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한일합방에서 익산 만세운동까지

꿈꾸는 세상살이 2010. 3. 8. 09:08

한일합방에서 익산 만세운동까지

 

1910년 8월 16일, 일본의 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는 조선의 내무대신 이완용에게 조선과 일본의 합의문을 내밀고 강요하였으며, 8월 22일 이완용은 결국 합의를 하고 만다. 1910년 8월 29일 이 내용을 조선의 27번째 마지막 왕인 순종(純宗:1874∼1926)이 선포하기에 이르러 이날이 우리의 국치일이 된 것이다. 1910년은 경술년(庚戌年)으로 경술국치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로써 대한제국(1897.10.12~1910.08.29)은 사라지고 치욕적인 강점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떤 이는 대한제국의 마감일을 합의서에 서명한 8월 22일로 보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날짜보다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 우리의 힘이 약했었다는 것, 우리가 전체를 위하기보다 개인의 안위를 먼저 챙겼다는 것, 지도자들은 주변의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보다 기득권 세력들의 현실안주가 우선이었다는 것들이다.

더하여 우리 국가와 민족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이들의 앞에 우리의 동포가 서있었던 역사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앞에서서 소리치고 윽박지르며 번드르한 사탕발림으로 현혹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끝까지 나라를 지키며 자기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렸던 숱한 애국선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이들이 바로 독립운동가였으며 혁명의 주동자들이고 광복쟁취운동가였다.

 

그 이전인 1904. 02. 23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는데 이를 제1차 한일조약 또는 제1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은 일본과 러시아의 협상이 진행 중인 1903년 10월부터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치밀한 계획으로 이지용(李址鎔), 민영철(閔泳喆), 이근택(李根澤)을 매수하여 추진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향후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되면 조선은 일본과 동맹하여 러시아를 대적하든지, 러일전쟁 중에 조선이 러시아에게 점령당할지 모르니 일본이 조선을 보호해주든지, 러일전쟁 중에 조선은 일본에게 필요한 전략적 지원을 하는 것 중에서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 어느 것도 우리마음대로 할 내용이 없고, 어느 것을 택한다 해도 일본에게 전쟁지원을 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조선은 일본의 속셈을 간파하고 1904. 01. 23 대외적으로 러일문제에 대한 중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은 한일의정서에 반대하던 이용익(李容翼), 길영수(吉永洙), 이학균(李學均), 현상건(玄尙建) 등을 연금한 뒤, 2월 23일 이지용과 하야시 사이에 전문 6조를 체결하고 말았다.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이 진행 중이던 1904년 2월 4일, 수십 척의 러시아 태평양함대가 여순항을 떠났다는 정보가 일본에 접수되었다. 이에 일본은 2월 6일 사세보에서 함대를 발진하여 2월 8일 저녁 여순항에 있던 러시아의 극동함대에 기습적인 어뢰공격을 감행하고, 2월 9일 제물포항에서는 14:2라는 우세에서 러시아 전함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1904년 2월 10일, 이미 공격을 끝내놓고는 뒤늦게 여순항에서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당시는 협상 중이던 때라 러시아의 관리들은 속수무책에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일본이 대륙에서 전쟁을 하기 위하여 상륙할 중요 항구로 여순항을 꼽았던 것이다. 한편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이미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언하고 버텼으나 1904. 02. 23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전쟁에 휩싸이고 말았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미국에서, 8월에는 영국에서 한국의 통치에 대한 종주권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감리를 승인받는다.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강대국끼리의 무력에 강세를 몰아 주워 먹기를 한 것이다.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에게 보호조약을 강요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11월 17일 각료들을 불러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였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수법이 악랄하기 그지없다.

11월 17일 일본 공사관에서 열린 회의가 부결되자,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어전회의를 제맘대로 열었으나 이 역시 부결되었다. 하야시공사는 최후수단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시켜 헌병사령관을 대동한 회의석상에서 1:1로 찬성여부를 물었다. 그러나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등은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였으며,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하였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5개 대신(五大臣)만을 참석시킨 회의를 다시 열었고, 외부대신 박제순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의 이름으로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을 체결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2차 한일협약 또는 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인데 제1조는 일본 정부는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일본 영사는 외국에서의 한국의 이익을 보호할 것, 제2조는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 제3조는 통감(統監)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면서 한국의 황제폐하를 내알(內謁)하는 권리를 가지고,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그밖에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설치해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한다는 것 등이다. 이로써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는 단어가 생겨나는 단초(端初)가 되었다.

 

1905년 11월 22일 일본은 통감부설치를 건의하고, 12월 21일 통감부 및 이사청관제를 공포하였다. 1906년 2월 1일 통감부 개청식을 가졌고, 1906. 03. 02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하더니 을사조약에서 통감이 오로지 외교에만 국한한다고 정한 규정을 어기고 내정간섭을 시작하였다. 드디어 3월 13일에는 통감관사에서 한국정부의 각부 대신이 참여하는 '한국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수시로 열고 이를 주재(主宰)하면서 사실상 한국의 내정을 총지휘하기 시작하였다.

조약 내용으로는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수비군을 지휘하는 동시에 명목상 보호국 지위를 확보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시대를 여는 출발이었다.

이후에도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외부로 나타나는 자주국이라는 허울로 위장하기 위함이었다. 그 증거로는 통감 설치 후에 계속하여 사단규모의 군 병력을 증강시키고, 경찰도 1,851명으로 늘어났으며, 경찰 고문도 초기 5명에서 678명으로 급격히 늘려 무력정치, 무단정치를 준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중 1907년 5월에는 하수인 이완용(李完用)을 중심으로 한일합방을 이끌어낼 내각체제를 만들었다.

