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사 삼존석불(胎峰寺 三尊石佛)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496번지의 태봉사에 있는 삼위(三位)의 석불상은 1971년 12월 2일 시도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삼존석불은 태봉사의 소유로 되어있다.
태봉사는 연동리의 나즈막한 태봉산 북쪽기슭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불교태고종에 소속된 사찰이다. 태봉산의 유래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아들 셋을 얻었는데, 그 태를 묻었다는 전설에 따라 산 이름을 태봉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태봉사는 태봉산에 있는 절이라는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는 백제시대의 수막새와 중국 육조시대의 동경(銅鏡)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 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34년 심묘련화(沈妙蓮華)가 3대 독자인 아들 박상래(朴祥來)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산신기도를 드리다가, 산신의 현몽으로 아미타삼존불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이어서 1947년에 요사채를 지었고, 1955년 묘련화의 아들 제공(霽空)이 주지로 부임하여 절 이름을 태봉사로 정하였다. 아들을 점지하는 영험이 있다고 하여 지금도 득남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1957년 대웅전을, 1962년에 칠성각, 1992년에 삼성각을 지었으며, 1996년에는 한국불교영산회연수원을 설립하였다. 지금의 주지인 혜안(慧眼)스님이 무형문화재 영산회상작법의 전수자로 지정되어 있는 때문이다. 최근에는 지장전(地藏殿)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이 불상은 파괴되어 방치되던 것을 1945년 2월 5일 보수하여 태봉사의 극락전에 모셨다. 크기가 212cm에 달하는 부채꼴의 거대한 한 장의 판석광배(板石光背)에 부조기법으로 새긴 석일광삼존불상(石一光三尊佛像)이다. 최근에 석물을 칠한 결과 얼굴과 두상의 형태가 변하였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인 본존불상은 높이 68cm로 사각형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로 앉아있는데, 왼손은 내려 배에 대고 오른손은 들어 가슴에 댄 특이한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머리에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둥글고 원만한 얼굴은 이목구비가 작고 규격화되어 단정한 인상을 풍긴다.
육계(肉桂)는 낮고 나발(螺髮)의 머리칼은 촘촘한 편이다. 얼굴은 둥글고 원만하지만 이목구비가 작고 규격화되어 있다. 체구는 얼굴에 비해서 빈약한 편인데 어깨나 손이 투박스럽게 표현되었으며 무릎도 양감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통견(通肩)의 불의(佛衣)는 옷주름 처리에서 형식적인 면이 보이며, 무릎을 덮어 내린 자락은 방형의 대좌까지 내려가 상현좌(裳懸座)를 이룬 것 같지만 호분(胡粉)때문에 확실하지 않으며, 두광(頭光)에도 연꽃을 표현한 듯 보이지만 이것 역시 선명하지 않다.
본존불의 양쪽에 있어 보좌하는 듯한 협시상(挾侍像)은 높이 77cm로 보관(寶冠)을 쓰고 합장한 보살입상인데, 얼굴은 본존상(本尊像)과 비슷하지만 체구는 날씬한 편이다. 오른쪽 협시상은 민머리칼의 동자승으로 손같은 세부표현의 투박성 외에는 역시 날씬한 모습에 보관(寶冠)을 쓰고 합장한 것으로서 나한상이라기보다는 지장보살(地藏菩薩)로 보인다. 한편 왼쪽의 협시상은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으로 추정되므로, 이 삼존불상은 아미타삼존상(阿彌陀三尊像)일 것으로 추정되며, 제작연대는 백제시대로 여겨진다.
불교의 전통적인 의식을 영산작법(靈山作法)이라 하는데, 영축산에서 처음 이루어짐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 가미된 음악을 우주만물 조화의 신인 梵天人(범천인)이 불렀다하여 범패(梵唄)라고 한다.
범패를 범음(梵音)이라고도 하며 현재 전하는 불교음악의 총칭이다. 반드시 범패승들만 부르는 전문적인 음악이며, 가곡, 판소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성악곡으로 꼽힌다. 한국의 범패는 삼국유사 월명사(月明師) 도솔가에 나오며, 일본의 자각대사(慈覺大師)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당풍과 신라풍, 일본풍이 있다고 언급함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신라풍을 향풍(鄕風), 일본풍을 고풍(古風)이라 하기도 한다.
