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토성(益山土城)
익산토성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산52-2번지에 있는 사유지로 면적이 200,430㎡에 달한다. 이 성곽은 정치와 국방에 필요했던 것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92호로 지정되었다.
이 토성은 익산토성, 오금산성, 보덕성으로 불리는데 익산시 금마면 오금산 정상에 위치한 것과, 주봉을 보덕산이라 부르는데서 비롯되었다. 배후에는 미륵산이 있고 앞으로는 익산평야가 훤히 보이는 곳이다. 남쪽으로 작은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으로, 흙과 돌을 사용하여 쌓았는데 정식명칭은 익산토성으로 정하였다. 또 백제의 무왕이 어렸을 적에 마를 캐다가 금을 발견하였다는 오금산이 바로 이 산이다.
오금산(五金山)은 익산시 금마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1.5km 거리에 해발 125m의 낮은 산이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작은 계곡을 에워싸며, 동서로 뻗은 100m 내외의 산릉에 쌓은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으로 변형된 오각형이며 전체적으로는 삼각형에 가깝다. 포곡식은 성의 내부에 계곡이 있다는 것이므로 산의 능선이 여러 개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성의 길이는 690m, 성내 평지에서 수구까지의 높이는 40m, 산봉까지의 높이는 75m이며 남문지와 수구지, 건물지 등의 시설이 있다. 성곽의 북변은 185m, 동변은 138m, 그리고 서남쪽 모서리에서 북서쪽 모서리까지는 158m이다. 성지내의 면적은 약 201,861㎡로 61,170평에 달한다.
출토유물로 보아 축성 시기는 삼국시대 즉 6세기말 내지 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보덕성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서 기인한다. 보덕국왕(報德國王) 안승(安勝)이 670년 6월 금마저(金馬渚)에 자리잡은 이래로 684년 11월까지 보덕국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나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통일신라는 고구려 유민의 고구려 재건의지를 잠재우며, 백제의 중흥을 꾀하는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고구려 왕족 안승을 금마에 정착시키기도 하였었다. 1980년대 2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초기에는 토성으로 쌓았다가, 주요부위는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개축후의 남문지는 너비 6m, 높이 2.6m의 구축된 판축성벽이 확인되었다. 성의 내부에서는 위가 좁고 아래는 넓은 상협하광(上狹下廣)의 저장고도 발견되었다.
1980년 11월에 이 산성의 문지(門址)를 발굴 조사하였던 바, 기초부분은 전면에 높이 45cm, 너비 60cm, 두께 50∼60cm의 장방형 석재를 사용하여 단벽(段壁)을 쌓았다. 벽석 이면에는 할석 등의 잡석으로 쌓아 적심을 너비 5.2m의 두께로 메웠고, 적심석 이면에는 모래와 점토를 번갈아 채워 판축형식(版築形式)의 적심을 이루고 있다. 남쪽 정문의 문지는 너비가 4.8m, 길이 4.4m이며, 바닥에는 돌을 깔았던 흔적이 보이고, 출입구 위에는 문루가 설치되었던 듯하다. 성의 두께는 5.5m이다. 성안에서는 토기조각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도연(陶硯), 토기삼족고배(土器三足高杯)와 감대, 그리고 평와(平瓦) 등이었으며, 여기에 원형인(圓形印)으로 모(毛), 기사(己斯)라고 찍은 파편이 출토되었다. 한편, 1984년 7월부터 9월까지 2차 발굴이 진행되어 수구 내의 남문지를 발굴한 결과 서쪽으로부터 너비 6m, 높이 3m의 내외 석축 기단 위의 토루를 판축하고, 그 전후면에 할석을 쌓은 호석렬(護石列)이 있었고, 일부에서는 구간 거리가 1.2m인 입주공(立柱孔)이 나타났다. 이 호석렬은 차츰 내려가다가 안으로 꺾이는데, 이곳 토루의 절단부에 남문 출입구가 있다. 이처럼 수구를 향하여 겹축하였던 토루는 2차 수축 때 파괴하여 석축벽을 설치하고, 수구 내부를 보토(補土)하여 광장을 설치하였음이 밝혀졌다.
또한 서쪽과 북쪽 성벽의 단면을 조사한 결과 너비 1m, 높이 0.6m 내외의 석담(石牆)을 쌓은 흔적이 있고 공호(空濠)도 확인되었다. 이 당시 발굴된 유물은 거의가 토기편이거나 와편류인데 백제 말기와 통일신라기, 고려시대기로 구분할 수 있다. 백제계 유물은 주로 수구내 광장과 남문지, 동남 우대지(隅臺址)에서, 통일신라계는 동남우대지에서, 고려시대계는 동남 우대지와 서남우대지에서 출토되었다. 또 성내에 저장용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유물로 볼 때 이 성은 백제가 전성기에 축조하여 오랫동안 사용하여오던 것으로 추정한다. 성 부근에서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과 세형동검(細形銅劍) 등의 청동제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어 이 성의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익산토성의 입구는 다랑논으로 이어지는 좁은 계곡이다. 그러나 이곳은 계곡이라고 해서 눈으로 나타날 정도의 계곡이 아니라, 그냥 언덕이나 등성이의 볼록한 부분이 아닌 곳이라는 정도이다. 한적한 시골길에서 요즘 보기 드문 비포장도로를 가다가 사적지 안내판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 길도 지금은 차를 타고 달리지만 그 옛날에는 등짐을 지어서 성을 쌓고, 뛰어서 성을 방어하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익산토성은 익산지역의 다른 성들에 비하여 거의 완벽하다 할 정도로 많은 부분이 발굴되었다. 물론 그렇다하더라도 땅위로 남아있는 건조물은 없으며, 땅 속에 묻혀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처음 산성을 올라가는 길에는 어느 등성이를 택할 것인지 몰라 헤매기도 하였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엄연한 방문길이 있어 쉽게 탐방할 수 있었다. 산성의 문지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관계로 나는 그 뒤로도 답사방문의 목적으로 네 차례나 더 찾았던 성이다.
하늘이 흐려있는 산성은 아무리 낮이라 하여도 혼자걷기에 무리가 있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바짓가랑이가 척척 휘어 감겼다. 땀은 비오듯하는데 무성한 숲속에 나 혼자라는 사실이 두렵게 만들었다. 이 산성에서도 내고장 익산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전투가 있었을거라 생각하니, 혹시 떠나지 못한 어느 영혼이 아직도 머물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실상 그런 영혼을 만난다면 지켜줘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할 판인데 두려움만 느끼고 있었으니 나는 이율배반적인 사고에 빠져있었다.
익산이 옛 마한의 중심지역이었다면, 익산에서는 크고작은 전투나 지역변형이 무수히 일어났을 것이다. 마한이 백제로 통합될 때에도 익산은 그 중심에 있었다. 현재의 익산토성에 서서 바라보면, 해자 건너편에 있는 산 아래 경사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금마시가지는 한눈에 들어오는 천연의 요새임에 틀림없다.
위: 토성가는 길 봄
위 : 토성가는 길 가을
위 : 문지가 있는 곳의 정면에는 석축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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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10.02.10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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