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다시보기
3·1 운동(三一運動)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운동을 말한다. 당시는 일제의 강점기였었는데 1919년이 기미년(己未年)이었으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기에,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혹은 3·1만세운동, 3·1독립운동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시점의 전후상황을 살펴보면, 일본은 대륙침탈의 야욕을 품고 대한제국(1897.10.12~1910.08.29)을 발판삼아 교두보를 확보한 상태에 있었다. 1904. 02. 23 한일의정서부터 1910.08.29 한일합방 발표에 이르기까지 6년여 동안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회유하고, 강압을 주면서 얻어낸 결과였다. 그러나 조약이 내용과는 다르게 군대정치․헌병정치를 강행하던 일제에게,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승하(昇遐)가 화살로 되돌아왔다. 1895년 10월 8일 반일파인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기억하고 있던 국민들에게, 일본인에 의한 고종의 독살설이 급속도로 퍼지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인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했고 차제에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의 대표 33인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가 작성되었다. 이때는 1918년 1월 18일 미국의 대통령 윌슨은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제1차 세계대전 후 수립되어야 하는 평화의 본질에 관한 자신의 구상 14개 조항을 발표한 뒤라,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책임진다는 민족정신이 퍼져있었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드는 대규모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의 인산일(因山日)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춰 서울에 모인 백성들이 일거에 봉기한 독립운동이었으며, 전국적으로는 약 2개월 가량 계속되었다.
이 시위는 순수한 평화적 시위였으나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일제는 처음부터 대대적인 학살과 만행으로 탄압하여, 결국은 피로 얼룩진 역사적 사실로 변하고 말았다. 더불어 우리에게는 성공하지 못한 독립운동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민족적 거사가 단순한 모임 하나로 이룩될 수 없음은 누구나 짐작하는 바이다. 조금 앞을 살펴보면 1919년 2월에 이미 만주 지린과 연해주를 비롯한 중국과 미국에서 독립운동가 39명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때가 음력으로 1918년 무오년 12월이었기에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 혹은 대한독립선언(大韓獨立宣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편 바로 이어서 도쿄에서도 2·8독립선언이 발표되어 3·1운동이 발생하는 도화선(導火線)이 되었던 것이다.
천도교의 대표 손병희의 주도로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대표가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당시 최남선이 기초한 내용이 지나치게 한문투인데다가 문어체라는 지적이 있었으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이광수가 수정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선언서의 낭독에서도 일사분란하지 못함을 보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민족대표 33인은 오후 3시가 되어서도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명만이 모이게 되었다. 또 그들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태화관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나니 오후 4시 경이었다. 이는 지금으로 말하면 기자회견과도 같은 성격이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침략국의 강점기에 독립선언을 기자회견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목숨을 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종로 경찰서 고등계 형사 신철(申哲, 一名: 申勝熙)은 삼일운동에 관한 정보를 얻은 후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普成社)를 급습하여 인쇄 중이던 독립선언서를 보게 된다. 그러나 꺼져가는 민족의 불씨를 지필 독립운동을 차마 막지 못하고 돌아간 신철에게, 33인 중의 하나였던 최린이 불러내어 저녁을 먹으면서 돈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하였다. 독립운동 관련 기록에는 이때 신철이 돈을 받지 않았다고 알려졌으나, 기존에 정해진 3월 3일 거사를 앞당겨 3월1일에 치르는 특단의 조치가 취해졌다.
그럼에도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 모인 대표 33인이, 거사 장소로 정했던 탑골공원에 나가지 않고 태화관(泰和館)에 모인 것은 두고 두고 석연찮은 감정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들 민족대표 중에서 훗날 친일로 돌아선 자가 여럿 있다는 것을 우리 국민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대의를 버리는 자가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동일한가 보다.
한편, 진행상황을 모르는 학생들은 원래대로 탑골공원에 모였다가 지도자가 없음에 우왕좌왕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경신학교(儆新學校) 출신 정재용(鄭在鏞)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의 강기덕(康基德),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金元壁)과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위건(韓偉健) 등이 민족대표들을 찾아 나서기도 하였다.
