찰을 지은 후 안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에 사리병의 뚜껑은 봉해졌고 전혀 열리지 않아 당시의 대왕 즉 무왕에게 가지고 갔다. 대왕은 법사를 시켜 참회하고 열어보니 쉽게 열리므로 많은 궁인들이 보았는데, 그 안에 사리 6개가 모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지은 갱조사(更造寺)의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으며, 사리를 옮겨놓은 탑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때는 국보 제289호인 왕궁리 5층석탑이 그 탑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1965~1966년의 해체 보수공사 때 탑에서 발견된 사리는 6개가 아닌 16개였으며, 사리함 역시 동제가 아닌 금제인 것으로 보아 다른 곳을 추측하게 한다.

1993년 11월부터 1994년 1월까지 실시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결과 목탑지, 금당지, 강당지 등의 기단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유적에서는 처음으로 암막새가 출토되어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는 2007년 6월부터 2008년 8월까지 1차 조사를 하였고, 2008년 12월부터 2009년 10월 현재까지의 2차 조사보고를 실시하였다.

이 제석사의 중건에 대한 근거가 되는 동제 금강반야바라밀경과 기타 사리병, 사리함 등과 같은 유물이 지척의 왕궁리 오층석탑 해체 조사시에도 발견되어, 두 탑은 동시대인 백제 말기의 유물로 보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

제석사지는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중문을 거쳐 목탑, 금당, 강당, 승방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가졌다. 강당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회랑을 따라 길게 지어진 건물이 있었고, 중문에서 회랑을 거쳐 동서건물로 이어지는 대가람이었다. 목탑과 불전 사이, 그리고 불전과 강당 사이는 건물을 거의 등간격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중문에서부터 강당까지의 사이를 좌우 동서회랑(廻廊)으로 구획한 1탑 1불전의 가람배치임이 확인되었다.

중문에서 강당까지는 약 140m, 중문을 중심으로 동서로 이어진 ㄷ자형 회랑의 간격은 약100m로 보면 백제의 사찰중 단일사찰로는 최대의 규모이다. 또 강당의 중앙에서 동쪽회랑까지는 약42.4m이며, 회랑의 폭은 7.8m이다. 이는 미륵사의 회랑폭이 6.8m였던 것에 비하면 백제사찰중 최대임을 알 수 있다. 동쪽과 서쪽에 세워진 동서건물은 회랑의 안쪽의 동일선상에서 시작하여 바깥쪽으로 폭 13.2m를 가진 건물임도 확인되었다. 이 수치는 백제사찰이 가지는 일반적인 회랑끝 동서건물의 폭과 유사하다.

강당지 중앙에서 금당지 중앙까지는 약46.68m이며 건물간 간격은 25m이다. 두 건물의 사이는 걸어다닐 수 있도록 폭 80~96cm의 도로가 연결해주고 있다. 금당지 중앙에서 목탑지 중앙까지는 약 41.7m, 둘 사이는 17.26m이다. 목탑지에서 중문의 기단부까지는 14.6m, 중문의 기단부 동서폭은 약 23.56m로 밝혀졌다.

판축을 다지는 흙을 운반하던 계단도 드러났으며, 계단의 발판 폭은 30~40cm, 계단 하나의 높이는 15~24cm였다. 흙을 다진 판축에서 한 켜의 두께는 대략 5~10cm를 이루며 약25개층으로 이루어진 것은 일반적인 내용이다. 금당의 서쪽에서 가로21.5m, 세로 20.8m의 건물기초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제석사의 조성이나 건물의 변형과정을 밝힐 자료로 기대된다. 이 기초부는 두께 약1.3m의 정교한 판축부를 가지고 있다.

목탑지 심초석의 중앙에는 가로 60cm, 세로 26cm, 깊이 18cm의 사리공이 있다. 사리공의 형태는 장방향으로서 언뜻보아 비석 자리로 전하여 왔는데, 이 때문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속설을 때문에 오래토록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심초석이 지상으로 오는 예는 드물기는 하지만, 그만큼 심초석 하단의 판층을 단단하게 하는 기술적인 문제가 따른다고 보아야 한다.

