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55. 문간채로 담장을 이룬 함라 김안균가옥

꿈꾸는 세상살이 2010. 11. 28. 05:31

 


함라면 함열리 457번지에 있는 고가옥 일체가 1986년 9월 9일 시도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한식목조에 기와지붕인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 등이 5,387㎡나 되며, 아들 김종민의 소유로 되어있다. 이 가옥은 선대(先代)부터 지어져 온 주택이며, 상량문에 의하면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에, 행랑채는 1930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안균(1934~2004)의 부친은 만석꾼 김병순(金炳順 1894~1936)으로 현지 3대(大) 부자(富者)이며 김진사(金進士)로 통했다. 이 집은 개화기 부농의 주택으로서 조선 후기 양반가의 형식을 취하면서 일본 건축 수법을 섞어 놓았다. 전북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주택이며, 대지는 2,318평으로 건평이 188평이나 된다. 지금은 문화재로 등록된 이후 본채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남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개울을 따라 형성된 도로에 접하여 길게 늘어선 문간채가 담장을 대신한다. 문간채는 행랑과 바깥 사랑채, 창고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문간채 끝에는 효자정문(孝子旌門)이 하나 있는데 이는 김기형효자정려각이다.

김기형(金箕亨)은 김안균의 증조부로 본관은 김해, 자는 덕효, 관직은 운봉현감을 지냈다. 임피, 웅포, 나포 등 지역에서 구제활동을 하자 이에 주민들이 힘을 합쳐 적선비를 세웠다는 말도 전한다. 부친이 병이 들자 그 병세를 알아보기 위하여 변의 상태를 맛보는 상분(嘗糞)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돌아가시자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김기형의 아들 석종(錫宗)은 한학자로 자는 자서(滋瑞), 호는 열재(悅齋)며 고종10년 1873년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에서 진사(進士)가 되었고 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이 집에 들어가려면, 먼저 문간채를 지나 우측으로 돌아야 한다. 다음에 좌측으로 돌아선 다음, 다시한번 좌측으로 돌면 꼬리달린 ㄷ자 즉 완전한 ?형태의 통로를 지나 처음 지나간 문간채의 위치와 일직선에 서게 된다. 여기서 가던 방향으로 정면을 바라보면 창고나 기타 부속채가 있고, 고개를 돌려 우측을 바라보면 안채의 마당에 이른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이 생활하지 않고 문화재로만 관리되고 있어서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를 외부에서 보면 공간이 담장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나 복도를 통해 두 건물의 평면을 연결함으로써, 외적으로는 남녀공간을 구분한 조선시대의 상류주택 배치를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 내적으로는 실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안채는 정면에서 보면 일자형(一字形) 집인데 뒤쪽에서 보면 방을 덧달아낸 고패형(ㄱ字形) 집이다. 안방은 부엌과 대청사이의 두 칸을 차지한다. 안방 뒤쪽에 한 칸씩의 골방을 마련하였으며, 안방과 대청사이에는 미서기문을 달아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대청은 전면에 네 짝의 분합문(分閤門)을 설치하고 여름에는 들쇠를 이용하여 완전히 개방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건축부재 역시 고급재료를 사용하였으며, 공력면에서도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안방과 분리하여 별도의 침실을 둔 것이라든지, 사랑채와 안채의 사이에 복도를 둔 것이 그렇다. 건물 내부에도 작은 복도를 두어 채광에 많은 신경을 쓰는 한편, 각 실의 편리성을 보장하였다. 사랑채 측면에 변소와 세면소를 별도로 둔 행랑채가 있고 그 건물의 끝에는 목욕탕시설도 갖추었다. 주춧돌은 화강석인데 마치 기계로 다듬은 것처럼 곱게 갈고 닦아 세워놓음으로써 새로운 건축미를 보여준다.

사랑채는 팔작집으로서 평면구조가 안채와 비슷하나 동쪽 끝에 큰 누(樓)마루를 구성하여 한 칸을 돌출시켰다. 다락형으로 높게 만든 누마루에 앉으면 정원의 풍광을 완상(玩賞)할 수 있는데, 정원은 일본식 조원수법(造園手法)을 가미하였다. 정원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이 있고, 희귀목과 괴석도 많아 당시의 호화스러움을 엿볼 수 있다.