진감국사(眞鑑國師)는 중국의 창주정관사(滄洲正寬寺) 신감선사(神監禪師)의 문하에서 30년 간이나 수학하여 경학과 범패를 이수하였다. 신라 진흥왕 5년 830년에 귀국한 진감국사는 하동의 쌍계사(雙溪寺)를 창건하고 경학(經學)과 범패를 주석(駐錫)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고향인 금마를 다녀가실 때마다 완주 용진면의 봉서사(鳳捿寺)와 익산 삼기면의 태봉사(胎峰寺)에서도 주석하셨으니, 그의 제자들이 면면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 봉서사와 태봉사의 계보를 보면 청허휴정(淸虛休靜 일명 西山) 대선사는 진묵일옥대선사(眞默一玉大禪師)에게, 다시 해운스님, 수산스님, 덕봉스님, 영봉스님, 일응스님, 제해스님, 창수스님, 금하스님, 호경스님, 성암스님 등으로 전해오고 있다.
영산작법(靈山作法)은 1998년 1월 9일 전라북도 시도무형문화재 18호로 지정되었다.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밖에 내거는 것으로 시작되는 영산재는 전북의 영산작법과 서울의 영산작법에 약간의 차이를 둔다. 이 행사 때 범패가 곁들여지는 것이다.
영산작법의 기능전수자를 보면 범패부에서 실상사의 일암 장상철, 동고사의 영담 김용욱, 천고사의 보운 서준석, 선인사의 인봉 김종철, 석불사의 휘암 이석준, 보탑정사의 지산 송완진, 혜봉사의 혜성 전정옥 등이 있다. 또 판복부에서는 극락암의 석정 이강선, 동고사의 법륜 김형민, 도인사의 도정 이경춘, 실상사의 우하 박찬호, 태봉사의 영산 박희영 등이 있다. 이어서 바라부에서는 운수사의 금담 김한창, 원각사의 도안 정철환, 봉서사의 법원 서영준, 도덕사의 청임 정천환, 광덕사의 김완섭, 율곡사의 이기행, 신선사의 김선봉, 용화사의 정명운, 보안사의 설종환 등이 있다.
또 안차부에서는 원각사의 춘명 김희석, 혜봉사의 덕운 강재묵, 극락사의 남파 유정동, 도덕암의 장유 박남선, 일광사의 승천 황대주가 있고, 회적부에는 보문사의 행산 유점동이 등록되어 있다. 여기에 적힌 스님들은 법명대신 세상의 이름을 적었으며, 원로스님들은 당호(堂號)를 적었으니 일반적으로 부르는 이름과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벌써 15년이나 지난 일이다. 바로 옆집에 살고 있어서 코흘리게 때부터 같이 지냈던 친구가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며 땅 속에 묻고 돌아서서 바라보던 곳에는 작은 절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우리지역의 사찰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그 절이 바로 태봉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무덤에도 몇 번 가보지 못했지만, 그 길을 지나칠 때마다 태봉사는 커다란 이름표를 달고 나를 부르는 듯하였다.
처음 태봉사에 들르던 날은 화창한 봄날이었다. 한적한 시골의 드라이브길에서 정말 우연찮게 들른 곳이었다. 관심도 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경내를 그냥 한 바퀴 돌아보고는 그만이었다. 다음에 들렀을 때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여기저기 보이는 곳마다 자갈이며 둥근 관들이 쌓여있어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안보이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몸이 떨어져있으면 마음도 떨어진다고 하더니 그후에는 이군의 묘소에도 가보지 못했다. 태봉사에 들를 때마다 친구에 대한 미안함이 앞섰다.
이번에 들린 태봉사에서는 주지스님을 우연찮게 만났다. 경내를 어슬렁거리다가 누군가를 만나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으니, 대뜸 그러라고 하신다. 너무나도 시원스런 대답에 겸연쩍어 말을 돌렸다. 다른 곳에서는 도난이 염려되어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더라고 하였더니 너털웃음을 웃는다. 문화재라는 것이 어느 누구의 개인소유물도 아니며, 사진을 찍으라고 보여주어서 도난을 맞고, 안 보여주어서 도난을 맞지 않을 것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였다.
이 태봉사의 삼존석불은 오래되어 표면이 훼손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석불에 호분(胡粉)을 칠하여 새로운 맛을 주고 있다. 그러나 오래된 문화재가 어느 날 갑자기 새롭게 화장(化粧)을 하고나니 조금은 어색하게 보인다. 근래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는데, 어느 때에 누가 그랬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어느 누가 그랬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잘하려다가 실수를 하였을 때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누구보다도 바로 그 사람 본인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도 그렇게 다르게 보일 것은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잘하려다 실수로 잘못된 일까지 들추고, 일일이 혼내준다면 어느 누구도 더 잘 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잘한 일에는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설혹 잘못한 경우에 있어서도 올바른 지적을 하되 적극적인 격려가 필요하다 하겠다. 이런 것이 곧 부처님의 마음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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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10.02.03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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