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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약사

꿈꾸는 세상살이 2010. 4. 19. 08:32

한국기독교의 약사

 

우리나라의 기독교 관련역사는 1816년부터 시작된다. 이때는 맥스윌과 홀이 군함을 이끌고 충남 서천군 서면의 마량진항 갈곳마을에 정박하였다가 조대복에게 영문(英文) 성경을 전달한 시점이다. 다음 1832년 7월 23일에는 영국의 동인도회사 소속 군함 로드암허스트호가 한국에 정박하게 되었다. 이 선박에 탑승했던 사람 중 의사 겸 통역을 하던 귀츨라프(K.F.A Gutzlaff : 1803~1851)가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고대도리에 한 달간 머물면서 전도문서와 성경을 전하였고 복음을 전파했다.

당시 카톨릭 선교사를 애타게 기다리던 마을 주민들에게 기독교 선교사가 나타난 것인데, 이들은 자신의 항해기(航海記)에 조선이 정치적으로는 매우 혼란하고, 내부적으로 파벌싸움을 일삼으며, 중국에는 맞서 싸울 능력이 있으면서도 오히려 조공을 하며 복종한다고 적고 있었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선교사가 성경을 가지고 들어오다 대동강에서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 1874년 10월에는 로스선교사가 상인 백홍준 부친에게 한문(漢文) 신약전서를 전달하였으며, 1880년 성경휴대죄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하였었다. 그 후 1885년 4월 5일 미국의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의 감리교선교사 알렌이 인천항에 입국하였다. 알렌은 4월 10일 광혜원을 설립하여 치료를 겸하면서 선교를 시작하였고, 후에 제중원으로 고쳐 불렸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는 알렌의 입국을 기원으로 삼고 있다.

1885년 4월 5일 기독교 대한감리회 여선교회가 창립되었고, 1886년 5월 31일 이화학당이 설립되었다. 1886년 6월 8일에는 배재학당이 개교하였고, 1886년 7월에 노춘경이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에 의해 한국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890년 4월 데이비스가 부산으로 전도하러가던 중 과로와 병으로 순교하였고, 1895년 7월 3일에는 소래교회가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교회로 설립되었다. 1897년 5월 여의사인 마티 잉골드에 의해 전주에 예수병원이 설립되었고, 1901년 5월 14일 김창식, 김기범 등이 한국인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음으로써 본격적인 기독교 전파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현대 선교역사의 기적’이라 할 만큼의 경이로운 성장을 이룩하였다. 인접국인 중국은 1607년 로버트 모리슨의 선교이후 27년간 불과 3명의 신자가 생겼으며, 태국에서는 30년간의 선교로 단 2명이 세례를 받았을 정도이다. 몽골의 경우는 1817년 영국의 슈미트 선교사를 비롯하여 스톨리브라스, 스완, 길무어 선교사 등 무려 47년간의 전도에 단 한 명의 신자도 호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개신교는 선교부터 24년만인 1909년에 노회를 조직하였고, 1912년 설립총회를 마치고는 일본, 시베리아, 중국 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5년 현재 우리나라의 개신교 신자는 18.3%, 가톨릭 신자는 10.9%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첫 선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급속도로 퍼진 만큼이나 많은 희생도 따랐다. ‘순교자의 피는 곧 교회의 씨앗’이라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이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피로 점철되어있다. 카톨릭을 보면 네 차례의 극심한 박해를 통하여 약 3만 명의 순교자를 냈으며, 기독교 역시 일제의 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약 3천 명이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기독교가 번성하면서 이단아가 많이 나타났다. 이단은 글자그대로 예전과 상이한 종파라는 뜻이며, 기존의 기독교종파에서 거리를 두고자 하는 계통이다. 이들은 현재까지의 신앙적인 면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며, 예배를 드리는 방식이나 교인들간의 교제에 대해서도 다른 면을 보여준다. 어떤 때는 목회자가 자칭 재림예수라 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마귀로 보는 것들도 포함되었다. 또는 인류역사의 종말을 말하면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세상의 재산을 모두 헌납하기를 강요하며 죄를 속하는 방식으로 육체적 교감을 주장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물의를 일으키자 급기야 신도들이 교주를 고소 고발하는 사태로까지 번져 재판에서 유죄를 받는 경우도 등장하였다.

그러한 교회들에 대하여 일반적인 기독교계에서 이단교로 분류하며 선을 긋고 있는데,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교파의 명칭을 두고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적인 판단에서 분류하기에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속단하기 어려운 문제도 따른다.

통상적으로 지금까지 이단교로 일컬어지는 경우는 공동생활체를 형성하거나 재림주를 표방하는 계통에서 27명이 활동하고 있다. 또 세상의 말일을 대비하는 복음론에 4명이 있고, 마귀론으로 무장한 6명과, 구원론을 바탕으로 하는 6명, 토요일계에서 2명, 시한부종말론으로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17명,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다는 내용으로 주장하는 21명, 기타 성경을 달리 해석하거나 나체 춤을 추는 등 사람을 현혹시키는 방식의 15명, 내용은 위와 같으나 외국에서 전래된 경우도 16명이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설교내용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어떤 내용을 요구하는지 세밀히 관찰하지 않고는 단정짓기 어렵다는 것을 지적해둔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에 대한 신도수가 늘어나고 목회자가 증가하면서 생기는 부작용의 하나는 아닐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