3․1만세운동에 별다른 약속도 없었으나 순수한 마음으로 참여한 학생들이 천여 명이나 되었고, 이들은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마자 만세소리를 연호하며 민족의 자존을 깨웠다. 이때 지방에서 모인 백성들과 성안의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세를 외치니 글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한 학생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선혈로 '대한독립' 4자를 써서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미국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면서 깊은 감동을 표했다.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역설하고 군중을 인도하여 종로에 이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조금도 물러나지 않다가 저녁 6시가 되어서 자진해산하였다. 다음날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시켰는데 그 숫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꺼질줄 모르는 독립만세운동은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의 60일 동안 무려 1,214회에 걸쳐 일어났다고 기록되고 있다.
자신보다 먼저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자는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으며, 일신의 영달을 구하지 않는 자세가 아름다워 보인다.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조국은 영원하여야 한다. 만세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지만 그중 격렬했던 몇 군데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병천리의 아우내 장터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1919년 4월 1일에 3,000여 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유관순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연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자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했고, 이 소식을 듣고 온 일본 헌병들과 당시 천안 철도엄호대장이던 키네대위 등 6명이 합세하여 평화로운 시위를 하는 군중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다. 이날 무자비한 총공격에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었고 유관순을 포함한 죄없는 주민 30여명이 부상을 입거나 체포되었다.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의 교사 김구응은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그리고 학생들 6,400여 명을 병천장에 모으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일본 경찰이 우리 민중의 기수(旗手)를 찌르고자 하니 기수는 맨손으로 칼날을 잡아 대항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난자당하여 죽임을 당하자 이에 김구응이 적의 잔인무도함을 힐난하여 변박(辨迫)하니 김구응에게 총을 발사하여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악에 받힌 일본군은 시체가 된 김구응의 머리를 때려 부수고 사지를 난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소식을 들은 노모가 시체 옆에 이르러 크게 꾸짖으니, 그의 늙은 어머니마저 찔러 죽였다.
강서군 사천장터 만세운동
평안남도 강서군과 대동군의 만세운동을 합하여 일컫는 것으로, 만세 시위를 조직하던 기독교계 인사들이 사천헌병대에 사전 적발되어 3월 1일 이전의 거사보다 먼저 구금되어 있었다. 이어서 1919년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의 사천시장 방면으로 만세행진을 벌여 나갔다. 이에 맞서 사천헌병주재소의 소장 사토(佐藤)와 헌병보조원 강병일, 김성규, 박요섭 등은 미리 매복해 있다가 다가오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수십 명을 살상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돌을 던지며 대항하던 시위대에게 맞아 죽었다. 주요 관련자로는 사형을 당한 주진탁을 비롯하여 고지형과 지석용 등이 있다.
삼진의거
1919년 3월 28일과 4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경상남도 창원지역의 연합 만세운동을 말한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마산시 합포구 진전면과 진북면, 진동면에서 만세운동에 동조하는 인사들이 모인 초대형 연합운동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변상태가 주동이 된 의거였으며, 1차에서 피신한 주모자들이 뭉쳐 약 3,000명의 비무장 시위대가 모여 2차 삼진의거를 일으켰다. 그러나 진북면 지산교 부근에서 일제의 유혈진압에 의해 5명이 즉사하고 11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때 주동자였던 변갑섭과 변상복도 순국하였다.
제암리 학살사건
현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의 장터에서 1919년 3월 말과 4월 5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이 사건의 발단이다. 1905년 8월 5일 건립된 제암리교회의 청년들과 천도교 김상렬이 주동이 되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군은 이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무차별 학살을 하였고, 10일 후에는 예전의 행동에 대해 사과할 것처럼 속여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더니 갑자기 문을 잠그고 총을 쏘며 불을 질렀다. 이때 숨진 사람은 남자 21명과 여자 2명이었으며, 인근 팔탄면 고주리에서도 김성렬을 포함한 남자 6명이 학살당했다. 일제의 방화로 민가 32가구가 불에 탔던 참혹한 현장이었다. 제암리의 3·1운동순국유적지는 국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어있다.
