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장(石匠)
석장(石匠)이란 석조물(石造物)을 제작하는 장인을 일컬으며, 석장의 주요 작품으로는 사찰이나 궁궐 등에 남아있는 불상과 석탑, 석교(石橋) 등의 조형물을 들 수 있다. 현재 석공예 명장은 전국에서 이재순, 이의상, 윤만걸, 이재휴, 김영찬, 임동조, 장공익, 송종원, 오금석, 백남정, 도우호, 김상규, 김진한, 백남정 등이 있으며, 전라북도에서는 권오달과 김옥수가 명장에 올라있다. 전라북도는 2006년 11월 10일 시도무형문화재 제36호로 석장을, 그 예능보유자로 김옥수를 지정하였다.
익산은 전국에서 가장 질 좋은 화강암이 있어 고래로 유명했던 곳이다. 익산출신 아사달은 백제에서 돌을 다루는 최고의 장인이었으며, 익산의 돌로 만든 유구한 작품들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것이 당연시 될 정도다. 이런 것들은 익산돌이 단단하면서도 이물질이 적어 오랫동안 부식되지 않는 장점을 가진 때문이다. 황등을 위시하여 함열, 낭산, 삼기, 여산, 금마에서 많은 양의 화강석을 만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황등돌은 특히 유명하여 국회의사당이나 독립기념관, 청와대영빈관에 사용되는 등 최고급의 자재로 통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대 최고의 석탑인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도 황등돌을 사용한 작품이며, 노무현전대통령의 묘역에도 황등돌을 사용하였다.
이렇듯 삼국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채로운 석조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어 우리나라의 석조물 제작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석공예의 주재료는 물론 석재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화강암(花崗巖)이 꼽히며, 이 밖에도 납석(蠟石)과 청석(靑石), 대리석(大理石) 등이 활용되고 있다.
석공예 기술을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익산지방의 명성에 걸맞게 이 지역만의 독특한 도제제도(徒弟制度)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에게서 배울 것인지를 선택하고 마음속의 스승으로 정한 뒤, 그 스승으로부터 가르치겠노라는 승낙을 받아야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나이가 어려서, 어떤 사람은 적성이 안 맞아서, 때로는 석공예에 대한 자긍심이 부족하여 의견을 모으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황등의 제1세대 석공들은 양팔수, 오순철, 김기석, 박복수, 김삼득, 이종천, 이현우씨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다음에 이어지는 2세대 석공들도 오륙십대를 넘은 사람들로 오영근, 김은중, 한한식, 허한천, 김수만, 문익주씨 등 많은 기술자들이 있는데 모두 황등태생이다. 물론 이들외에도 타지에서 모여든 기술자들이 허다하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도 무형문화재 석장의 기능보유자이거나 석공예 명장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돌다루는 일을 배우는 과정도 그리 쉽지 만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나서도 다시 내일 일을 하기 위한 도구를 손질하는 것이 도제자의 몫이었다. 어쩌면 일을 배우는 것보다 도구를 손질하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의 고된 작업이었다. 무쇠덩어리를 불에 달궈 두드려가면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고, 날끝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 담금질을 하는 것은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며,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금처럼 전문가공기계가 없었던 시절이라서 정과 쇠망치에 의존하여 돌을 다루는 것이 전부였었다. 그러기에 이런 일은 해가 진 다음부터 자정이 가까울 때까지 계속되었고 날을 새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이것은 돌을 잘 다루는 일은 돌의 성질과 도구의 성질을 잘 알아야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였다. 연장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목적물을 잘 다룰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스승과 제자는 이렇게 한 집에서 기숙하며 호흡을 맞추고, 기술을 전수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제자가 독립할 때까지는 누구의 제자라든가, 누구의 스승이라는 단어가 항상 따라다니게 된다. 위의 명장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가르친 스승이 익산출신이었다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요사이 사용되는 기계절단이나 기계가공은 예전에 익혀왔던 돌의 성질을 이용한 조각기술이나 돌다루는 기술과는 다른 각도에서 평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정교한 가공을 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조각을 한다 해도 둘을 같은 방법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장은 예전의 구상과 설계, 그리고 수가공에 의한 조각과 설치까지 모든 일련의 과정을 익히고 표출해내는 훌륭한 예술가의 경지에 이른 것을 일컫는다.
날아갈 듯한 용이나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은 사자를 조각하던 옛 수련자들을 보면서 자란 나로서는, 지금 눈을 감아도 생생한 기억으로 떠오른다. 신작로를 벗어나 돌간을 향하는 황소도 힘에 겨운 듯 게거품을 물면, 달구지에는 으레 집채만한 돌이 실려오기일쑤였다. 작업할 공간을 찾은 석공이 자리를 지정해주면 모두 협심하여 돌을 내렸다. 이런 돌은 대게 커다란 조각품을 만드는 재료가 분명하였다. 돌의 크기와 두께, 그리고 내가 만들 작품의 크기를 눈대중하고 나면 작품 설계가 끝나는 것이다. 다음은 미리 갈아놓은 먹통에 대칼을 댔다. 사실 대칼이라 하여도 날카로운 형상은 아니며, 대나무살을 얇게 썰고 날끝을 잘게 쪼개어 몽당붓처럼 만든 것이다. 여기에 먹물을 묻혀 본을 뜨고 밑그림을 그린다.