아울러 우리도 3․1만세운동을 ‘조선독립만세운동’으로 부르지 말고 ‘대한독립만세운동’으로 통일시켜 불러야 더 합당하리라 생각한다.

 

1910년 8월 16일 일본은 합의문에 서명하도록 독촉하기 시작하였으며, 8월 22일에는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합의를 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8월 29일 순종에게 보고하니, 순종(純宗)도 별수 없이 이 내용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일본은 민족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독립투사들을 투옥하고 학살하였다. 물론 일체의 결사와 언론활동도 금지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무단정치는 모든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때에 1918년 1월 18일 미국의 대통령 윌슨은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제1차 세계대전 후 수립되어야 하는 평화의 본질에 관한 자신의 구상을 14개 조항으로 발표하였다. 그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3·1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갑자기 승하(昇遐)하자 일본인에 의한 독살설이 유포되면서 일본인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했다. 차제에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의 대표 33인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가 작성되었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드는 대규모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때맞춰 전국에서 상경하여 대기하고 있던 시민들과 민중이 가담하여 독립에 대한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시위는 전국적인 만세시위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삼일절 시위에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출신인 임규 (1863-1948)가 참여하였다. 그는 당시 서울배재학당의 교사였으며, 국민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서울의 소식을 듣고 익산에서는 3월3일 독립선언문이 배포되면서 만세시위운동에 불을 당겼다.

 

1919년 3월 5일 익산의 웅포에 사는 엄창섭은 대붕암리에서 군산영명학교 학생 강금옥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부탁받았다. 그리고 3월 7일에는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창영학교 내에서 고상준, 추병갑 등과 함께 3월10일 강경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상의하였다. 그리하여 고상준, 추병갑, 김종갑, 추성배와 같이 태극기 200여 매를 제작하고, 3월 10일 아침에는 서삼종을 시켜 태극기를 가마니에 넣어 옥녀봉으로 옮겨놓았다. 오후 3시경에는 옥녀봉에서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강경장터로 내려와 시위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바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 3월 10일 여산에서도 오산면 출신의 김치옥을 비롯하여, 여산의 이정, 이병석, 박기상, 정영모 등이 주동하여 200여 명이 모이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때도 주동자들이 곧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고 말았다.

초창기의 순수했던 만세시위운동은 일본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점차 격앙되고 격렬한 양상으로 변모하면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익산지역에서의 가장 대표적인 시위운동은 기독교 신도들이 주동하여 이리 장날에 거사한 4․4만세운동이었다. 당시 문용기는 군산 영명학교의 교사를 그만두고 고향 오산면에 와서 도남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애국심을 불태웠으며, 박도현, 장경춘 등 기독교계통의 인사들을 만나 4월 4일 이리장날에서의 만세운동을 도모하였다. 드디어 거사일 정오가 되자 이리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 명의 군중이 모였으며, 일제는 헌병과 보병부대를 앞세워 시위운동에 대비하고 있어서 충돌이 예견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군중의 수가 점차 늘어 1,000여명에 달하자 시위대는 일본헌병대와 출동하여도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일제는 소방대원과 일본인 농장소속 인부 수백여 명에게 창검과 곤봉, 갈구리까지 들려 무력으로 나섰다. 그러나 시위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급기야는 총포사격으로 제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문용기는 군중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일본 헌병의 칼날이 오른팔을 난자하였다. 그래도 그는 분연히 일어나 다시 왼손으로 만세를 부르며 앞으로 나가니 이번에는 왼팔마저 찌르고 말았다. 두 팔에 상처를 입은 문용기는 계속하여 온몸으로 만세를 불렀고, 결국 헌병의 총검은 그의 복부를 관통하고 말았다. 그는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는데, 이날의 순국자는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정만, 이충규 등 6명에 이르렀다. 또한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체포된 시위군중은 39명이나 되었다.

이를 계기로 만세운동은 관내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으며, 같은 날 오산면에서는 기독교인 30여 명이 목숨을 걸고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익산의 순국열사비(殉國烈士碑)는 1919년 4월 4일 이리장날의 만세운동 도중에 순국한 열사들의 넋을 기리는 비이다. 이 비문은 이승만대통령이 썼고, 1949년 4월 29일 시민의 뜻을 모아 그 안타까운 사건의 현장인 익산시 주현동 105-19번지에 세우게 된다. 그러나 친일세력이었던 이승만이 비문을 썼다는 이유로 이름자가 새겨진 부분을 뭉개버려 훼손한 채로 전하여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재환(1889-1951)은 금마면 용순리 출신으로 1910년 우이현, 안종운 등과 함께 서울에서 동지를 규합하는데 1천석의 재산을 사용하였다. 또 1915년에는 만주 길림성에서 광복회를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폈으며, 1920년에는 항일단체인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여 활약하였으나 12월에 강경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금마면 신용리 출신의 홍순갑(1896~1929)은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즉시 귀국하여 항일운동을 벌였으며, 왜경에게 체포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출옥한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하였고, 1929년 초 신민부산하 고려국민당 중앙검사부 집행위원으로서 군자금 모집차 입국하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5년형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은 갖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929년 10월에 순국하였다.

오산면 출신의 박연세(朴淵世, 1883~1944)는 박자형(朴子亨)의 아들로 군산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나, 군산 영명학교 교사들과 함께 사전에 검거되었다. 그는 법정에서 만세운동을 계획 중이었다고 당당히 말하였으며, 2년6개월의 형을 받았다.

이밖에도 왕궁면출신의 송영식과 주비단장이었던 소진형, 금마면출신으로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김화곤, 흑백당사건의 홍건표 등 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