내가 세 번째 방문했던 날은 이 심초석의 판층을 확인하고 있었다. 자연과학시간에 배웠던 여러 개의 지층이 퇴적층을 이룬 듯이 2m도 넘는 깊이의 흙다짐층이 정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은 마치 설날에 먹던 무지개떡과도 같았다. 지금처럼 무거운 기계도 없이 작은 나뭇공이로 다져서 쌓는 기법은 어리석은 듯이 보이지만,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고도 전혀 기울지 않는 기초라는 데 감탄할 따름이다.

목탑의 대략 규모는 기단 한 변이 12m, 기단의 높이는 1.2m~1.5m 내외였을 것으로 판단한다. 관세음응험기에 칠급부도가 소실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어 목탑의 높이는 7층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처음 제석사일 것으로 추정하여 발굴한 곳도 이 목탑지이며, 다른 곳은 민가와 경작지 및 묘지로 조성되어 그 흔적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제석사지의 발굴은 이 목탑지를 근거로 하여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금당지의 조사 발굴에서는 하층기단이 발굴되었고, 상층기단의 지대석이 빠져나간 흔적을 발견하였다. 대신 인근 민가에 보관 중인 석재 중에서 미륵사지와 같은 이중기단의 석재가 발견되어, 이곳 역시 이중기단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또 한 가지 상층기단은 밀림방지턱이 있는 지대석위에 면석과 갑석을 올려놓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부여 부소산 서복사지, 금강사지, 익산의 미륵사지, 고창의 선운사 면석 밀림방지 형식과 같은 백제 특유의 기단형식이다.

금당지의 계단은 원래 서측에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고, 북측과 동측은 민가 건물로 인해 발굴하지 못하였다. 남측에도 남아있는 돌은 없으나 돌이 빠져나간 흔적으로 배열이나 위치를 가늠할 때, 계단의 규모가 폭4.6m, 높이는 70c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당지도 규모를 알 수 있는 돌이 남아있지 않았으나, 돌이 빠져나간 흔적으로 보아 동서로 52.7m, 남북으로는 18.4m, 면적은 969.68㎡가 된다. 또한 미륵사지의 강당지와 같은 단층기단의 구조를 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인 잔여 흔적을 보면 미륵사지와 마찬가지로, 채 50cm도 되지 않는 복토만으로 천년이 넘도록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백제의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한 후 백제의 중흥을 꾀하고자 했었다. 당시 미래의 현신불(現神佛)인 미륵신앙(彌勒信仰)이 백제불교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기에 호국적인 나라의 대원찰(大願刹)로 미륵사 대가람을 창건한 것이다. 그리고 왕궁리 궁궐의 근처에는 제석천(濟釋天)을 주존으로 모시는 제석사를 창건하여 왕실의 번창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천도설은 일본 경도대학의 마끼다에 의해서 제기되었는데, 1970년에 발간한 그의 저서 ‘육조고일관세음응험기(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의 연구’에 적고 있다. 최근 국내 사학자 중에서도 주장하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왕손을 천제(天帝)의 후손으로 신격화 시켜오다가 불교수용 이후에 이를 제석신앙의 형태로 바꾸었다. 다시 안으로는 왕실의 권능을 불교에 의해 신장시키고 보호해 나가는 한편, 밖으로는 절대자의 힘을 빌어 안민(安民)하는 기능을 하고자 제석사가 창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기록에도 왕이 창건한 내제석궁에 행차하였다는 것과, 고려태조 왕건이 창건한 10대 사찰에 내제석사와 외제석사가 있어 그 맥을 같이 한다. 이런 호국불교의 예는 신라의 황룡사와 백제의 미륵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미륵사지에 민가가 들어서지 않은 것에 비해, 제석사지에는 인가가 많이 들어서서 마을을 이루었다. 바로 옆에는 물론이며 사찰의 경내를 가로지르는 길이 있는가 하면, 일부는 논으로 혹은 집터로, 일부는 민간인 묘로 사용되는 실정이다. 말로만 전하던 제석사지가 최근 부지를 매입하여 발굴을 서두른 결과로, 백제 최대의 단일사찰이며 왕궁에 세워진 왕실사찰이었음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심초석

 

 

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홈을 판 석재받침

 

부지에서 발굴된 석재들

 

 

 

 

 

발굴현장

 

판축이 잘 나타나있다.

 

 

 

판축 확인후 메우는 장면

 

 

제석사지 전체 면적

 

  

 

 

인근에 있는 민가를 포함하여 더 넓게 발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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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10.01.27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