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구일본인(세천)농장가옥(益山 舊日本人(細川)農場家屋)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 103-3번지에 2층 목조건물 1동이 있는데, 2005년 11월 11일 등록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옛 일본인 소유의 호소가와농장(細川農場) 기술자가 살던 건물로 면적은 106.78m²이며 소유주는 안삼길이다.
세천농장 가옥은 세천농장의 농업기술자였던 에토(江藤)가 1940년대에 개인주택으로 건축하였는데 현재도 사용하고 있을 정도다. 이는 에토주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전라북도에는 여러 일본인 농장이 있었는데, 관련된 자료가 전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당시 춘포에 집중되어있던 시설물 중의 일부를 살펴보면 그런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호소가와농장 가옥의 바로 옆집은 ‘중촌(中村)경로당’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이 건물은 옛날 건물은 아니지만 중촌이라는 마을 이름이 춘포리 54-4번지에서 최근까지 적용된 예이다. 또 바로 길 건너 앞 892-44번지에는 ‘중촌정미소’가 있다. 이곳역시 당시에 도정을 하던 곳이었으며, 지금은 많이 낡아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면사무소로 가는 큰길로 나와 서쪽으로 들면 1971년도에 ‘대장도정공장’이라는 간판으로 바꿔 단 커다란 정미소가 보인다. 이곳은 춘포리 116번지 일대로 호소가와 농장의 벼를 도정하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옛 건물도 남아있는데다가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상황이며, 문패의 형태로 보아 오래전부터 이 자리를 지켜왔음을 짐작하는데 부족하지 않다.
다시 춘포리 119번지 일대의 김성철가옥쪽으로 가보면, 한 건물에서 같은 주인이 오랫동안 살아온 때문인지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집의 대문은 항상 열려있으나 나처럼 무시로 드나드는 일반인들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 바로 뒤 춘포리 121-2번지에는 당시 병원자리였다는 마당 넓은 집이 있다. 형태나 구조로 보아 일반 주택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골에서는 수술전문 병원이 아니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외에도 인근에서는 일본식 건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해방 후에 지어진 것은 아닐 것이며, 농장주 말고도 행정이나 치안유지 등 다른 명목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들어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내용으로는 호소가와농장의 관리인이 3명이었던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정확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구전에 의하면 구로다(黑田)가 농장 관리인으로 있을 때에는 육군중령 1명과 육군소령 1명이 더 상주했었다고 한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익산의 농민들과 일반 백성들이 항일운동을 하고 민족의 자립심을 붙태우던 시기에는 그랬을 것이라는데 수긍이 간다. 그 시기를 유추해보면 1909년부터 1912년까지로 볼 수 있다. 적어도 이때에는 호소가와가 총독부와 일본을 움직여서 익산경찰서를 대장촌으로 옮겨놓았었다는 말도 있으나, 이는 현 익산경찰서의 서류를 확인한 바로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경찰서로 사용되었었다던 건물은 앞마당이 정원으로 꾸며진 음식점으로 사용중이다.
강점기에 항일운동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던 때는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서 민란이 일어나고 항일에 대한 민족정신이 싹트던 때에 우리 익산에서는 타 지역보다 먼저 그리고 더 강하게 움트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알아차린 지배세력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제재수단을 동원하였던 것이다. 그럼 이처럼 막강한 조직력과 영향력을 행사한 호소가와는 어떤 가문이었을까. 그의 가족은 일본 서남부 규슈지방의 구마모토현을 약 200년간이나 지배해온 귀족출신이었다. 그는 ‘대장신사’를 차리고 국가적 일곱 위패 외에 가문의 영웅 세천등효(細川藤孝)를 놓고 신으로 섬기더라도 정부에서 간섭하지 않았을 정도의 위세를 떨쳤다.
그런 호소가와는 자본금 15만원을 가지고 1904년 조선에 건너왔다. 그는 1909년에 850정보의 토지를, 1928년에는 전국에 약 3천여 정보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춘포지역을 대장촌(大場村)이라 부른 것은 호소가와가 그의 농장이 넓은 것을 두고 대장촌이라 지칭한데서 유래하였다. 농장이 설립된 후 나카하마 구니히코, 요시다 다케오, 후루가와 가시코 등 세 명의 농장장이 거쳐 갔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일본의 총리를 지낸 호소가와 모리히로는 이 농장주의 손자다. 그러니 그가 총리로 있었던 동안에 일본은 한국을 대등한 나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친일분자들이나 일본의 보수세력들이 한국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이유가 이런 맥락이라고 말하면 억지주장일까.