이때 돌의 크기가 맞지 않으면 적당한 크기로 쪼개는 데, 쐐기를 사용하였다. 정으로 돌에 흠집을 내고 그 속에 쐐기를 넣어 돌을 벌리는 작업인 것이다. 좀더 안전하고 정교하게 하려면 쐐기의 간격을 10cm 이내로 하는 경우도 있고, 거칠고 대략적인 윤곽을 내려면 쐐기 간격을 더 넓게 하면 되었다. 다음은 정으로 다듬는 작업이다. 내가 원하는 부위를 쪼아가면 되는데, 목부분처럼 한 번에 많은 양을 떼어낼 때에는 날정이라고 하는 혹떼기망치 또는 혹두기망치라 부르는 도구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단단한 돌은 어느 방향이 떨어져나갈지 분명하지 않으니, 이야말로 작업에 대한 경험이 많고 돌의 성질을 잘 아는 노하우가 필요한 것이다.
전체적인 윤곽이 드러나고 찰흙덩이를 붙인 것과 같은 모양이 되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정작업이 따른다. 이것은 하나하나 쪼는 수고가 필요하니 노련한 석공이라 하더라도 인내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정질 한 번에 잉어의 비늘만큼씩 떨어져나가니,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많고도 많은 노력이 따랐다. 거기에는 인내와 땀이 얼룩지고 세월을 이겨낸 흔적만이 남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한 달은 기본이고 많게는 여러 달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하지만 정작업에 노출된 표면은 거칠기 때문에 이를 다듬어 주어야 한다. 정에 맞아 움푹진푹한 표면을 고르게 하는 효과를 얻고자 모눈종이의 눈금과도 같은 줄눈망치를 사용한다. 이 망치는 도드락망치라 불리며, 망치가 닿는 면적만큼은 평평하여 높이를 맞추려는 방편이다. 정은 45도나 30도 등 필요한 각도에 따라 눕혀서 사용하지만 도드락망치는 90도에서 수직으로 내려치는 작업이다. 이때는 돌출된 상단면을 떨어뜨리는 작업임으로 부서진 돌은 아예 먼지가 되어 날아다닌다. 이쯤되면 석공의 건강은 거의 무방비상태로 보아야 한다. 이 도드락망치질에서는 초벌과 정벌이 있었으니 엉성한 줄눈과 좁은 간격으로 된 두 가지 도구를 사용하여 거친다듬기와 고운다듬기로 나누었던 것이다.
다음은 마무리공정으로 폭이 7cm내외인 외줄망치를 사용한다. 이는 노련한 기술자일수록 무를 곱게 채썰어 놓은 모양을 내는데, 그 곱기로 석공의 실력을 가늠한다. 예를 들어 수채화를 그릴 때 물기가 부족하여 얼굴에 붓자국이 남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이 자국이 얼마나 정교하고 작게 남느냐에 따라 조각품의 표면이 결정된다.
그림붓칠에서 물기가 마르면 다시 물감을 묻혀야 하듯이 석가공에서도 표면의 줄모양을 없애기 위해 반대방향으로 다시 외줄망치를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칫하면 또 다른 무늬를 내기 십상이므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치지 않는 공정이다. 다만 정으로 쪼고 다듬으며 매만지는 과정에서, 주저앉고 무릎꿇은 석공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작품일 때에 표면이 고와지고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여기에 마지막 혼을 불어넣으면 조각은 생기가 돌면서 예술로 거듭날 수 있다.
예전의 돌을 다루던 도구들이 보고 싶어서 불상조각부문의 명장 권오달석공장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옛 도구는 여기에도 없었다. 대신 무디어진 연장을 손질하는 수고를 덜기 위하여 여느 석공장처럼 텅스텐합금을 붙여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말로는 중석(重石)합금, 흔한 말로는 당가로이를 붙인 정과 쇠망치가 있을 뿐이었다. 효율(效率)과 성과(成果)를 위하여 시대에 맞게 개량하고 개조한 것들이다.
대한광업진흥공사의 주원재료에는 석탄과 석재가 있다. 이중 석재를 주로 담당하는 익산사업소에서는 예전의 익산석공도제제도를 모방하여 우수한 석공인을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또한 시에서는 매년 10월에 돌문화축제를 열어 익산돌의 우수성을 알리고, 석장의 기술을 전승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익산지방의 화강암 매장량은 10억 6천2백만㎥에 달하며, 황등에는 전국 유일의 전문석재가공단지가 있는데 인근에서 약 270여 개 업체가 성업 중이다.
품질좋은 화강석이 일상에 적용되면서 황등이 날로 번창하였으며, 황등은 돌로 인해 먹고 산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호황이던 때도 있었다. 한때는 조각이나 건축용으로 수출을 하여 그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으나, 요즘은 저가품에 밀려 극히 제한적인 곳에만 사용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지금은 상징성을 띠는 건물이나 구축물에서 아직도 황등돌을 사용하고 있어 면면을 이어가고 있다.
정성희씨가 시를 쓰고 조연구씨가 곡을 붙인 노래로 장애향씨가 부른 ‘석탑(石塔)’에는 석공의 한(恨)이 서려있고 부단한 노력의 혼(魂)이 들어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돌덩이
이름 모를 석공의 땀과 눈물이 흘러내리듯
은은한 너의 모습 은은한 너의 모습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돌덩이
이름모를 석공의 땀과 눈물이 흘러내리듯
은은한 너의 모습 은은한 너의 모습
바람이 놀다간 바람이 놀다간 너의 가슴속엔
석공의 땀이 어린 석공의 손때 묻은 징과 쇠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들려온다 들려온다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돌덩이
이름 석공의 땀과 눈물이 흘러내리는
은은한 너의 모습 은은한 너의 모습
바람이 놀다간 바람이 놀다간 너의 가슴속엔
석공의 땀이 어린 석공의 손때 묻은 징과 쇠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들려온다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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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10.02.17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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