사랑채는 기둥머리를 홈을 파서 짜맞추는 익공(翼工)으로 꾸미고 주간(主幹)은 소로수장(小?修粧)으로 장식하였다. 서양식 주택처럼 거실과 침실을 분리하였으며, 마루 끝에 설치한 유리 미서기문과 붉은 벽돌을 사용한 마루 밑에는 고막도 있다. 그리고 함석 차양 등은 근대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가옥은 전통적인 상류주택이 개화의 물결 속에서 어떻게 변모되어 왔는가를 잘 보여주는 주택이다.

인근에 조해영 가옥과 이배원 가옥이 있어 토석 담장과 한옥 기와지붕 등이 어우러져 전통적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2006년 6월 19일에 ‘함라마을 돌담길’을 등록문화재 제263호로 지정한바 있다. 1936년 8월 11일 동아일보에는 김안균의 장형인 김해균이 선친의 뜻에 따라 거금을 기증하였다는 기사도 있다. 또 가옥 내에 김안균의 증조부인 김기형(金箕亨)의 계미년(癸未年) 1883년 효자비가 있다. 이 효자정려각을 보면 김안균가는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전래로 부자였던 집안에서 커다란 가옥을 미리미리 지어왔다는 말에 설득력도 있어 보인다.

나도 이집은 몇 차례 방문하였지만 그때마다 항상 문이 닫혀있어 내부를 관찰할 수 없었다. 그러다 사전에 예약을 하고 허가를 받으면 방문도 가능하다는 제보를 받았지만,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방문목적이 그냥 보고 싶다는 이유로 방문을 허락해 준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고, 예약한 날짜에 시간을 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어서였다. 살다보면 편리한 예약이 부담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생긴다. 인근 여러 곳의 방문을 계획하였으나, 한 곳만 성사되고 다른 곳은 승낙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그런 예이다. 머나 먼 곳을 방문하기로 어렵사리 약속을 하였으니 가지 않을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다음으로 미루자고 사정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오늘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대문간에 이르렀다. 자세히 살펴보니 안으로 잠겨있는데, 이것은 분명 사람이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없었다. 합작문은 손을 넣어 열 수 있을 정도로 헐거웠지만, 그것은 방문자로서 할 도리가 아니었다.

다시 보아도 문은 잠겨있었고, 한 바퀴를 돌고 와서 보아도 문은 그대로였다. 어쩔 수없이 포기하고 저만치 가는데 문소리가 났다. 반가운 마음에 뛰어와서 사정을 해보았지만 대답은 확고하였다. 안 되는 이유를 물어도 묵묵부답이더니 최종 결론은 카메라 때문에 안 된단다. 나는 내부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으러왔는데 카메라가 있어서 안 된다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한참을 어르고 달래서 알고 보니 그것은 내 카메라 때문이 아니라 감시용카메라가 있어서 통제를 한다는 것이었다. 신분을 확인시켜주고 소유자에게 전화승낙을 받자고 하니 연락처를 모른단다. 알고도 모르는 것인지, 몰라서 모르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지만 우리는 모종의 합의를 하였다. 관리인과 같이 갈 것, 얼굴을 똑바로 들고 걸을 것, 다른 데는 기웃거리지 않고 건물만 쳐다볼 것 등으로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혹시나 이일로 인하여 관리인이 어려운 처지에 당한다면 그것도 난처한 일이 될 것이다.

어렵게 어렵게 들어선 내부는 홍보사진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제비꼬리 처마며, 복도가 딸린 내부라든지, 안채와 사랑채를 통과하는 담장의 홍예문, 그리고 오래된 정원수 등이 이채로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마치 미로찾기와 같고 퍼즐맞추기와도 비슷한 대문간을 통과하는 코스였을 것이다.

일본의 고급주택이 주로 건물 한 동의 내부에서 공간과 역할을 배분하였던 것에 비하면, 우리네 한옥은 처음부터 여러 채의 건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게 보면 신분의 차이나 사람간의 차별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보장이며 하는 일이 다른 사람과의 분리라는 효율성의 표현방식이었을 것이다.

 

2010.11.17  익산투데이 게재분