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약사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 6월이다. 이때는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스님을 보내 불상과 경전을 전한 것이며, 고구려는 이때 성문사(省門寺)를 지어 순도를 머물게 했다. 또 374년에 아도(阿道)스님이 오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머물게 하였다. 이 기록을 한국 불교의 공식적인 시발로 보고 있다.
한편 백제에는 침류왕 원년 384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는데, 왕이 직접 교외에까지 나와 마라난타를 맞았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국가불교의 개념이 있었다는 것이며, 세간에는 이미 불교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재위:417∼458) 때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 또는 阿道)라고 하는 전도승이 포교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배타세력이 강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묵호자는 경북 선산에서 모례(毛禮)라는 사람의 집에 숨어 있다가 순교하였다. 이후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法興王) 14년 527년의 이차돈(異次頓) 순교가 있은 다음부터였다.
불교가 국가종교로 인정된 후에는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호국사찰은 물론이며 지방에도 많은 사찰이 세워졌으며, 이름있는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중국으로 유학을 가는가 하면 일본으로 건너가서 불법을 전수해주었다.
고구려의 승랑(僧郞:413~491)은 중국에 가서 구마라습 계통의 삼론학(三論學)을 연구하고 이를 한 단계 발전시키니, 중국의 무제(武帝)가 승려 10여 명을 뽑아 그가 거주하는 섭산(攝山)으로 보내 승랑의 학문을 전수하도록 하였다. 또한 신라의 왕손인 원측(圓測: 613~696)은 15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범어(梵語)를 비롯하여 6개 국어를 구사하는가 하면, 유식학(唯識學)에도 통달하여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신라의 의상(義湘:625~702)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화엄종(華嚴宗)을 연구하고 귀국하여 신라의 화엄사상을 크게 선양했다.
특히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높은 식견을 가졌다는 원효(617~686)는 불교의 모든 교리를 종합하고 통일하는데 주력하였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등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니, 학술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 실천에도 탁월하였다. 이 밖에도 원광(圓光), 자장(慈藏)과 같은 수많은 고승들이 있어 불교를 일상에 접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669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면서 원효, 원측, 의상은 물론 의적(義寂), 도증(道證), 승장(勝莊), 도륜(道倫), 대현(大賢), 현일(玄一), 신방(神昉) 등이 수많은 이론을 정립하고 사상을 펼쳐나갔다. 신라 말에는 중앙귀족의 부패와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불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과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교의로 결사(結社)운동을 일으킨 지눌(知訥) 등이 그러하였다.
고려에는 지눌의 뒤를 이은 혜심(慧諶),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一然), 임제선풍(臨濟禪風)을 선양한 태고(太古), 나옹(懶翁)과 같은 많은 고승이 나타났다. 이는 고려 때에도 왕실불교를 위주로 하는 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신라말과 같이 지나친 비호는 오히려 타락을 초래하였으니, 결국은 주자학을 근거로 배불론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에 등장한 조선은 고려에 상응하는 정책을 펼치니 주자학을 근간으로 불교배척운동까지 전개되었다. 사찰의 소유재산을 줄이는가 하면, 국가가 인정하는 사찰의 수도 제한하였다. 심지어 사찰을 기방으로 바꾸고, 승과를 폐지하였으며, 불상을 녹여 군수용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로써 찬란했던 불교문화가 순식간에 침몰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조선의 후반기에 들어 다시 불교의 필요성을 주창하였지만 옛 영화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때는 승려의 도성출입조차 제한되고 보니 사찰은 산중으로 은거하게 되었고, 불교는 속세와 거리를 두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불교는 고난을 받았다. 일제는 불교의 중흥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치니 오히려 한용운, 백용성 등의 불교계 인사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었다.
해방이 된 후에도 불교의 중흥은 쉽지 않았다. 혼란기를 겪으면서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한 사찰의 피해도 확산되었다. 거기다가 일본이 남기고 간 재산의 분배문제는 신흥세력과 기득권간의 골을 깊게 만들어 갔다.
한국불교가 안정이 되면서 조계종을 비롯하여 태고종(太古宗), 천태종(天台宗), 진각종(眞覺宗), 법화종(法華宗) 등 18개 종파로 분리되었다. 이중 조계종은 한국불교의 전통종단으로 승려가 무려 1만여 명이나 되며 사찰도 2천여 개에 달한다. 해인사, 통도사, 불국사, 범어사, 송광사, 법주사 등 유명한 사찰은 모두 조계종에 소속될 정도다. 이후 새로 건립된 사찰들은 신흥종단이 대부분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불교신도 수는 1,5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지만, 교리를 이해하는 극진한 불자 수는 매우 적다. 이런 점은 여타 종교에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한편 승려를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곳은 전국에서 비구 강원(講院)이 15개소, 비구니 강원(講院)이 7개소 등이며 해인사강원과 운문사강원이 대표적이다. 조계종 종단 에서 운영하는 경기도 김포시 중앙승가대학교는 학력이 인정되는 학교로, 전통적인 방법과 교과목으로 불교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아 불교가 가장 전통 있는 종교로서 예전과 같은 위상을 갖추기 위해서는 승려의 자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 대두된다. 작은 사찰에서는 새로운 지식이나 수준 높은 학문을 연마할 기회가 적은 것이 현실이나 그냥 핑계에 그쳐서는 아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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