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29. 소울음 소리가 들려왔다는 자명사의 대웅전 목조여래좌상

꿈꾸는 세상살이 2010. 4. 15. 15:33

자명사대웅전 목조여래좌상(自鳴寺大雄殿 木造如來坐像)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법성리 280번지에 자명사가 있다. 사찰의 대웅전 내부에 목조여래좌상 1구가 있는데, 2002년 5월 30일 익산시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자명사 소유이다.

 

자명사(自鳴寺)는 용안면 법성리 법성마을에서 교동리로 넘어가는 용두산의 고개마루에 자리잡고 있다. 흔히들 용두산을 법화산 또는 우슬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은 용안면사무소와 용안향교가 있는 산의 뒤편이다. 용안에 산재한 동헌이나 향교, 삼세오충렬유적 등이 조상들의 문화와 역사를 전하는 문화유적으로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가까운 거리에 모여 있어 전통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기도 하다.

자명사는 신라 문무왕 18년 678년에 선설대사(禪說大師)가 창건하였으며 당시에는 자웅사(自雄寺)라 하였다고 한다. 1944년 4월 진명대사(振明大師)가 중수하였고, 용안에 살던 고을의 사또 민인재가 꿈을 꾸니 소우는 소리가 읍내에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하여 자명사(自鳴寺)로 고쳤다고 한다. 주요 건물은 대웅전 3칸, 칠성각 3칸, 요사채 3칸으로 되어있다.

자명사목조여래좌상은 목조에 칠을 한 좌불상으로서 자명사의 대웅전에 봉안되어있다. 불상의 높이는 94cm이며 전체적으로 단정하면서도 아담한 형상이다. 고개가 약간 앞으로 숙여진 것은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이 불상의 조성연대는 조선시대 후기인 약1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머리는 짧은 상투형의 정상계주(頂上髻珠)와 넓은 반원형의 중간계주(中間髻珠)가 표현되었으며, 전체가 뾰족한 나발의 형상이다. 앞으로 약간 숙이고 있는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며, 가는 눈에 활형(弓形)의 눈썹, 큼직한 코, 꾹 다문 입술 등이 원만하면서도 자비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고개를 약간 숙인 불신의 형태와 가슴을 넓게 편 모습은 전체적으로 방형의 신체적 표현이다. 법의는 통견으로 배 부근의 옷자락이 수평으로 놓여있고, 두 무릎에도 수평으로 접혀진 옷주름이 유려하다. 수인을 보면 오른손은 가슴부근까지 들어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고 엄지와 중지, 약지를 마주잡고 있다. 왼손은 무릎위에 대고 역시 엄지와 중지, 그리고 약지를 붙잡고 있다.

자명사의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앞뒤로 산이 있고 좌우로도 산이 있는 전형적인 산사다. 그러나 산이 높고 골이 깊은 심산유곡은 아니며, 그냥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 다가갈 수 있는 마을 뒷산에 묻혀있는 사찰이다. 원래 용안면의 거주인구가 적은 탓도 있지만 민가와 멀리 떨어진 탓으로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따로 없는 곳이다. 바꾸어 말하면 도심 속의 산사라고나 할까.

그런 눈발치에 자명사사적비가 있다. 사각형의 대석위에 세워진 비석은 대리석으로 되어있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된 옥개석을 얹어놓았다. 이런 대리석 비석에 화강석 옥개석은 우리나라 전형적인 비석 구성으로 사대부나 일반 양반들을 구분하지 않고 이다.

비석은 높이가 138cm, 폭이 54cm, 두께가 21cm이다. 이 사적비는 세존응화(世尊應化) 2971년 계미(癸未)라 적혀있어 1943년에 세워진 것으로 파악된다. 비문에는 사또가 꿈을 꾸니 소울음 소리를 들려 자명사로 개칭한 것으로 쓰여 있다.

어느 오후 해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갈 때쯤 내가 찾은 자명사에는 연로하신 스님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은 밖에서 인기척이 나거나 누군가가 기웃거려 방문에 그림자를 내어도 내다보지도 않으셨다. 댓돌위의 신발로 보아 누군가는 있어 보이는데 조용하기 그지없는 사찰이었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야 하나 한참을 망설였지만, 먼 길에 다시 올 기회가 언제일지 몰라 큰소리로 불러보았다. 얼마 후에 문을 열고 나오시는 스님의 모습은 오래 전에 세상을 뜨신 부모님을 생각나게 하셨다. 마른 체격에 주름진 얼굴은 세월의 연륜이 역력하였다. 긴 시간 대답이 없었던 것은 혹시 그때가 예불시간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랬었다면 나는 그야말로 불청객에 지나지 않는다.

불청객이 바라보는 자명사는 터가 좁아보였다. 대웅전의 옆으로 칠성각이 있기는 하지만 경사가 급한 산비탈을 깎아 세운 것으로 높은 축대위에 서있었다. 입구에는 종각이 있고, 그 옆에 스님을 닮은 키 큰 나무가 서 있는데, 이것이 바로 대문도 없는 문설주였다.

아무리 산새와 더불어 하루를 지낸다고 하지만 자명사는 부처님에게도 외로운 사찰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좌우협시불을 조각 중에 있다고 한다. 나무로 세기고 다듬는 작업이야 아무 때나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불상은 종교의 대상이기 때문에 함부로 만드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종파의 본사나 정해진 사찰에서 제작하여 일정한 의식을 거친 뒤 불상으로 모셔올 계획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자명사에도 목조삼존불 또는 목조삼존불좌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새로 만들어지는 불상이 어떤 모습일지, 어떻게 불리는 불상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문화재로 등록된 불상은, 외롭지만 현재를 지키고 있는 목조여래좌상 1기뿐이다. 다음 초파일에 안치식을 거행하고 정식으로 모실 예정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때에 다시 온다는 약속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여러 문화재를 찾아다니면서 제대로 약속을 지켜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껏 정리하여 약속을 하더라도 다른 긴급행사가 생긴 곳에 찾아가야할 형편이 되거나, 개인적인 다른 볼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었다.

내가 언제 또 자명사에 들르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문화재답사라는 이름으로 형식적인 방문을 하였기에 자명사를 돌아나올 때까지 소울음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산사를 종교적인 마음으로 즐겁게 찾는 사람들이 소울음소리를 듣는 날이 오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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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4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