건물 지붕은 팔작지붕 위에 기와를 얹었고, 외벽은 나무판을 댄 비늘벽으로 마감하였다. 건물은 현재의 생활에 편리하도록 많은 부분이 개조되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바로 앞에 2층으로 오르는 직선계단이 있고, 계단 옆에는 복도가 있다. 1층 내부의 다다미방이 온돌로 바뀌었고, 칸막이벽도 없어졌다. 그러나 2층의 넓은 다다미가 깔려있는 반침이라든지, 벽체에 공간을 만들어 장식품을 두던 도코노마(床の間)가 그대로 남아 작은 벽장과도 같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방 앞 외부에는 발코니를 만들고 철제 난간을 설치하였다.
호소가와농장 가옥은 농업기술자였던 에토가 살았던 집이다. 그렇다면 농장의 사무실이며 농장장이 살았던 집 등은 일본인이 쫓겨 가면서 모두 자진하여 폐기하였고 일부는 우리 민족의 분풀이용으로 파손되었다고 보여 진다. 에토는 당시 이리농림학교에 유학 온 일본인들 중 한 명이었으며, 졸업 후 호소가와농장에서 일했다. 그는 넓은 농장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 크고 멋진 집을 지었었다. 해방 후에 피난민 출신의 한약사가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약방을 타지로 옮기면서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농장측은 부유한 일본인이 살던 대지 540평에 건평 35평의 건물을 임차하여 당시 주임이었던 김성철(金聲喆)이 사용하도록 하였었다. 해방 후 신한공사가 호소가와농장을 인수하였을 때에 김성철이 농장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세월이 흘러 정국이 안정되자 김성철은 나중에 익옥수리조합장을 역임하였으며 제6,7대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우리집에도 한 장짜리 국회의원 김성철달력이 벽에 붙어있던 시절이 있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기득권자의 위상을 느끼게 된다.
내가 어렸을 때 이웃에서 농사를 많이 짓던 사람이 있었는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그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성실하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강점기인 예전에 일본인 부농의 집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그들은 해방이 되자 일본인이 놓고 간 국유농지를 매각하는 정책에 편승하여 아주 유리한 조건을 가졌다고 들었다. 당시야 물론 거기에 상당하는 조건을 내걸고 명분도 내세웠겠지만, 그래도 어부지리가 많았었다고 느끼는 것은 지금에 생각해보아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확대해석하면 우리가 말하는 기득권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가지 요인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친일청산은 친일 행적자를 모조리 골라내어 처형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친일자는 명백히 가려내어 친일자라 명명하고, 그에 상응하는 제한을 두면 되는 것이다. 또한 애국자는 그 뜻을 기려 애국자라 명명하고 널리 알리며 그에 적합한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일 뿐이다. 기득권 친일파들이 자신의 부끄러운 행적을 지우거나 감추면서, 애국자의 후손들을 권세로 누르는 모습은 가히 목불인견(目不忍見)이요 꼴불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자손손 후손들에게 물려줄 이 땅의 역사를 왜곡하여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춘포에는 항일운동을 하시던 애국지사의 직계 1대자녀가 몇 분 생존해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들은 항일운동가족이라는 말을 내어본 적이 없다. 행여나 누가 알면 오히려 그 입을 막으려 회유하고 핍박하는 일상에 짓눌려버린 냉가슴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연로 하신데다가 세상을 달관하신 정도가 되었는데, 이분들마저 돌아가시면 우리의 항일운동사나 역사바로세우기는 어떻게 알려질지 걱정스럽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얼룩져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인근에 있었던 병원자리 (1)
인근에 있는 병원자리 (2)=현재는집이 헐리고 다시 지었다. =춘포가스가 영업중이다.
인근에 있는 나까무라 경로당 =어딘지 일본 냄새가 나는 이름이다.
인근에 있는 정미소 대장공장 간판= 당시에 있었던 정미소 중의 하나다 = 역사의 증인
그러나 현재의 간판은 나중에 다시 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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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10.03.03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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