곽산 학살사건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에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봉기하여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일제는 독립운동 시위자 100여 명을 체포하였는데, 주모자 박지협(朴志協)은 체포즉시 타살되었다. 일제는 이후에도 50여 명을 잔인하게 고문하여 죽음으로 몰고 갔다. 뿐만 아니라 군중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가 하면, 미친개를 낚는데 사용하던 갈고리로 수천 명을 참살하는 잔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때가 1919년 3월 6일이며 곽산참살(郭山慘殺)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천 학살사건
1919년 3월 3일 평안남도 사천에서 발생한 만세운동으로 기독교계 목사 한예헌(韓禮憲)과 천도교 교구장 이진식(李鎭植)을 비롯하여 최승택(崔承澤), 김병주(金炳疇) 등이 주도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대는 무차별 총격으로 저지하자 73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만세행진을 계속하면서 헌병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 2명을 타살했던 사건이다.
화수리 학살사건
이 사건은 1919년 4월 3일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수리의 주재소에 불을 지르면서 시작되었다. 헌병이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하자 이에 격분한 군중이 일본인 순사 1명을 타살함으로써 새로운 불씨가 되었다. 일본군은 4월 11일 새벽을 기하여 민가에 불을 질렀고, 놀라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거나 칼로 찔러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이때 마을 전체의 40가구 중 22가구가 불에 타서 평온했던 마을이 폐허가 되고 말았다.
맹산 학살사건
평안남도 맹산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주축을 이뤄 만세시위를 벌였다. 사건 며칠 후 일본군은 독립운동 지도자 한 사람을 체포하여 헌병분견소에 가두었고, 혹독한 고문을 가하자 사람들이 격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러 몰려드니 왜병은 이들을 안마당에 끌어들인 뒤 문을 잠그고 총을 난사하자 일거에 60여명이 사살되었다. 모인 무리 중 일부가 살아나와 일본의 잔학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대구 학살사건
삼일운동은 대구에서도 일어났다. 시민 2만 3천 명이 봉기한 사건으로, 113명이 총살되었고 87명이 부상하였다. 이날 김용해는 아버지를 보호하려 맨손으로 싸우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김용해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아버지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며칠 후 사망하였다.
합천 학살사건
1919년 3월 16일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에서 지역주민들과 해인사의 승려들이 주동이 되어 시위를 벌였는데, 그 수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시위는 3월 18일에도 일어났다. 일본 군경은 쇠몽둥이와 장검으로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사태수습이 어려워지자 총을 쏘아 3명이 죽고 다수가 부상을 당했다. 3월 18일에는 삼가면 장터에서 500여 주민이 모여 만세운동을 하였다. 이들은 일경과 군인을 대동한 진압군에게 무차별 폭력과 체포를 당하다가 저녁 8시경에 강제 해산되었다. 3월 19일에는 합천군 대정면에서도 지역 유지와 노동자들이 고현시장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는데, 주모자 5명이 체포되어 진주로 압송되었다. 또 3월 22일에는 상백면, 백산면, 가회면, 삼가면 등에서 3만여 명이 모여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일본군은 이날만 해도 질서를 지키며 평화로운 시위를 벌이던 군중에게 발포하여 42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중상하였다. 같은 날 합천군 초계면의 유림과 학생들도 시위를 하였는데 8천여 명이나 모였다. 여기서도 일본군의 총에 의해 5명이 죽고 수십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삼가장터에서는 3월 25일에도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남원 학살사건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장이었던 이석기는 4월 3일을 기해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인근의 19개 면장에게 글을 보내어 일제히 사직하게 하고, 식목행사를 핑계로 수만 명을 모아 태극기를 높이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놀란 일본 헌병이 주모자를 체포하였으나 군중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행진하였는데, 그 행렬이 장장 30리에 뻗쳤다. 다급해진 일본군이 발포하여 11명이 즉사하였는데 부상자는 부지기수다.
익산 이리장날 만세운동
이리만세운동의 시발은 3월 3일이었으며, 3월 10일과 16일에는 익산군 전체가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후 기독교인으로 군산영명학교 출신이며 남전교회가 건립한 도남학교의 교사였던 문용기가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전라북도 이리에는 일본군 보병중대가 주둔하여 검문검색이 심해지면서 거사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교인이면서 학생이었던 박영문, 장경춘, 그리고 박도현 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접촉하면서 일을 도모하였다. 드디어 4월 4일 12시가 되자 이리장터에는 기독교인과 학생, 시민 등 300여 군중이 모였다. 참여한 군중들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들고 문용기의 지휘에 따라 태극기를 흔들며 대열을 지어 시가행진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군중의 수가 점차 늘어 1천여 명에 이르렀고, 그와 더불어 기세가 오르자 당황한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때 문용기를 비롯한 6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부상자도 속출하였다.
군산 3·5 만세운동
전북 군산의 만세운동은 영명학교 출신 김병수가 주모하였다.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중 한 명이던 이갑성과 접촉하여 독립선언서 200여장을 건네받았고, 영명학교 학생, 멜본딘여학교(현 군산영광여자중고등학교)학생, 구암교회 교인, 시민 등 500여명이 참여하는 거사를 3월 5일 일으킨 것이다. 시위는 이후에도 28차례나 계속되어 시민 3만여 명이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일제의 폭력진압으로 인해 53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실종되었으며, 195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는 만세운동으로 인한 사상자로서는 전라북도 내에서 가장 많은 규모였다. 또한 군산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한강이남 지역에서 최초로 벌어진 만세운동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에서 보았듯이, 면적이 적은 전라북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역사적인 만세운동이 3군데서나 발생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전라도는 풍부한 농업시설을 바탕으로 생계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향학열이 높았고, 신사고에 눈뜬 개혁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는 예로부터 민중심에 강하고 의협심에 불탔던 지역이었던 점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 전라북도는 탐관오리를 벌하려했던 춘향전의 고향이며, 부정축재자를 징벌하던 녹두장군의 고장으로 순수한 민간의병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만세운동이 이러할진대, 역사 속에 묻힌 사건들은 그 얼마나 될지 알 수도 없다.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200여만 명이 참가하여 7,509명이 사망하였고, 15,850명이 부상당하였다고 한다. 총 체포 인원은 45,306명에 달하며, 민가 715호와 교회 47개소, 학교 2개소가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를 보더라도 총인원 106만 명이 참가하였고,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하였으며, 12,000명이나 체포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국가의 독립운동을 하고도 나를 내세우지 못하는 나라가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최소한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그랬다. 광복이 되면서 친일파들이 득세를 하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또 다시 눈엣가시가 되고 만 것이다. 더불어 그들의 후손들이 귀중한 자료들을 숨기거나 아예 없애버리는 사태를 빚게 되었다. 자신의 공적을 겸양으로 숨기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따라 일부러 감추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제 마지막 독립운동가는 물론 그의 직계 후손마저 만나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모두가 세상을 뜨고 간직했던 기록들도 사라져가는 때문이다. 확연했던 민족의 역사가 과거의 일화로만 구전되어질 아찔한 순간이다.
1945년 9월 9일 일본군 12만 명의 정식 항복을 받은 미국의 하지중장은 한국의 즉시 독립은 아직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당시 잘 알려진 아베를 비롯한 일본인 관리들을 혼란된 상태가 진정될 때까지 당분간 잔류케 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바로 청산하여야 할 일본인과 친일세력들을 오히려 보호하는 형국이 되었고, 그들에게는 자신의 죄상을 숨기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친일파들은 말한다. 우리의 삼일운동 당시 조선에는 일본군이 없었다고. 그러나 일본군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자주독립을 요구하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데 반하여 무력으로 진압하고 총칼로 막았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피해를 당한 한국사람이 어찌하여 잔혹했던 일본군을 두둔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들이 분명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면 그런 말이 나오는 게 당연할 듯싶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조선군사령관 일기에서는 제암리학살사건의 은폐를 위한 내용과 함께 분명히 ‘헌병경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또 말한다. ‘헌병경찰’이라 하였으니 군인이 아닌 경찰이라는 것이다. 역시 군대를 안 갔다 온 사람들은 헌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 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이다. 백번을 양보하더라도 경찰이 발포하면 무력진압이 아니고, 군인이 총을 쏘면 무력진압이 되는 것이란 말인가. 나는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헌병경찰'이라는 단어를 보면 헌병이라고 쓰여 있으니 군인이 생각난다고.
역사 왜곡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말장난 잘하는 사람들을 간신배로 치부해왔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의를 망가뜨려왔음도 익히 알고 있다. 우리는 명심하여야 한다. 잘못은 용서하되 과거는 반드시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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